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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란 말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고 섥힌 모양새를 뜻합니다.
넝쿨 식물인 칡과 등나무는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습성을 가졌는데
칡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시계 방향으로 감아 올라갑니다.
이런 칡과 등나무에서
갈등이란 워딩이 생겨났습니다.
칡과 등나무의 갈등 관계는
용서와 용납이라는 워딩에서 복음의 딜레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용서를 동반하지만
용납은 복음의 걸림돌이 되어 쾌도난마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용납은 복음의 거친 반석이 되어
용서의 복음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죄악의 걸림돌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임하지 않습니다.
용납은 용서의 걸림돌이 되어
참 선지자의 길과 참 사도의 길을 고난과 박해로 수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공의는 선지자와 사도적 사역의 딜레마를 느끼게 하였고......
공의의 표적은 용서의 걸림돌이 된 용납의 정체성으로
마음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하고 목을 곧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멈추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행하든지 그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활 시위를 힘껏 당긴 상태와 같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용서로 멈추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요,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일꾼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의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을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로 멈추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용서와 공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대서사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
모세를 비롯하여 구약의 선지자는 잘 알 것입니다.
때로는 이름을 생명록에서 지워 달라는 사즉생의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멈추게 하였고
창끝으로 고스비 사건을 종식시켰던 비느하스는 하니님의 공의를 멈추게 하였고
평화의 언약으로 속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인구조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으나
다윗의 눈물어린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멈추고 속죄의 은총이 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바알 숭배의 용납은
공의의 심판을 자초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의 용서를 거역하였습니다.
결국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해 관계를 만들었던 용납은
죄의 옷을 입고 어둠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공의의 표적이 된 용납의 정체성은
반드시 용서 받아야 될 죄악의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거친 반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였던 용납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세기말까지 끌고가는 종말론적인 회전축이 되었습니다.
용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구원 메세지요,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메세지는 용서를 이루지 못하고 심판이 되었고
구원의 복음은 거치는 반석이 되어 종말론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용서의 걸림돌이 된 용납은 생명의 줄이 되지 못하고 사망의 줄이 되었고
복음의 문을 가로 막아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사죄의 은총을 구원의 즐거움으로 누리 지 못하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의 본질적인 문제를 용서와 용납의 갈등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칡과 등나무의 갈등처럼 용서와 용납의 갈등은
쾌도난마의 지혜로도 풀 수 없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갈등의 딜레마, 그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미로를 헤집고 다니며
용서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가를 새삼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사랑과 용서는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의 중심이며
인자와 긍휼의 뜻으로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인자와 지비와 긍휼과 인애와 은혜는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관영한 죄의 굴레를 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과 죄의 악을 갚으시는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만나면 의인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을 만나면 죄인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공생애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전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신 하신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담은 대속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으로 천하만민을 구원하는 구세주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백성의 하나님 되시고 하나님 자기 백성 삼으시는 옛 언약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로시는 사랑과 언약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좁은 문이요,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착는 이가 적고
멸망의 문은 크고 넓은 길이라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룬 자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아브라함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안약 말씀의 명령을 따라 믿음의 순종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거칠고 험한 광야의 길을 통해서 말씀의 도가니로 연단받은 온전한 순종의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은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는
언약의 복을 넉넉히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의의 열매 곧 빛의 열매를 맺은 성도 만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은
예수님의 자기 증거의 삶이요, 구속의 경륜을 이루는 사도의 발자취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거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며 그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요,
믿고 따르는 제자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과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으로 마음의 갑옷을 입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렸습니다.
사도들로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 된 바로 그 복음의 증거를 받은 교회는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구원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생의 기쁨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서 초대 교회는 복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하는 십자가는 용서받지 못한 죄와 허물을 사하시며
어둠을 밝히는 빛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는 믿음의 역사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쓷아 부으시는 빛의 나라요, 사랑의 나라요, 언약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요, 능력이며
절대 구원의 종교로 유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꼐로 돌아가는 구원의 길은
멀고도 험하기만 합니다.
멀고도 험한 구원의 여정은
오직 한 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광야의 길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고 충만하였지만
말씀의 도가니로 온전히 연단된 순종의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연단된 순결한 인생은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경건의 씨앗으로 영원히 보존됩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의 연단을 받아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욥23:10-12)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주님이 발자취를 따랐던 욥은
연단받은 후에 정금같이 빛나는 의인의 복을 받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완전한 자, 곧 의인의 구원은 환난 때의 산성이라고 노래하며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확신에 넘치는 믿음의 찬양을 하였습니다.(시37:5-6)
시편 기자는 다양한 시의 주제를 통해서 의인의 구원을 찬양하였고.....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요, 지키시며 보호하는 길이요,
생명과 영생의 길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잠언서도 하나님 앞에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이요,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며,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의인의 구원은 악인의 심판을 시사하며
의인의 길을 교훈하며 악인의 길은 경계하였습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심판과 구원의 메세지가 선포하였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았고 남은 자의 그루터기로 구원 받은 사람은
겨우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불순종의 삶으로 죄악의 낙을 누리기를 좋아하였으나
심판의 경고를 받고 구원의 길로 돌아서는 사람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고 탄식하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심판의 경고를 받은 남왕국 유다를 향햐여
회개를 촉구하는 메세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2)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4:14)
예레미야는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면서
시냇물처럼 눈물을 흘리며 탄식과 탄원으로 구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렘14:8-9)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고 하였습니다.(렘14:10-12)
예레미야는 탄식하며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며 거짓 선지자를 성토하였습니다.
예리미야의 탄식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 아내와 그 아들과 그 딸도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고 하였습니다.(렘14:14-17)
예레미야는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 뿐이었으며 죽은 자를 묻어 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 줄 자도 없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은 이런 와중에도
땅을 두루 다니며 여호와 살롬을 외치며 백성을 기만하는 거짓 묵시를 종말론적인 사명으로 퍼뜨렸습니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은 마무것도 없는 가운데
또 다시 예레미야의 기도만이 하늘을 울렸습니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렘14:19-22)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셨던 하나님은
더욱 무거운 말씀으로 하나님의 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고 하였습니다.(렘15:1-4)
범죄한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을 두고.....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죄의 악을 씻어 버리고 그 죄 사함을 받고 용서 받는 길은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섰다 할지라도 안된다고 하니......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의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리며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지는 탄식으로 기도하며 또한 회개를촉구하였습니다.
참으로 죄인이 회개하여 용서받는 길은
불가항력,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용서의 길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그 사이의 다림줄이요, 저울입니다.
하나님의 법치인 공평의 줄과 의의 줄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심판하시면......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경고하였습니다.(사28:17-18)
쉬운 용서.....???
악마의 회개 만큼이나 흔하지 않는 일입니다.
값없는 구원은 있지만
값싼 구원, 저렴한 용서는 없습니다.
용서의 무게감은
생명을 담보하고도 씻을 수 없는 중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잘 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을 두고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줄다리기는
하나님께서 벡 번 양보하고도 예레미야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거짓 선지자를 상대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 선자의 말을 더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눈의 눈물을 시냇물처럼 흘리며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지도록 기도하고 또 말씀을 전하였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용서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과 원수된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급박하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17:13-14)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렘17:16-17)
하나님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메세지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공의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렘17:18)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렘18:23)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렘20:12 )
공의의 기도로 전신갑주를 입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세지를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문과 여호와의 집에서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가는 길은 가시와 형극의 길이요,
고난과 핍박을 받는 질곡의 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 모든 모욕을 받으면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었습니다.
예레미야 20장의 말씀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가시밭길, 그 험로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20:7-13)
예레미야 선지지는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왕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 바스훌에게 멸시를 당하였으며
거짓 선지자 하나냐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참 선지자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람마다 종일토록 조롱하며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며 폭행을 하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는 길이요, 자리요, 삶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받은 고난의 상처를
고린도 교회 앞에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전4:9-13)
참 선지자와 참 사도의 길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하나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득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의 기쁨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용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용서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멸시하였던 이스라엘은
용서와 용납의 얽히고 섥힌 복잡한 이해 관계를 종말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용서를 용납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줄 용서는 사망의 줄 용납이 되어
심판과 구원의 종말론적인 줄다리기가 되었습니다.
용서의 복음을 용납하지 않는 불신은
성탄의 기쁨마저도 대중적인 타락의 온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회오리가 되어 종말로 치닫는 용서와 용납의 갈등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허와 혼돈의 태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빛의 창조, 그러나 어둠의 용납은
밤이 되고 낮이 되는 날의 창조 질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장벽은 복음의 빛이 믿음으로 빛들게 하여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용서의 큰 은혜가 구원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신탁과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구원의 메세지는
성전에 대한 이해로 용서와 용납의 간극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성전을 지극히 사랑하여 여호와의 집에 모인 수 많은 사람을 향하여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렘26:4-6)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실로의 옛 성소가 블레셋에게 파괴된 것과 같이 파괴되고 말 것이요,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신성 모독과 참람한 말로 강력한 쓰나미의 반발과 역풍을 일으켰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달려들었습니다.
절대절명의 순간 험한 일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고 하였고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먀
죽음을 불사하고 직언직설을 하였습니다.
이 날 고관들과 모든 백성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모인 즉결 인민 재판에서
예레미야는 아히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하였던 우리야 선지자는 애굽으로 도망갔으나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붙잡혀
여호야김 왕이 칼로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어 종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아버지 아하스 왕이 더럽힌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우리 조상들이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려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시고 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라고 하였습니다(대하29:4-8)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을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대하28:2-4)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을 하나님의 진노로 질타하며 멸망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나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사66:1-4)
일찌기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는 사울 왕의 말을 듣고 책망하기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삼상15:22-23)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호6:3-6)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은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때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습니다.
요아스 왕은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였다고 역대기는 기록하였습니다.
스가랴의 피흘린 죄로
요아스 왕은 반역하는 신하에게 살해 당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의 타락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심판의 경고를 하였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1:7-8)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2-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말2:2-3)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였습니다.(막11:15-18)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옛 언약의 새 언약 성취의 복음을 위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야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였습니다.(행7:46-53)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며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무엘과 히스기야와 미가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성전과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의 중심인 성전은 끝없이 타락하였고
강도의 굴혈과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참으로 멀고도 험한 세월의 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모세 언약의 중심이요, 가나안 정복의 선봉이었던 실로의 성막은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지성소의 법궤와 성막이 분리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레위기의 법이 녹아있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순종이 더 낫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 뜰에서 외쳤습니다.
히스기야 시대 미가 선지자는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집에서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더러운 떡과 병든 제물로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하게 여겼다며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말씀하시면서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시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고 외쳤습니다.
비록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지만 성전 구원의 시대는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였던 참 선지자의 거친 도전을 역사적으로 받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초대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였던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오늘날 그 흔적만 남았습니다.
한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하였던 성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막은 블레셋에게,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게, 스룹바벨 성전은 헬라에게,
헤롯 성전은 로마에게 짓밟혔습니다.
성막과 성전을 통한 레위기의 제사는 역사적인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죄를 용서하고 생명의 복을 받게 하는 구원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성전이 쇠퇴하고 사도행전의 교회가 성장하면서죄사함을 받고
영생의 구원을 얻는 은혜의 중심은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는초대 교회부터
극심한 환란과 핍박을 받으면서 흩어지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흩어져 있는 교회는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 위에 세워져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와 이방의 문화와 충돌하면서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종말론적인 신앙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막과 성전이 역사적으로 가나안의 문화와 앗수르의 문화와 바벨론의 문화와 헬라의 문화를 겪었듯이
신약의 교회는 세계 각지에 산적한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고난과 핍박으로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는 그 복음을 받은 사람이 다음 세대를 또 다시 땅 끝까지 전하면서
빛과 어둠의 공생 관계를 유지한 채 끝까지 복음의 빛을 비추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인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신앙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온전히 선포하고 전파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워져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3:16-17)
그러나 성막과 성전의 부패와 동일한 교회의 타락과 변질은
사도행전 시대 초대 교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는 고린도 교회로 종말론적인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며 바울은 질책하였습니다.(고후11:3)
고린도 교회 안의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게 하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단의 간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 세상 신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여 진리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을 용납한 고린도 교회는
참된 진리와 복음에 대한 혼란과 혼동으로 말세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다른 복음을 좇는 무리들이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복음 편지로 참된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다른 복음을 경계하며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갈1:8-10))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좋게 하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으로 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예배 설교는
다른 복음이라는 강력한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딤전1:3-7)
또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딤전6:3-5)
히브리서도 경계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였습니다.(히6:1-6)
또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히13:9)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용납하였고
버가모 교회는 발람이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하였고
사데 교회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니골라당이나 이세벨의 교훈 처럼
혼합주의를 따르는 자들은 없었으나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부인하는 사단의 회라는
유대인 회당을 경계하였습니다.
신약 시대 초대 교회는 이방 문화에 전파된 복음으로 인하여 혼합주의가 성행하였고
이것은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도로 부름 받은 나라입니다.
참된 복음으로 용서할 수 없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의 용납은
은혜의 용서에서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 혼합주의의 종말을 멸망의 심판으로 맞을 것입니다.
참된 언약의 종말론적인 신앙은 혼합주의와 끝없는 전쟁으로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게 할 것입니다.
죄악의 용납은 하나님 공의의 표적이지만하나님의 용서는
공의의 화살을 멈추게 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의 저주를 받는 다른 복음은
은혜의 용서를 용납하지 않는 거치는 반석입니다.
무엇을 용서해야 한다면 그 용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멈추는 능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 무엇을 행하든지 그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능력은 곧 구원의 실상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소통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은혜의 교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