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처럼
그 아이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작년 여름이었다.
아이는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아 몇 년 헤매던 끝에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업에 소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간신히 버티다가 일 년도 못 넘기
고 그만두었다. 그 사이, 한 살 아래인 동생은 대학 졸업 전에 자기 모교의 홍보실 직원
으로 채용되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외가 쪽 사촌들도 하나같이 다 번듯하게 잘 풀렸다.
아이 엄마는 아들의 백수 생활이 길어질까 봐 애가 닳았다. 결국, 아이는 짐 싸들고 상경
하여 노량진역 근처에다 방을 얻고 학원에 다니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그날은 아이
아버지 생일이었는데 마침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왕 가는 김에 아들과 저녁이나
먹으려고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았다. 아이 동생에게 찾아가 보라고 했다. 번호로
문은 열었지만 안쪽에 걸쇠가 걸려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요란하게 코고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암만 불러도 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형이 며칠 동
안 밤을 새우고 깊이 잠든 모양이라는 전화를 받고, 아이 엄마는 어서 경찰에 신고하라고
소리 질렀다. 엄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경찰관 입회하에 119를 불러 문을 뜯고 들
어가 보니, 술병과 약병이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는 방 안에 역한 가스냄새가 진동했다.
타다 남은 번개탄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급히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온몸이 불
덩어리인데다 의식이 전혀 없었다. 가까운 가족들만 알고 동동거리던 이 소식을 나는 카카
오 톡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건강하던 아이가 의식불명이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는 말에 놀랐고, 취업 스트레스와 열등감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너무 참담하고 기가 막혔다.
하필 제 아버지 생일날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엔 배신감 마저 들고 화가 났다. 가족들이 여
전히 쉬쉬하는 터라 병문안은커녕 알고 있다는 내색조차 못하고, 나 혼자 불에 덴 사람처럼
며칠을 푸덕거렸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햇살이 유난히 환하다. 그런데,
지하 주차장 입구에 있는 바위 주변에 초록색 이파리가 뾰족히 올라오고 있었다. 얼른가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들여다봤다. 우와, 수선화다.작년 봄이었다. 내가 수선화를
좋아한다고 하자 거제도에 사는 후배가 마당에서 캔 수선화 뿌리를 한 박스 보내 주었다.
덕분에 우리 베란다는 함초롬하고 조신해 보이는 황금빛 수선화로 가득찼다. 정말 환상적
으로 피던 그 꽃이 가버리자 잎줄기가 힘없이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손을 넣어 만져보니
뿌리도 물컹했다. 우리 집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양지 바른 바위 옆에 자리를 보아 두고,
삽을 빌려다가 겁도 없이 잔디밭을 팠다. 축축 처진 잎줄기를 잘 추슬러 세워 나란히 심어
주며, 정성껏 흙을 도닥여 줬다. 하지만 수선화는 얼마 가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죽은 줄 알고 못내 서운했다. 그런데, 살아 있었던 거야? 나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려
그 뾰족한 이파리 끝에 입 맞추었다. 키는 작지만 작년에 내다심을 때보다 색도 진하고 꼿
꼿하다. 이건 그냥 수선화가 아니다. 아이는 그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중환자실은 두
달 이상 장기 입원할 수가 없어서, 의식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두 달에 한번 씩 옮겨 다녔다.
아이 엄마는 모든 일상을 다 팽개치고 오직 아들의 간병에만 매달렸다. 다 큰 아들의 기저
귀를 갈아 채우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뒤척이고 주물러주며, 제 힘으로 숨 쉬고 먹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아이 귀에 대고 끊임없이 이야기도 해 주었다.혼신의 힘을 다했다.
제 손으로 제 목숨 끊으려 한 사실은 다 잊고, 이렇게라도 생명을 부지하고 버텨 준 것에
감사했다. 장남에게 걸었던 각별한 기대와 부질없는 욕심도 다 내려놓고, 더 이상 아이의
일을 쉬쉬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서히 기적이 일어났다. 회생할 가망이 없다던 아이가 깨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사람을 알아보고, 튜브 대신 입으로 음식을 먹었다. 어눌하게
나마 말도 하게 되었다. 엄마의 지극정성 덕분에 아이는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올
라오게 되었다.재활 전문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치료하면 다시 걷을 거라고 엄마는 확신했다.
여태 기저귀를 못 떼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반드시 스물아홉 살 청년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 굳게 믿고, 1년 가까이 새우잠 자며 아들 곁을 지켰다. 아이 엄마는 애써 밝게 웃으며
희망을 말했지만 그럴수록 더 안쓰럽고 짠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사실, 생명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 지레 겁먹거나 너무 앞당겨서 걱정하는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번번이 헛심을 쓰느라 욕본다. 이 수선화처럼
그냥 묻어두고 기다리면 될것인데 말이다. 피식 웃음이 난다. 그래, 오지랖 그만떨고 앞가
림이나 잘하자. 햇살이 따스하다. 동네 사람들, 머잖아 황금빛 수선화 꽃 구경하게 생겼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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