◎ 마태복음 21장 1-11절 겸손하신 왕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떠나 베다니로 들어가셨다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셨을 때에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21장 2-5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스가랴선지자가 자신에 대하여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하신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맞은 편 동네로 들어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또 마중 나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 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종려나뭇 가지를 베어 길에 펼쳐놓으면서 환영하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라가면서 큰 소리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외쳤습니다.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시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환영을 하지?”하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인 나사렛 예수라”
스가랴 선지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기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온은 다윗 성을 가리키는 데 이는 승리의 상징 용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상징을 찾을 때는 언제나 다윗성인 시온 성을 찾았습니다. 시온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를 돌아다니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안식을 찾는 것처럼 시온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생각하는 마음의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당하며 시온에 있는 딸들에게 말합니다. “크게 기뻐할지어다”
여러분들이 기쁜 일도 없는데 기뻐하라고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을 맞이하게될 예루살렘 백성들을 시온의 딸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크게 기뻐하라 왜냐하면 너희의 왕이 임하시기 때문이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던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까지는 무려 약 520년의 시간차가 있습니다. 그러면 520년 후에 오실 이스라엘의 왕이 스가랴 선지자가 가리키고 있는 왕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전에도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스몬 왕조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그 유형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 순수혈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은 어쩌다 한 번 말씀하실 정도로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온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땅까지 다스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언이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겸손한 왕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써 다윗이 그러했듯이 진정한 이스라엘을 비롯한 온 셰계의 참된 왕으로써 영광받으실 분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 만이 참된 왕이요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왕을 위한 이 땅의 왕은 하늘의 왕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이 마땅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왕은 바로 그런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크게 기뻐하라 너희의 왕이 임하시는데 그가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거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너희를 구원할 너희의 왕인 줄로 알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임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렇게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온 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 예언된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실 길에 깔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예수님이 지나실 길에 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크게 기뻐하고 환영하면서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지금 구원받아야만 하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구원은 로마의 압제와 해롯의 악한 통치에서 자신들을 구원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시려고 하시는 구원은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사역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고 계십니다. 그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속전으로 드리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구원이 놀라운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만방에 흩어져 사는, 그 뿐아니라 죄악 가운데서 구원을 호소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전입니다.
그로인해 여러분들은 죄사함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님 자신의 몸은 꼼짝달싹 못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병들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다 빠져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피가 여러분들의 죄를 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들의 겸손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듯이 여러분의 겸손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겸손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겸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듯이 여러분들의 겸손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을 가진 사람들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은 이러한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은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온 천하 만물이 모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예수님은 예언된 왕이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왕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의롭게 만드신 왕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이나 대통령들은 국민들에게 등따시고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에 속한 대통령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보장을 국민들에게 약속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약속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왕이나 대통령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약속을 해놓고서 제일 잘먹고 잘사는 것이 바로 자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의 명예욕과 탐욕을 감추고 국민들에게 헛된 약속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최고로 멋지고 안전한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국민들은 그대로 믿고 그를 지지해온 것입니다. 국민들은 반복해서 속으면서도 또 반복해서 사람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면 어리석게도 반복해서 속으면서도 반복해서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아니면 다른 대안이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최고의 보장된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주실 예수님을 못믿어 합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눈에 보여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천국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지금 땅에서 누리는 안정과 풍요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런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따라나녔습니다. 성령을 받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생을 보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지금의 교인들이 보장받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배부르고 등따시게 해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할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실망해서 떠나지 않았습니까?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해주시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것들은 이미 천국에 다 준비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을 보면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수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에 말입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데 그 이유가 의를 위하여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교회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을 바로 걷기 위해서는 겸손히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로 알고 바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답게 마음을 겸손히 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겸손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제석교회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