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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6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난 내용과 야곱이 자기보다 먼저 사람들을 형에서 에게 보내는 내용입니다. 먼저 본문의 대략을 살피고 각 구절의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천사들을 보여주신 것은 그를 보호하시기 위한 약속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들을 보고 마땅히 담대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마하나임”은 “천사들의 무리들” 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천사의 무리를 보고도 에서에게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낸 것은 잘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의 할 일을 안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야곱이 에서를 “내 주” 라고 한 것은 에서를 극히 높이는 뜻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비겁한 것 같지만 이것은 다만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는(롬13:7) 합당한 태도입니다.
1. 본문 1-2절은
“①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②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입니다.
야곱은 그 장인의 마수를 벗어났습니다. 죽음의 호구를 벗어난 셈입니다. 이제 야곱은 자기 형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잔인성은 라반에 못지 않았습니다. 한층 더 두려워 할만한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에서의 위협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도 앞날이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도살장에 나가는 자처럼 떨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산 넘어 산이라 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평생 전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 안일을 원하는 자라면 그야말로 신앙 생활을 잘못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심에 사로잡혀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적시에 구조를 제공하십니다. 이 투쟁에서도 그를 준비시켜서 모든 투쟁에서 용감한 무적의 투사로 군림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키셔서 방어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기 위해서 천사들이 양쪽으로 정열하여 야곱을 출영합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 군대가 자기 사면팔방을 둘러싸서 수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천사들이 야곱의 양쪽으로 나누어 두 진영을 배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이 그 주위에 진을 친다(시34:7)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아서 성도들의 안식처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이 천사 군대에 완전히 둘러 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단순히 복수라기보다 이중의 수효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견해에 만족을 표시합니다.
이 환상의 용도는 이중적입니다.
먼저 첫째로는 야곱은 장래를 매우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미리 그에게서 공포를 제거해 주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완전 제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해서도 아니고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분의 뜻이 그러하셔서 그렇습니다. 최소한 야곱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두려움을 완화시켜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형에게서 구출될 때 과거의 은택에 대한 기억을 그의 마음에 고착시켜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의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혜택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하늘을 향해 눈을 드는 자는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사실이 야곱의 눈 앞에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나는 일은 필요하였습니다.
① 이것은 그가 훌륭한 극장에서 구경하듯이, 자기가 얼마 전에 라반의 수중에서 우연히 구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② 또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기를 위해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그래서 그는 천사들이 그의 형 에서의 공격에 대항해서 그를 기꺼이 도와 줄 것이라는 것도 확실히 희망할 수 있을 터였습니다.
④ 마침내 위험이 극복될 때에는 그가 천사들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보호를 차곡차곡 기억할 수 있을 터였습니다.
이 교훈은 우리 모두에게 유용한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명시적(明示的) 은총 속에서 그분께서 보이시지 않는 가운데 임하시는 불가시적 임재를 주목하도록 배웁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에게는 투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에게 주로 필요했던 것은 그 투쟁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 지급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 에서가 더 나아졌는지 아니면 더 악해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살벌한 형이 적대적인 것밖에 궁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에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나타나는 것은 꼭 필요하였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 필요하였습니다. 동시에 지금, 그리고 이후에도 그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서도 필요하였습니다. 이 천사들의 수효 또한 그에게 적지 않은 격려가 됩니다. 단 한 천사만으로도 우리 수호자로서는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후하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가 단 한 천사의 수호만 받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악하게도 하나님의 친절을 낮게 평가하는 자들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마는 이런 교활한 술책으로 우리 믿음을 다소 감소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모세는 야곱이 영원한 기억의 표시로 그 땅 이름을 갈르엣(마하나임) 이라 했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감사하는 마음을 주목합니다. 천사의 무리를 동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야곱은 감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2. 본문 3절은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입니다.
에서는 제 마음대로 자기 아버지를 떠나 세일 산으로 갔고 약속의 땅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된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그 땅 소유권은 형제 간 살육이 없이도 야곱 자손을 위해 임자없이 남아 있었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버지 이삭의 명령에 의해 이주를 강요받았거나 자기 동생보다 열등한 자로 치부되기를 자원하여서 자기 주거 장소를 변경했다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에서가 크게 부유해졌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아비 집을 떠나게 만들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속된 사람들이 현재 이익을 너무 과도하게 열망하는 나머지 어떤 일이 자기들 욕망과 부합할 듯 싶을 때는 짐승처럼 참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리로 달려간다는 것을 압니다. 에서는 거만하고 흉포했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 리브가에게 격분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께 대한 모든 존경심을 떨쳐 버렸습니다. 그 자신이 양 부모께 미움을 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들은 끊임없는 분쟁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도 이제는 노령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정에서 자식 신분으로 있다는 것이 어렵고 성가신 일로 느껴졌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 한 자신을 자유로운 자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자기 생활을 다른 사람의 권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생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런 매력에 이끌려서 약속된 기업을 무시하고 그 자리를 동생에게 양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선지자께서 에서가 세일 산으로 인도된 것이 추방이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말1:3). 그는 비록 자의로 그곳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의해 자기가 간절히 소원했던 땅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적 욕망 곧 지배욕에 현혹된 나머지 선택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세일 산은 산지가 많고 평탄치 못하여 비옥하지도 안락하지도 못한 땅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 땅에 자기 이름을 붙임으로써 위대한 자로 나타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그 지방을 에돔 땅이라고 부른 것은 예변적 표현법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곳이 나중에 그렇게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자기 형 에서가 세일 산 지역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가 자기 어머니의 통보를 받아 자기 형의 이주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리브가에게는 아주 많은 종들이 있었고 그 중에 충실한 사자 하나가 알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형의 새로운 거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의 말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런 종류의 일들을 많이 생략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저절로 신자의 마음에 떠오릅니다.
3. 본문 4절은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입니다.
모세는 여기에서 자기 형을 달래기 위하여 야곱이 고심했던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매달리는듯 한 탄원은 가혹하고도 큰 심적 고통에 의해서만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자기 생명을 걸고 쟁취했던 주권을 자기 형에게 양보하는 것은 부당한 굴종인 듯합니다. 에서가 장자 신분을 누린다면 야곱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예비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만일 그가 자기 형에게 대한 복종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미움을 받고 그런 위험을 겪다가 급기야는 이십 년 동안이나 추방을 당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야곱이 현세적 주권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은밀한 축복에 대한 권리는 하나도 양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적 약속의 효력이 여전하게 보류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장래 기업에 대한 소망에 만족하고자 당장에는 서슴지 않고 자기 형을 자기보다 더 존귀하게 만들며 스스로 형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의 이 말에는 어떤 가식도 없었습니다. 혈과 육의 경쟁 방식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이는 그가 아직까지 은폐된 자기 장래 권리를 상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을 자기 어깨 위에 기꺼이 떠메려고 합니다.
4. 본문 5절은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입니다.
야곱이 자기 재산을 공개하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방법으로 에서를 인정에 기울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리적 경쟁 방식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먼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부자가 된 자를 인정도 없이 쫓아 보낸다는 것은 심히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야곱은 장래 경쟁 가능성도 차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야곱이 빈손으로 굶주린 채 왔더라면 에서는 자기에게 부과될 비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새삼스럽게 분노를 품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축내려고 오지도 않았으며 자기 형의 파멸 위에 부를 구축하러 오지도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야곱은 마치 ‘내가 형의 땅의 기업을 안전하게 하리라 내가 형의 권리는 침해하지 않으리라 다만 나로 살게만 해 달라’ 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악인과 화해할 때 어떤 식으로 해야 좋을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대적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우리가 자기 권리를 방어하는데 대해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잘못으로 분쟁을 야기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 권리에서 한 걸음을 물러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어 나갈 때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접근부터 해야 합니다.
5. 본문 6절은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 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입니다.
지금 에서는 하나님이 넣어두신 자애로운 감정을 품고 자기 동생 야곱을 맞으러 나아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형의 무자비한 잔인성과 쉽게 흥분된 성미와 저돌적이고 조직적인 야만적인 협박을 기억하고 그에게서 인정미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비록 실질적인 까닭은 없지만 그의 열렬한 기도를 더 많이 불러일으키시기 위해서 자기 종 야곱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이런 불안으로 압박하려고 의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안일이 냉담을 낳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사실은 두렵지 않은 일들을 두렵게 만드십니다. 또 그런 상태에 상당 기간 두고 보십니다. 그것은 우리신앙이 무자극에 의해 무디어지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소원을 예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 재앙은 반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을 훈련시키시기까지는 자기 치료책을 감추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 육신의 연약성이 나타나지 않을 만큼 확고 불변한 항구성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면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신앙의 진정한 본질을 체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은 위험에 대한 우리 감각을 제거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안이 우리를 이기고 사로잡아 절망으로 다가오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더욱이 우리 신앙은 바람직한 방법으로 악한 의심과 죄스러운 불안을 항상 축출할 만큼 확고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어느 모양으로,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게끔 그분의 은혜를 배분하시고 배려하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2)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야곱의 신앙생활을 보게 됩니다.
참 신앙은 우리를 돈키호테 방식의 생활로 내몰아가지 않습니다. 또 절망과 굴종으로 몰아가지도 않습니다. 바른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바라며 은총의 빛 아래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50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