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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월요일. - 정결한 복음 선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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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정결한 복음 선포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기의 역할은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고,
그래서 자기를 본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말과 행위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기의 역할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관심이 없어 끈적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인간적인 애착 관계는
도무지 맺지 않으려는 점인데 이것이 요즘의 저와 관련하여 반성케 합니다.
옛날의 저도 바오로 사도처럼 인간적인 관계에 애착을 두지 않는 것에
오히려 집착을 해 너무 차다는 말을 많이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를 읽은 영향이 있습니다.
첼라노는 정결에 대해 프란치스코가 든 비유를 전하는데
이 비유에서 프란치스코는 왕의 두 신하 얘기를 합니다.
먼곳에 있는 왕비에게 왕의 말을 전하는 소임을 맡고 다녀와서 보고를 하는데
첫번쩨는 그저 말을 전했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데 비해
두번째는 말을 전했다고 보고한 뒤 왕비가 아름답다는 얘기를 덧붙입니다.
이 보고를 듣고 첫 번째 신하에게는 수고했다고 임금이 칭찬하는 데 비해
두 번째 신하에겐 왕비의 미모가 네게 무슨 상관이냐며 벌을 내렸다는 내용인데
이 비유를 통해서 프란치스코가 하고자 한 말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형제들도 복음을 전할 뿐 다른 인간적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점이었지요.
그런데 정결이란 꼭 남녀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남자건 여자건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다 정결치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자신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리려고 한 바오로 사도는 정결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먼저 회개를 선포하기 마련이고,
그 회개는 세상을 향해 있던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세상으로부터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로부터도 돌아서 하느님께 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짓이고,
심하게 얘기하면 복음을 가지고 자기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람들의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정결한 복음 선포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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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제시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금방 들통 납니다. 여기에서,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고서는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나 규칙이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전제 됩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 곧 마음으로 결속된 바를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그렇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행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이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21 참조). 이미 그이 안에 거처를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당신의 어좌로 삼으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이 안에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안에’(εν)서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으로 일치를 이루어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내주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삼위의 사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시는,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요한 4,16)
그러기에, 만일 지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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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유를 주는 사랑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굳이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내적 일치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박병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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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워싱턴 주의 어느 식당 주인과 직원으로 있는 요리사가 다투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즉, 커피를 어디에다 마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요리사는 찻잔에, 식당 주인은 아무 데나 마셔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분명 별것도 아니었는데,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식당 주인은 이 요리사를 죽이겠다면서 총을 들고나와 발사했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은 안타깝게도 한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총을 식당 주인이 들고 있었으니 요리사가 죽었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식당 주인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발에 의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식당 주인의 사망 원인은 심장병이었습니다. 극도의 분노와 더불어 격렬한 움직임까지 더해져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몸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은 쉽지,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화가 날 때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리고, 가능한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 분노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할 확률이 높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셨고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시고,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또 싫어하는 것만 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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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온종일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조합이다(조셉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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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글’은 검색엔진입니다.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정보를 알려줍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운전합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를 이용해서 영상물을 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구글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글의 운영방식이 비대면 사회에 최적화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글의 경영 마인드가 ‘사용자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는 수익의 50%를 영상물을 올린 사용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사용자를, 고객을 수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만족을 넘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기업은 어려운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년 전의 일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납니다. 여행 갔다가 신발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발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사무실로 가지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서비스센터로 갔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습니다. 신발을 다 고친 다음에는 택배로 신발을 보내왔습니다. 사용자 중심의 회사였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회사였습니다. 그 신발회사의 이름은 ‘칸투칸’이었습니다. 저는 칸투칸 신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누가 신발을 산다고 하면 당연히 칸투칸을 추천했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시간은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입니다. 장례가 나면 연령회장님은 두 가지를 고려해서 미사시간을 부탁하였습니다.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화장하는 시간을 고려합니다. 선산으로 고인을 모시는 경우는 선산까지 가는 거리를 고려합니다. 보통은 오전 7시나 10시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새벽 5시에 할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장지가 멀기 때문에 유족들이 일찍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하기 위해서는 저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전례봉사자, 성가대도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양해를 해서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자 중심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분이 2,000년 전에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우리와 같이 마시고, 우리와 같이 웃고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워 들판을 거닌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객 감동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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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 안에서 정체성을 사는 길♣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오늘의 시대는 다문화, 다종교, 융복합, 정보화에 따른 다중접속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터이지만 신앙인들마저도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 곧 고유한 색깔을 찾고 보존하며 그에 따라 소신껏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신앙을 여러 선택사항 중의 하나이거나 필요시 이용하는 피난처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시대와 역사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는 15절에서 언급했던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보다 심오한 이해의 차원에로 들어간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께서 몸소 보여준 모범(발 씻어줌)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참여했던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또한 예수님도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14,21)
예수님의 계시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소유를 추구하는 세상과는 부합되지 않는다(14,22 참조). 예수님의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통교, 특히 하느님의 참모습이 나타나 보이는 한없는 사랑의 통교이다. 예수님을 알아 뵙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길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논리적 지식을 넘어선 신앙이 필요하다. 이 신앙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말씀 안에서 받아들이는 실존적인 개방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적인 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함’ 이 세 가지가 궁극적인 삶의 힘이요 방향이며 목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힘과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온갖 불의와 고통과 시련에 도전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과 깊이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관건은 그분의 말씀의 수용과 말씀에 따른 사랑의 실행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 의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면서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자유와 사랑의 공간을 열어준다(14,24 참조). 세상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인 신자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신앙의 중심과 핵심을 발견한다. 사실 신앙은 한 개인까지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로 만든다.
성령은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가 공유하도록 교회에 오신 분이다. 성령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직분과 은사는 공동선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 성령의 현존은 또한 공동체를 세상과 구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확인해 준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이들을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가르치는 교사이며,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14,26 참조).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머물며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헌신적으로 실행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영의 사람이 되고 영이 아니고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음을 명심하자. 보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으며, 관념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사랑을 실행하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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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비장한 자리에서도 아직은 미덥지 못했을 당신 제자들인데도 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잘 지키리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라고 부르신 두 분, 즉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도우심은 초대교회 현실에서 공동생활 양식과 이를 전하는 선교활동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는다거나 믿는 이들을 형제처럼 받아들이는 공동생활 양식은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능가하는 성령의 기운으로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박해자였던 바오로를 번개와 벼락으로 돌려세우셨고, 십년 넘은 숙고 끝에 예수는 메시아이시라는 부활 신앙을 확신시켜 주셨으며, 바르나바를 시켜 사도단과 안티오키아 공동체 신자들에게 신원을 보증함으로써 근신 중에 있던 사울을 사도요 선교사로 세우신 것도 모두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는 20여 년 간 로마제국에 복음을 전했으며 끝내 그의 사후 2백여 년 만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국교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 첫 번째 선교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대표적인 장면 하나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코니온에서는 박해를 받아 쫓겨나더니(사도 14,5) 리스트라에서는 앉은뱅이를 고쳐준 영웅으로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사도 14,11), 이코니온에서부터 쫓아온 유다인 박해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사도 14,19).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이 과정을 다 지켜본 티모테오가 성소를 느껴서 첫 제자로 자원한 일도 성령께서 바오로의 선교활동에 개입하신 커다란 도우심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사도 16,1-4; 2티모 3,11).
이렇듯 초대교회 시절에 부활의 사기지은으로 맹렬하게 활약하셨던 성령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모든 인류의 조상이며 특히 유다인들의 직계 선조인 노아가 의롭고 흠없이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창세 6,9). 그리고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이 고향 칼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탈출하게 하신 바 있었는데(창세 12,1), 이는 노아의 아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이 하느님께 맞서고자 세운 바벨탑이 상징하는 우상 숭배 문명을 탈출한 것이었고 성령께서 아브라함에게도 노아에게 주어진 같은 신앙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10대손인 아브라함의 족보를 따지자면 그는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으로서 특히 그 4대손인 에베르의 큰 아들 펠렉의 6대손이었는데, 에베르의 작은 아들인 욕탄은 자손들과 함께 바벨탑의 동쪽으로 가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까지 가서 살았습니다(창세 10,30). 노아의 또 다른 아들인 함의 후손들이 하느님 신앙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물들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천하장사로 교만해진 니므롯이 바벨탑을 세운 것과 비교해 보면, 셈의 후손으로서 아브라함과 욕탄이 각각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노아의 유훈대로 만방에 흩어져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파한 것은 역시 성령께서 이끄신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를 두고 창세기에서는, “에베르에게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펠렉이요 그 동생의 이름은 욕탄이다.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창세 10,25)고 기록해 놓은 이유가 바로 이 하느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는 제일 먼저 하느님께 제사를 바쳤습니다(창세 8,20). 카인의 후예들이 죄를 저질러(창세 6,5-6) 대홍수를 자초했으므로 속죄를 해야 했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시고자 자신들을 살려주신 데 대해 감사도 드려야 했으며, 대홍수가 그친 후에 하느님께서는 무지개로써 노아의 후손들을 축복하시며 번영의 계약 표징으로 삼으시겠다(창세 9,9-17)고 하셨으므로, 이때부터 노아와 그 후손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내면서 여기서 알아낸 하느님의 뜻을 살펴 살아가는 경천(敬天)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가 자리를 잡은 욕탄과 그 자손들은 이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문명을 세웠으니,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고조선 문명(신용하)입니다. 조상 노아의 예에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사람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으뜸이었으므로,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공력을 들여서 쌓은 제단이 크고 무거운 돌로 쌓은 고인돌이었습니다. 제사의 전통과 고인돌 유적은 한민족이 아브라함과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시대부터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이끄심에 충실하고자 애를 썼음을 알려주는 역사의 흔적이요, 한민족이 신성에 뿌리내린 문화를 간직하도록 성령께서 이끄신 경천 사상의 발자취인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합작으로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서 이루신 바를 기준으로 삼도록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에 현존하시고, 성령께서는 이 기준이 보편적으로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서 뿌리내리고 꽃피우며 열매 맺도록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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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신원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
제 수도영성생활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토마스 머튼입니다. 1986년 수련기때 참으로 열광했던 분이며 이때 이분에 대한 책을 가장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아마 20세기 가톨릭 교회 수도승들중 최고의 영성가일 것입니다. 1968년 임종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승인 토마스 머튼입니다. 그를 일컬어 말하곤 합니다.
“머튼은 카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성숙된, 모두에게 열려 있던 참 사람 토마스 머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참 사람이 되는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산티아고 순례후 지금까지 강론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주제는 ‘여정’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평생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자유의 여정, 섬김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귀가의 여정, 예닮의 여정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명칭들입니다.
그리하여 늘 점검해 보는 참으로 많이도 인용했던 말마디가 있습니다. 내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아침 6시 일출로 부터 시작하여 오후 6시 일몰시 까지 하루로 압축한다면, 또 일년사계一年四季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오후 4시,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 주님을 닮아 참나의 삶을 살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누구나의 내면 깊이의 근원적 소망은 이런 참삶에 대한 욕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구체적 신원은 무엇입니까?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의 평생신원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본질적 처방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선교사로서 충실히, 한결같이 살아가는데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로서의 롤모델이 오늘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오늘 14장까지 계속되는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에 대한 보도입니다. 이 두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열정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선교사로 파견된 두 분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오늘은 이코니온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선교가 소개됩니다.
선교의 대상은 무지無知한 사람들입니다. 이코니온에서 무지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괴롭히고 죽이려 했고 사도들은 이를 피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한결같이 계속되는 무지한 이들의 적대적 반응입니다. 참으로 무지가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의 고질적 질병인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는 무지한 인간 현실입니다.
오늘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의 앉은뱅이 치유후,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는 군중들의 열광적 반응이 무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두 사도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외관상 똑같은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지요!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여전히 길을 잃고 헛된 것을 추구하다 보니 괴물도, 폐인도 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돌아 가는 회개뿐이요,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충실한 것이 무지에 대한 근본처방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과의 친교를, 사랑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활동에 앞서 주님의 제자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내적 사랑의 관계가 선교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주님과의 친교에 그 답을 줍니다. 우선적으로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두차례 강조되는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을 체험토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활동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의 준수로 주님은 물론 형제들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 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계명 실천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전 고백성사차 방문한 본당 사제와 일치되 내용도 있습니다. 이제는 수도자들은 물론이요 본당 사제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수행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이 되는 분이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영적 스승이 없다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영적 스승인 보호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주시며, 주님의 훌륭한 제자요 선교사로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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