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절심단혼향이란 강력한 최혼제(催魂劑) 중 하나였다.
일순간에 공력을 상실하게 만들며 흡입한 자로 하여금 기이한 환각 증세에 빠지도록
하는 효험이 있었다.
특히 절심단혼향은 여인들이 애용하는 사향(麝香)의 향기와 매우 유사하여 식별이 어
렵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몸에 뿌린 여인은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어떤 사내고 어김없이 그 앞에
서 굴복하고 말 테니까.
화자연은 벗겨져 나갔던 옷을 도로 주워 입었다.
그 옆에서 북리뇌우는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를 멍하니 천장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기
이한 눈빛으로 보건데 그는 절심단혼향으로 인한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
"흥! 어리석은 작자."
화자연은 냉랭하게 내뱉고는 그의 면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녀는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가여운 영혼이여! 회심(回心)의 역혼(逆魂)은 그대를 편안히 이끌어 주리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놀랍게도 일종의 주문(呪文)이었다. 나직하게 사위에 울
려 퍼지는 그 주문에는 사람의 마음을 격탕시키는 마력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또한 눈에서는 신비한 유백색의 광채를 뿜어내기도 했으니, 다시 말해 그녀는 괴이한
사법을 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른바 회심역체술(回心逆體術).
이는 원래 불가(佛家)의 대반야회심경(大般若悔心經)과 역혼세수경(逆魂洗髓經) 속에
기재되어 있으며,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심령의술(心靈醫術)로 사용되는 것이 통례
였다.
하지만 그 시전 방법이 사공(邪功)에 가까워 불가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 대법이었다
화자연에 의해 이 곳에서 재등장한 회심역체술은 북리뇌우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는
흡사 무엇에 취한 듯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전신에 한차례 거센 경련이 일었다. 그 광경을 보며 화자연은 계속하여 입을 열
었다.
"회심역혼(回心逆魂)의 이름으로 묻는다. 너는 누구냐?"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백색 광채는 아까보다 더욱 짙어져 북리뇌우의 일신을
휘감아 버렸다.
그는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나는...... 알려줄 수 없어."
북리뇌우는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가면서도 의식의 한 가닥을 빌어 완강하게 고
개를 젓고 있었다.
'이럴 리가......?'
화자연은 당혹과 불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북리뇌우의 반응을 도무지 납
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재차 물어 보았다.
"말하라. 너는 누구냐?"
그녀의 음성은 아득한 유계(幽界)에서 흘러나오는 것인 듯 음산하기 그지 없었다. 북
리뇌우의 입이 더듬더듬 열렸다.
"나는...... 북리...... 뇌우......!"
화자연의 얼굴에는 비로소 만족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감을 얻은 듯 분명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지?"
"십방...... 무림...... 통..... 사단......."
북리뇌우는 이번에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화자연은 그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수확이
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급히 물었다.
"직위는?"
북리뇌우는 답하지 않았다.
"직위를 말하라!"
화자연은 짜증이 난 듯 아미를 찌푸리며 그를 다그쳤다.
그러나 그 순간 대답을 대신해 북리뇌우의 얼굴에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와 함께 북리뇌우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좌수
를 앞으로 쭉 내뻗었다.
반면에 화자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북리뇌우.
그의 좌수 중지(中指)는 어느 틈엔지 믿을 수 없게도 암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울
러 그의 중지 끝에서는 심장을 관통할 듯한 핏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으으......."
잔뜩 겁에 질린 듯한 신음성은 화자연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북리뇌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극은 훌륭했으나 그 줄거리를 미리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 그대는 지금부터 본인을 이용하려 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더없이 냉담했다.
"안...... 돼......!"
화자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몸짓에
불과했다.
스으으.......
북리뇌우의 중지에서 실낱 같은 선혈이 배어 나와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마치 핏빛
광선인 양 세로로 선을 그은 핏줄기는 바닥에 닿자 뭉클하며 한 무더기의 혈무(血霧)
로 변했다.
놀라운 현상은 그뿐이 아니었다.
혈무는 허공에서 뭉쳐지더니 서서히 인간의 형상으로 화해가고 있었다. 더구나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인간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화자연 자신이었다.
"아! 어찌 이런......."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북리뇌우는 특유의 치기가 배인
음성으로 물었다.
"소위 악령의 섭혼법(攝魂法)이라고 하지. 그대는 혹시 악령혈정환(惡靈血精幻)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으으......."
화자연은 그가 말한 대법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악령혈정환.
사파(邪派)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섭혼대법이다.
한마디로 천하 섭혼술의 제왕이라면 맞으리라. 심신을 다 함께 제압할 수 있는 절대
위력을 지닌 사법(邪法)이므로.
이 대법은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비전의 것으로 무림에서도 실전된 지 오래이
다. 무서운 점은 시전자가 상대의 생사(生死)까지 주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혈환인(血幻人)은 완전한 화자연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 모습이란 혈광이 충만
하여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북리뇌우는 혈환인을 향해 말했다.
"이리 오라, 악령의 정화여!"
그의 음성은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으며, 언뜻 듣기에도 도저히 저항이 불
가능한 마력이 깃들여 있는 듯했다.
과연 음성이 명하는 대로 화자연의 형상을 한 혈환인은 끌려들 듯 스르르 북리뇌우에
게로 다가왔다.
본체(本體)라 할 수 있는 화자연도 무엇엔가 이끌리듯 망연한 표정으로 함께 딸려왔는
데, 이 때에 그녀의 안색은 공포에 절은 나머지 제 빛을 잃고 있었다.
북리뇌우의 눈에서도 어느덧 혈광이 일렁였다. 그 상태로 그는 화자연을 뚫어질 듯 직
시하며 입을 열었다.
"악령의 이름으로 고하노니...... 네 영혼은 이제부터 영원히 나의 것이니라."
화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점 잃은 두 눈에도 북리뇌우와 마찬가지로
혈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입에서 핏덩어리처럼 짙은 혈무를 토해냈다. 그 광경을 본 북리뇌우는 예의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의 지시로 날 유혹했느냐?"
"으으......!"
화자연은 전신을 한 번 세차게 경련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경황 중에도 무엇인가
의식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북리뇌우의 얼굴이 일시지간 차갑게 굳어졌다.
"너에게 고통을 주리라."
그는 혈환인의 목 부분에 손을 갖다댔다.
"으윽!"
화자연은 대뜸 비명을 발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며 고통을 표명했는
데, 그것은 영락없이 누군가에게 목을 죄이게 되어 몸부림을 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북리뇌우의 눈은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혈환
인의 목을 옆으로 꺾었고, 그에 따라 화자연의 목도 옆으로 홱 돌아갔다.
우드득!
"악!"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화자연의 입에서는 급기야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크, 이래도 버티겠느냐?"
북리뇌우는 혈환인의 목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 한편, 냉혹한 음성을 쏟아냈다.
"말하라."
혈광이 깃든 화자연의 눈에 공포와 절망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천라단(天羅團)......!"
북리뇌우는 검미를 꿈틀하더니 물었다.
"천라대성부(天羅大聖府) 소속이겠지?"
"그래요......."
화자연의 대답은 한숨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를 맛본 인간으로서 어쩔 수
가 없다는 듯.
"왜 날 조사했느냐?"
"명령인지라......."
"너에게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냐?"
"선우영령과 모용장청....... 그들은 벌써부터 본 수궁보에 당도해 있었어요."
북리뇌우는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선우영령이라면 너와 함께 내 앞에서 깜찍한 연기력을 과시하던 그 계집 말이냐?"
"네."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북리뇌우의 심문은 계속 이어졌다.
"천라단의 조직 체계는?"
"그것은......."
화자연이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으악!"
밖에서 느닷없이 한가닥 비명성이 터졌다.
"소악!"
북리뇌우는 질겁을 하여 부르짖으며 마차 밖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그 비명은 틀림없
는 소악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난색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혈환인을 향해 훅 하고
입김을 내뿜었다.
팍!
혈환인의 형상은 그의 입김이 닿자마자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이와 동시에 화자연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그녀는 뒤로 벌렁 넘어가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심기가 완전히 고갈된 상태
인지라 외부에서 전해지는 자극을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그대와는 다음을 기약해야겠군."
휙!
북리뇌우는 지체없이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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