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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출20장13-17;마 5장21-22)
성경본문: 출애굽기20:13-17; 마태복음 5:21-22
출애굽기20:13-17;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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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1-22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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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제6계명이 심각하게 무시받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가장 떠들썩했던 살인 사건은 10대 여학생 둘이 공모해서 인천의 초등학교 어린이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인터넷으로 살인에 관한 연극 대사(인터넷 컴뮤니티 역할극)를 주고 받다가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김양이 살인범인데 박양이 신체의 일부를 원한다고 하면서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맡았던 나창수 검사는 “어린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태도 등에 비춰 죄질이 불량하다” 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범죄가 잔혹하고 생명 경시 태도가 드러나며, 반성하는지에 대해 의문이다.”라고 하며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인보다 잔인한 청소년 범죄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드라마, 영화, 소설, 신문에서 살인, 살해, 폭력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까?
아마 거의 매일 같이 이와 같이 안 좋은 소식들을 보고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근대 역사 속에, 무수한 살인, 살상의 역사가 뒤섞여 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유태인 600만명이 학살당했고, 스탈린에 의해 구소련에서 1000만명이 학살당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중국에서의 문화 혁명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캄보디아에서는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르완다, 수단, 동유럽 보스니아와 같은 곳에서도 인종 학살이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임당했고, 미얀마의 로힝야 족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제6계명의 특징 중에 하나는 가장 짧은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두 단어로 이뤄졌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짧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복잡하고 광범위한 계명이기 때문에 오히려 짧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21장 이후에 이 계명에 대해 자세하게 보충하고 있습니다. 일반 형법에서 가장 민감하고 심각하게 다루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계명에 대해 생각할 때,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계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할 계명이고, 제8계명(도둑질)이나 제9계명(거짓말)은 자칫 잘못하면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살인은 흉악범들이나 저지르는 것이지, 나와 같은 선량한 사람과는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도 불편하게 느끼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깨닫게 되겠지만, 이 계명은 꼭 칼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 계명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내는 것도 살인에 해당한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생명 경시 태도를 갖는 것도 이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살인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다 괴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도 어떤 상황에 처하면 살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인물 중에, 모세, 다윗, 사도 바울도 살인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우발적이었던, 의도적이었던, 합법적이었든 이들도 사람을 죽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할 때 살인이란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이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있습니다.
자살, 낙태, 안락사 문제도 다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지어 환경 오염, 불량 식품, 마약, 음주 운전 등과 같은 것들을 통해 간접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왜 살인하면 안되는가?”입니다.
우리는 “양심상, 또한 무서운 법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도 살인은 절대로 해서 안되다”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은 특별한 존재요, 그러므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인 정도가 아니라 더 나가서 살생하면 안된다. 살아 있는 생명은 그 어떤 것도 죽여서는 안되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동식물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동일하게 보지는 않습니다.
모든 생명이 귀한 것은 맞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존귀하기 때문에 십계명에서는 살생이 아닌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 “You shall not murder”로 되어 있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인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먹거리로써, 채소뿐 아니라 동물들도 잡아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고기를 먹을 때, 피째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피 속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9:3-4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살생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식물을 마구 죽여서는 안되지만 먹거리로 주셨기 때문에 동물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죽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가?
성경에서는 몇 가지 예외 조항이 있긴 있습니다.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당 방위도 인정될 수 있습니다. 심각한 죄에 대한 처벌로서 사형이 인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죽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살인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해도 결코 작은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발적 살인은 또 다른 보복을 받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도피성 제도를 두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세 곳씩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해서, 우발적 살인을 했을 경우에는 속히 도피성에 피해서 보복자로부터 보호를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살인을 하게 되는가? 어떻게 살인까지 가게 되는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최초의 살인 사건인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통해서 보면, 분노가 가장 중요한 살인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왜 이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는가?
가인이 지독한 살인자라는 것을 전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분노를 다스리지 않으면 가인처럼 될 수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곡식으로써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가축 중에서 양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을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마음과 태도를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였으며,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길, “네가 어째서 화를 내느냐? 네가 무엇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느냐?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내가 왜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현대인의 성경, 창4:6-7)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마음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가서 돌로 쳐 죽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복합적입니다. 살인죄도 처음 시작은 마음 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 다윗의 살인 사건 :
다윗은 충신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가장 맹렬한 전쟁터로 보내 죽였는데 처음부터 우리아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어느날 오후에 목욕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목격하면서 육체적 욕심을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간음하고 나중엔 그 죄를 덮기 위해 간접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선 제10계명인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어겼고, 우리아를 전쟁의 맹렬한 싸움터로 보내 죽게함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도 범하였습니다.
죄는 복합적이라서 하나를 저지르기 시작하면 또 다른 죄를 계속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렇게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삼하11장)
아합의 살인 사건 :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아합왕과 이세벨의 살인 사건도 몇 개의 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시작은 아합왕의 욕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궁 곁에 위치한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달라, 또는 팔라고 하였지만 나봇이 하나님이 자기 가문에게 주신 기업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합이 이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악녀 이세벨이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나봇을 고발하게 하고,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남편 아합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 살인 사건도 복합적이었습니다.
욕심에서 비롯되었고, 거짓 증인을 세웠으니, 제10계명과 제9계명을 범한 것이요, 사람을 죽이고 남의 밭을 빼앗았으니, 제6계명, 제8계명도 동시에 범하였습니다.
이렇게 죄는 복합적입니다.
하나를 저지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죄를 동시에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고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역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 수훈에서 살인을 마음의 분노와 열결짓고 계십니다.
마음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살인까지 가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님은 그것도 살인의 일종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형제에게 분노하고, ‘라가’ 또는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른 것과 같은 큰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라가- 의역하면 ‘너 같은 놈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부탁이다. 나가 죽어.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이런 말들은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폭발, 인격에 모독을 가하는 욕들은 아직 살인이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이 심각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분노를 어뗳게 다스려야 할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분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 보면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을 보시며 분개하셨습니다.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돈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거룩한 분노를 품기 보다는 인간관계에서 품지말아야 할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분노하는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J. John, 십계명, p. 124-125)
(1) 분노광 : 지뢰밭과 같고 압력밥솥과 같습니다. 어제 터질지 모릅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2) 벙어리 : 무조건 참습니다. 속으로 삭힙니다. 옛날의 한국의 며느리들이 그랬습니다.
(3) 순교자 :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자책하는 것입니다.
(4) 조종자 (침묵의 암살자) : 분노를 숨깁니다. 그랬다가 복수로 분노를 표출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에게 욕보인 배다른 형 암논을 죽이기 위해 몇 년간 분노를 숨겼다가 마침내 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중엔 아버지까지 대항해서 반역하였습니다.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네다섯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로 분노를 표출하지 말고 시간을 가지십시오.
칭찬의 말이나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고 바로바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가 담긴 말이나 글을 전하려 할 때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신중하게 하십시오.
링컨은 누군가에 화가 났을 때, 편지를 쓰지만, 얼마 후에 그 편지를 보내지 않고, 불에 태워 없앴다고 합니다.
그러고 침착해진 마음으로 다시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메일이나 멧세지, 카톡과 같이 즉각적으로 답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정적 감정이 실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건강한 자존감과 겸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가인이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동생 아벨이 더 인정받았을 때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겸손함이 있었다면 동생을 미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에 대한 시기심이나 미운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다음 번에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시기심과 미움이 언제 생깁니까?
자존감이 낮을 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인정받고 잘 될 때,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건강한 자존감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늘 불안하였습니다.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시기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용서하십시오. 먼저 용서하십시오. 분노를 축복으로 바꾸십시오.
성경에는 분을 품더라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용서해주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엡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화해가 예배보다 더 우선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용서와 화해가 우선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기도도 막히고, 예배도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해주지 않으면서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1서4:20)
용서가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요셉을 보세요.
셋째로, 우리에겐 원수 갚을 권한이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할 권리는 있지만 설사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직접 보복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공의로운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시며, 원수 갚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12: 17-19절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선한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직접 원수 갚으려고 해서는 안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처럼 공의롭지 못가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공정하지 않으면 큰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남을 심판하거나 보복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 무엇이었을까?
사울은 교만하고, 시기심으로 가득차고, 다윗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친히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사울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맞았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부하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하며 죽이려하는 것까지 말렸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원수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분노를 극복하고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기심, 미움, 분노를 버리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충동적이었던 베드로도 변했고, 우뢰의 아들이었던 요한도 사랑의 사도로 변했고,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은 온유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복음8:44절에 의하면, 살인이나 거짓은 악한 마귀의 역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10:10절에서도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악한 마귀는 사람들이 미움에 사로잡히고, 살인을 저지드도록 부추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 문화 속에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면이 만연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6계명을 잘 지키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는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마귀를 대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과 분노, 음란한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도시가 굉장히 폭력적이라면 그 도시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 하면서 악한 세력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도시 폭력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는 작년에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인데, 얼마나 도시 폭력이 심한가?
올해만도 지금까지 살해된 경찰관만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겠습니까?
한국은 자살 문제가 심각하고, 미국은 총기에 의한 살인 사건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제6계명을 따라 ‘소극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채움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저수지와 같습니다. 스스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체험할 때, 그 사랑으로 마음이 채움을 받을 때, 성령으로 충만케 될 때 비로소 사랑을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도 없습니다.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성령의 사랑으로 채움을 입으시고, 그 사랑으로 가족들, 이웃들,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전도로써 많은 사람 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6계명의 정신을 따라 생명을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용서와 화해, 사랑을 실천하며 사실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