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시 신니면 동락초등학교 교문 옆의 <김재옥여교사 현충탑>.
그녀는 교사가 된지 겨우 5일만에 6. 25 동란을 맞았다.
학교를 지키고 있던 이 햇내기 여교사는 4km를 달려가 국군에게 적의 동태를 제보해 대승을 걷우게 했다.
국방부는 이 여교사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전쟁과 여교사>를 제작했다.
각계에서는 현충탑, 기념관을 세워 그녀를 추모하고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어이없는 죽음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애통한 마음 금할 수 없게 한다.
온 세상을 경악케 했던 1963년 고재봉의 국군장교일가 도끼살해 때에 희생된 가족중 하나라니.
더구나 아무 원한도 없는데 단지 범인의 오인으로 참변을 당했다니 더욱 애석한 일이다.
여교사이며 전방의 국군 장교 가족인 그녀의 삶은 참으로 헌신적이었다고 지인들은 추모하고 있단다.
당시, 육군 일등병 고재봉은 도둑과 살해 위협죄로 7개월을 육군형무소에서 복역한다.
그는 자기를 私兵처럼 부려먹고 끝내는 죄인으로 만든 박某중령에 원한을 품고 그 일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에 박중령은 타부대로 전속되고 후임으로 김교사의 남편 이득주 중령이 부임한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고재봉은 출소한 날 야음을 틈타 박중령의 사택에 침입하여 6명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런데 그에게 살해당한 가족은 박중령 일가족이 아니라 이중령, 김교사 부부와 자녀들이다.
그리고 고재봉을 전대미문의 살인마로 만든 죄목인 도둑은 박중령의 가정부라는 사실이 훗날 밝혀진다.
도둑 누명을 씌운 진짜 도둑 가정부, 사려 깊지 못한 상관 박중령, 군법회의의 오판중 하나만 없었다면?
그랬으면 고재봉이 희대의 살인마가 되지 않았겠지.
당연히 미증유의 살인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무렵에 군(軍)의 인사이동만 없었더라도 김재옥 교사 가족의 참변 또한 없었을 것이다.
부질없는 가정(假定)이다.
다만, 근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일인데도 늙은 나그네의 걸음이 천근이며 가슴을 저미는 듯 아파왔다.
용안역(用安驛)이 있던 용원리(龍院)
용원리는 옛 역과 원이 있던 곳일 뿐 아니라 지금도 면사무소를 비롯해 각급 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신니면의 중심지다.
초등학교 교정에 떨어지는 낙엽 쓸어모느라 여념없는 수위영감.
그의 빗자루를 통해 바야흐로 다가오는 가을이 보인다 할까.
집 나설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부터는 가을과 더불어 남행을 하게 되는가.
일제의 강제합방에 항거하고 독립을 외친 함성의 자취들이 우리 나라 방방곡곡 어디엔들 없는가.
지극히 당연하거니와 여기 신니 용원의 독립만세운동 또한 작은 면단위로는 그 기세가 괄목할만 했나 보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있는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와 용원 표석의 증언이다.
709m 가엽산(迦葉)의 높은 기상과 정기를 받아서 란다.
아마, 그래서 신니면민들은 가엽산을 사랑하나 보다.
충주시 단월동 충민공 임경업장군의 충렬사와 충렬서원
임경업(林慶業 1594 ~ 1646)은 비운의 장수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에 출전하여 진무원종(振武原從)
1등 공신(功臣)이 되었으나 줄을 잘못 섰다 할까.
그의 지나친 숭명(崇明)사상이 청(淸)의 득세 앞에서 비극을 맞았으니까.
충렬사 입구 골목의 충렬서원 재실이 이른 아침부터 바쁜 것으로 보아 오늘 제사가 있나.
한가로운 여정이라면 어정버정 머물다 한 상 받 수도 있겠다.
주전들 ~ 유주막 일대의 도로.
변하고 변해 3번국도가 되었으나 신3번국도의 등장으로
옛길로 전락하고 말았다.
충주시 살미면 3번국도상에 서있는 통일기원시비
삼장법사 일붕 서경보의 정력은 과연 출중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는 곳마다 통일기원시비다.
세계 평화 남북 통일 시비가 758개소나 된다니까.
취득한 박사학위가 126개로 "세계 최다 박사학위, 세계 최다 저서, 세계 최다 통일기원 시비 건립,
세계 최다 선필휘호" 등이 기네스북에 올라 있단다.
세계불교 법왕청을 설립하고(1992년) 초대 법왕이 되었으나 겨우 4년 후에(1996년) 세상을 떴다(涅槃)
충주시 살미면(乷味) 복지관 앞마당이 부산했다.
남자들은 차일치느라, 여인들은 음식 만드느라 모두 분주했다.
마지 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너나 없이 신바람난 움직임이었다.
일심 동체로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이 보기에도 좋았다.
얼핏 보아도 큰 잔치를 준비하는 중인 듯 했다.
나부끼는 현수막에 의하면 내일 면주최 경로잔치를 벌인다.
내 일정이 하루만 지연되었더라면 한 상 잘 받을 뻔 했다.
한가한 시골길을 쓸고 가는 낙엽이 늙은 길손으로 하여금 가을을 타게 하는가.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Remy de Gourmont) 시 <낙엽>을 중얼거려 보며 바람타고 달아나는 그 놈들을 밟아갔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연의 오묘한 섭리는 참으로 신비스럽다.
낙엽은 단지 그 신비스런 섭리에 의한 대사물(代謝物)일 뿐이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긴 여름 혹독하게 부려먹고는 월동 식량의 낭비를 막기 위해 비정하게
잘려나간 몸의 일부다.
그래서 구르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라 했다.
여기까지 오기 직전의 형태가 단풍이다.
동물의 마지막 음성이 처량한 것 처럼 입새들의 최후의 몸부림은 붉디 붉은 단풍으로 표현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왜 저 놈에 의해 일희 일비할까.
자기 잔명을 걸고 씨름한다(O. Henry의 마지막 잎새)
단풍이 몰고 다니는 돈 끌어모으느라 정신 없게 바쁘다.
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애타게 불러대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닌 한 늙은 이는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설운2리 점말, '범죄없는마을'의 4백여살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런 쓰잘 데 없는 상념으로 무료를 달래고 있다.
죄도, 죄인도 없는 마을이라 그런가 마음도 천하태평으로.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신 벗고, 양말도 벗고, 배낭 깔고 벌렁 누웠다.
두 발, 두 다리 좀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였다.
이 놈들이야 말로 주인 잘못 만나 불쌍토록 고생 많이 하고 있다.
양 어깨도 비슷한 운명이라 하겠으나 종종 편할 때도 있건만, 온 종일 양말과 신발에 옥죄인 채
중노동을 해야 한다.
척추 문제가 심각함에도 이처럼 나그네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소곳이 협조적인 덕이다.
그래서 산야와 길 불문하고 그들에게만은 기회가 날 때마다 아주 특별한 배려를 한다.
온갖 신소재 제품을 다 거부해도 신발만은 예외로 하는 것.
발이 편하도록 넉넉해야 하는 것.
걸으면서도 간단 없이 발가락 운동을 해주는 것.
걷는 시간 외에는 양말, 신발 등 온갖 속박으로부터 즉각 해방을 주는 것 등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서
속죄(?)한다 할까.
수안보면 수회마을 자랑비와 상모양조장
예전에는 상모면이었다.
구 도로변 상모양조장의 술익는 내음이 길손의 걸음을 멎게 했다.
이번엔 해남 옥천양조장에서의 미련짓을 반복하지 않았다. (옛길 삼남대로 단상 3,4번 참조)
내 기척의 뜻을 단정한 중년녀가 금방 알아차렸나.
나같은 걸객(?)을 위해 준비해 놓은 후한 인심의 술독인가.
독 안의 막걸리를 큰 사발로 거푸 퍼마시도록 했으니까.
술의 효험은 역시 공복상태라야 제대로 발휘되는가.
짜릿한 기분에 수안보(水安堡)가 단숨 거리였다
수안보온천의 溫泉閣
수안보온천은 우리나라 유일의 지자체(충주시)가 직영 관리하는 중앙공급식 온천이다.
자연 용출이 3만여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53도c의 온천수는 각종 무기물이 함유되어 인체에
매우 유익하다는 단순 유황 라듐천이다.
피부, 위장, 부인병 등에 치료 효과가 있고 불소의 함유로 충치의 예방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데다
숙박, 교통이 편리하여 한 때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관정(灌井),착정(鑿井)장비와 기술의 혁명적 발달은 온천 개발을 용이하게 했다.
종래에는 자연 용출수와 溫, 井, 釜 등 개연성 있는 옛지명을 중심으로 개발했으나 지금은 고성능 장비가
온수의 용출을 책임진다.
아마 지구의 저편까지라도 파내려갈 것이다.
그래서 도농산간(都農山間) 불문, 우후 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충주시 지역만 해도 앙성, 문강 등 세 곳이나 된다.
결국, 공급 과잉으로 인해 경쟁이 불가피해졌으며 노후 시설들은 이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수안보온천도 그래서 자구책 강구에 나섰나 보다.
물탕공원과 수안보온천제에 이어 종합스포츠파크 조성 등.
문강원탕사우나
"For whom the bell rings, not for you but for your company"
세야노부유끼(瀨谷信之:일본)가 쓴 책 <電話의 話術> 부제다.
비즈니스에서 전화 응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표어가 돌고개 넘어 찾아간 '문강원탕사우나'에서 문뜩 생각났다.
위치 확인하려고 건 통화에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으나 딴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묻고 물으며 3km나 걸어서
간 것이지만 막상 면대해서는 후회막급했다.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며 유객해도 날림 시설과 지리적 핸디킵의 극복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찾아든 고객에게도 지극히 사무적이며 친절한 언행이라곤 찾아볼 수 없거늘 전화의 경우야
불문가지 아닌가.
몰려드는 사람들로 복잡해서 부득이 그리 되는 것이 아니고 측은지심이 들 만큼 한적한데도 사람이 귀찮다는 뜻인가.
화상통화의 대중화로 서로 표정을 보게 된다 해도 음성을 통한 교감에 여전히 좌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전화의 한계다.
그래서 개인이나 사업을 망라한 인간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테그닉(technic)이 바로 '전화의 화술'이라는데.
망하기로 작심을 했나.
정히 망하고 싶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알아본 바로는 현재 성업중인 '문강유황온천호텔'보다 훨씬 전에 개발하던 중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가 우여
곡절 끝에 근래에 오픈했다는데 쓰라린 전철을 다시 밟으려 하는가.
그나저나, 나홀로 온 탕을 독점했기에 마음 편히 밀린 세탁을 할 수 있어 좋긴 했으나 오지랖이 너무 넓은가.
어느 詐術에 걸려 거금을 끌어넣고 헛 스윙(swing)을 하고 있는 듯한 새 주인들(人戚間?)을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조 14대 선조 때의 일이다.
이류면 팔봉으로 낙향한 월봉 유길영의 궁핍한 처지가 영의정인 아우 유경영은 늘 맘에 걸렸다.
그래서 약간의 식량과 필목 등을 실어 보냈다.
그러나 월봉은 그 짐들을 그대로 되가져가도록 명했다.
월봉의 청렴, 강직한 성품을 아는 관리들은 딴 방도가 없으므로 애써 넘었던 문강리 산의 이 고개를 도로 넘어야 했다.
"이 무거운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도로 넘어야 하다니" 하면서.
푸념을 들은 나무꾼들에 의해 '도로고개'가 되었고 언제부턴가 '돌고개'로 줄여졌다는 것.
아우가 주는 것들이니까 받아쓸 법 한데도 무위 칩거하는 몸으로 국록을 축낼 수 없다는 형이다.
비록 만인지상의 영상일지라도 녹봉을 사사로이 써서는 안된다며 거절한 유길영이다.
구실이야 어떠하던 주는 족족 덥석덥석 받아먹거나(受賂) 자리를 기화로 닥치는 대로 먹다(致富) 체하는(綻露)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고생은(獄苦) 물론 패가망신 당하기 일쑤인 세상에 이같은 '돌고개'야 말로 다다익선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