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3026
돼지 눈 부처 눈
동봉
비가 개고 화창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사 무학無學을
새 수도 궐내로 초빙했습니다
둘은 대전 뜰에 앉았습니다
녹음방초가 우거진 삼각산 아래
맑은 냇물이 서출동류西出東流로
잉어처럼 꿈틀거리며 흐르고
멀리 남산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희고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더없이 평화로운 날이었지요
국왕 태조가 반갑게 입을 열었습니다
"왕사王師님 날씨가 상큼하지요?"
왕사가 나이로는 8살이 위였지만
상대는 곧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무학이 예를 갖추었습니다
"네, 그러하옵니다 전하!"
"무학 왕사님 어떠하십니까?
이 좋은 날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서로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실까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때 왕사가 태조에게 물었습니다
"전하, 감히 여쭐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왕사님"
"혹 <밀린다왕문경>을 아십니까?"
태조가 웃으며 말을 받았습니다
"네 왕사님,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짐이 알기로 나선 비구와 밀린다왕이
마음을 털어놓고 진리를 주고받은
참으로 좋은 경이라 들었습니다
그 점을 걱정하셨군요 왕사님!
짐이 오늘은 한마음 내려놓겠습니다"
태조가 왕사를 옆으로 불렀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앉는 게 아니라
옆으로 궁뜰에 나란히 앉아
마음을 내려놓으려 한 것입니다
대신들이 약간 멀리서 공수拱手한 채
두 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태조가 바로 말을 잇습니다
"왕사께서 먼저 말씀하십시오."
왕사가 예를 갖추며 답했습니다.
"밀린다왕이시니 먼저 설하소서 전하"
침묵이 흐르고 태조가 입을 열었습니다
"짐이 보기에 우리 무학 왕사께서는
영락없는 돼지 모습이십니다!"
그러면서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주위에 시위해 있던 수많은 관료들이
따라서 웃음바다를 이루었지요
허허허
하하하
키드득키드득!
태조가 왕사에게 청했습니다
"이제 왕사께서 말씀할 차례입니다"
그러자 무학 왕사가 답했습니다
"신이 전하의 용안을 뵈옵건대
다시없는 부처님이십니다."
주위의 웃음은 일시에 가라앉았고
태조도 왕사도 말이 없습니다
앞서 태조가 본 답에서는
그다지 좋은 답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주위가 얼어붙은 것입니다
잠시 후 태조가 물었습니다
"왕사님, 나는 앞서 왕사님에게
모습이 마치 돼지 같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왕사께서는 그러한 짐에게
다시없는 부처님이라 하셨는지
혹 짐을 놀리는 것은 아니시지요?"
왕사가 다시 예를 갖추어 말했습니다
"전하, 빈도는 곧 나선 비구이옵고
전하께서는 밀린다왕이십니다."
그러자 좌중을 둘러본 뒤
태조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답이 나오는지
왕사께서는 편히 말씀하십시오
짐이 바로 그 밀린다왕이 아닙니까."
이 말은 어떤 답도 수용하겠다는
매우 깊은 고사故事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그때 왕사가 답을 했습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보살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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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왕문경(1997) 민족사/동봉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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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2023
곤지암 우리절 선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