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대신 소금을 냉각제로… “한국 손잡고 소형원전 시대 열 것”
[美 주도 에너지 패권 경쟁]〈하〉 차세대 소형모듈원전 실증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硏 가보니
오염수 유출 우려없는 ‘꿈의 원자로’… 2030년 美 와이오밍서 첫 가동 예정
SK 선도투자 등 한국과 적극 협력… “에너지 안보시대 ‘원전동맹’ 기대”
액체상태 나트륨 혼합물을 실온 용기에 부으면 즉시 고체로 변했다(위 사진). 실온에서 고체로 변한 나트륨 혼합물.
“소금과 질산칼륨 등 혼합물의 액체 상태입니다. 이것을 실온 용기에 넣어볼까요?”
실험복을 입은 숀 아크리 테스트 엔지니어가 섭씨 300도 상태의 ‘나트륨 혼합물 액체’를 섭씨 22도의 실온 용기에 부으니 순식간에 하얀 소금 덩어리와 같은 고체가 됐다.
“이렇게 소듐(나트륨)이나 융용염을 원자력발전 냉각제로 쓴다면 대형 사고로 냉각제가 외부로 유출된다고 하더라도 안전합니다.” 물을 냉각제로 쓰는 경수로는 일본 후쿠시마 사태처럼 원전 사고 시 오염수 유출 우려가 높지만 나트륨을 이용하는 소형 원전은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소금을 원전 핵심 기술로 활용하는 이곳은 2008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세운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설계 기업 테라파워의 ‘에버렛 연구소’다. SMR은 안전한 동시에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어 게이츠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점찍은 기술이다. 그는 매달 이 연구소를 찾아 기술 개발 현황을 살피고 있다고 한다. 미래 기술인 만큼 스마트폰 사진이 금지될 만큼 삼엄한 보안 속에 14일(현지 시간) 한국 취재진에 최초로 공개됐다.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는 “러시아 중국 국영기업도 소형모듈원전(SMR)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며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한미 원전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테라파워 제공
미 워싱턴주 벨뷰에 위치한 이 연구소에서는 4세대 SMR의 설계와 안전성을 검증하며 실증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는 “태양력-풍력으로는 기존 에너지 대체에 한계가 있어 러시아, 중국은 국영기업을 통해 미래형 원전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며 “에너지는 믿을 수 있는 나라와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한미 ‘원전 협력’이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 美, 유망 기업에 수조 원 몰아주기
SMR은 말 그대로 대형 원전의 발전 용량과 크기를 줄인 500MW(메가와트)급 소형 원전을 말한다.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안전도가 1000배 이상 높고, 모듈화된 부품을 조립해 건설할 수 있기 때문에 건설비용이 줄어들어 경제성이 높다. 또 전력 수요지 근처에 바로 지을 수 있어 에너지 운반에 들어가는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아직은 기술력과 실증 데이터 미비로 개발 초기 단계에 있다. 어떤 냉각재 및 감속재가 ‘표준’이 될지도 검증되지 않았다. 이에 미국과 중국, 우라늄 강국 러시아가 보조금을 쏟아 부어 개발하는 가운데, 최근 한국도 민관 SMR 얼라이언스를 만들어 경쟁을 선언했다.
현재 70개가 넘는 SMR 종류 중 테라파워는 차세대인 4세대 SMR 중에서도 소금을 활용한 소듐냉각고속로(SFR)와 ‘꿈의 원자로’로 불리는 염소염융용염원자로(MCFR)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기자가 찾은 6600㎡(2000평) 규모의 연구소에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안전’과 ‘소금’이었다. 나트륨 혼합물의 끓는점과 녹는점을 조정해 안전성을 높이는 실험과 더불어 실제 실험실 단계의 MCFR 실물도 설치돼 있었다.
마샤 버키 테라파워 부사장은 “나트륨 원자로로 불리는 테라파워의 SFR이 2030년 와이오밍주에서 수명을 다한 화력발전을 대체해 전기를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미 에너지부 SMR 실증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미 정부와 테라파워는 각각 20억 달러(약 2조6000억 원)를 투입해 미국 최초의 ‘나트륨 원자로’를 세울 예정이다.
● “한국과 원전 동맹 기대”
르베크 CEO는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원전은 민간 투자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창업부터 연구시설 구축, 실증 데이터 확보, 실제 건설까지 정부의 규제 정비와 보조금이 필수라고도 덧붙였다.
르베크 CEO는 “미국 원자력 산업은 러시아산(産) 농축우라늄에 의존하며 관련 기술 개발에 소홀했던 우를 범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이 맞았던 에너지 위기를 차후 피하려면 에너지 공급망이야말로 한국과 같은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테라파워는 러시아산 우라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와이오밍 프로젝트 완공 시기를 1년 이상 늦췄다. 공급망에서 중국산도 배제했다.
그 대신 한국과는 적극적인 협력을 꾀하고 있다. 테라파워는 게이츠가 창업했지만 한국의 SK도 공동 선도 투자자로서 이사회 의석 1개에 대한 지명권을 갖고 있다. SK㈜와 SK이노베이션이 2억5000만 달러(약 3000억 원)의 투자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HD한국조선해양도 테라파워에 투자한 상태다.
미국은 원전 건설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원전 설비 공급망과 기술력이 필요한 상태다. 르베크 CEO는 “미국보다 한국이 원전 건설 경험이 훨씬 풍부하다”며 ‘원전동맹’을 통해 향후 나트륨 원자로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수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벨뷰(워싱턴)=김현수 특파원
美, 10년전부터 SMR 규제 정비-보조금 투입… 친환경 스타트업 봇물
[美 주도 에너지 패권 경쟁]
에너지전환시대 맞아 투자 몰려
“미래 20년은 탄소중립이 화두”
미국 원자력 규제당국인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2012년 ‘소형모듈원전(SMR)의 물리적 보안 문제’라는 제목의 백서를 냈다. 이 백서에는 SMR의 규격과 라이선스 등에 대한 미국 내 과학자들의 의견, 토론, NRC의 결론 등이 담겨 있다. 2000년대 말부터 이미 차세대 원자력발전으로 꼽혀온 SMR의 정의나 라이선스를 논의한 것이다. 미 에너지부는 이를 바탕으로 2010년대 중반부터 테라파워나 뉴스케일 같은 SMR 유망 기업을 선정해 수조 원의 보조금을 쏟아부었다.
10년 이상 논의 끝에 NRC는 올해 1월 처음 SMR 규제 최종안을 발표하고, 뉴스케일 SMR 설계를 승인했다. 한국이 올해야 SMR 민관 얼라이언스를 꾸려 기술 논의를 시작한 반면에 미국은 발 빠른 규제 정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보조금 투입으로 상업화 단계인 현재 선두주자가 됐다.
1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주 벨뷰에 있는 SMR 설계 기업 테라파워의 연구소에서 만난 크리스 르베크 최고경영자(CEO)는 “창업 후 15년 동안 첫 번째 ‘죽음의 계곡’이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죽음의 계곡은 실제 SMR을 상용화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하는 것”이라며 “정부와 민간 부문 투자 덕에 우리는 이 계곡을 잘 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테라파워는 2021년 미 에너지부의 와이오밍주 SMR 실증 사업에 선정돼 20억 달러(약 2조6000억 원)를 받았다. 안전성 문제로 규제가 까다로워 언제 매출이 일어날지 모르는 원전 ‘스타트업’이 정부 실증 사업을 꿰차자 SK를 비롯해 민간 투자가 몰려 추가 자금을 마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원전 관계자는 “원전은 안전성과 직결돼 있어 규제당국의 안전성 기준 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찍 기준 마련에 나선 미국에서 2000년대 후반에 이미 SMR 기술 개발 기업이 생겨난 이유”라며 “미래 기술에 대해 일찍부터 일관성 있게 규제를 정비해 글로벌 기술로 표준화해 온 미국의 에너지 패권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원전뿐 아니라 수소 에너지, 차세대 배터리 등 에너지 전환 시대를 맞아 미국 내 스타트업이 쏟아지고 있다. 2050년 탄소 중립 시대를 열기 위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앞서 규제를 만들면 해당 규제에 맞추기 위해 기존 탄소 배출 기업들은 이들 스타트업의 기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데다 민관 투자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올해 클린 에너지 분야 투자가 1조7000억 달러(약 2192조 원)로 화석연료 에너지 투자를 능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친환경 규제 장벽을 높이고 있는 EU는 선박이나 항공기 탄소 감축안을 독자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 같은 규제 환경의 변화 속에 암모니아 기반 수소전지 스타트업으로 2020년 미 뉴욕에서 창업한 아모지는 올해 상반기에만 1억5000만 달러(약 1934억 원)를 투자받았다. 선박에 적용할 수 있는 암모니아 기반 수소전지 실증이 최종 목표다. 우성훈 아모지 대표는 “지난 20년간 산업계 화두가 디지털이었다면 향후 20년은 탄소 중립이 될 것”이라며 “새로운 기업들이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벨뷰(워싱턴)=김현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