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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장 1-17;빌 4장11-13)
성경본문: 출애굽기20: 1-17 ;빌립보서 4:11-13
출애굽기20: 1-17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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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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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못느낄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굉장히 잘 삽니다. 제3세계 사람들 중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에서 3-40년 이민 생활하시는 분이 한국을 방문하면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에서 그렇게 잘 살면서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대표적인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일 것입니다.
행복감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은 세계에서 거의 꼴찌에 가깝습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보다도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에게서 행복감을 빼앗아가는 주범은 무엇일까요?
결코 가난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탐욕, 또는 시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더 가지려고 하고,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이고, 항상 이웃의 잔디 밭이 더 푸르러 보입니다.”(한국과 미국 속담)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열 번째 계명이 바로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인간의 욕심, 탐심에 관한 계명입니다.
제10계명은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이지만 앞의 아홉 가지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의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잘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약1:15)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발동하면, 부모에 대한 효도도 어렵고,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거를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지난 9주 동안 십계명에 관한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나요?
☞ 3천 500년 전에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이지만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놀라운 계명이라는 생각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 간단하고 단순한 계명인 것 같은데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기는 쉽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감사하게도 십계명에 대해 배우면서 조금씩 생활의 변화를 경험하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일을 더 잘 지키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부관계가 좋아지고, 헌금을 잘 드리게 되고, 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험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제10계명)
이 열 번째 계명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행위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 관한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일반 사회법으로는 탐심, 욕심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 욕심이 잘못된 행동으로 표출될 때만 처벌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눈에 보이는 죄된 행동만 죄라고 하지 않고,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욕심, 탐심도 큰 죄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서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열 번째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가?
우리가 이 열 번째 계명을 잘 지키지 않으면 나머지 1계명부터 9계명까지 모든 계명을 잘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시작은 마음 속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가 마음의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이웃의 아내에 대해 탐심을 가지게 되면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자기 죄를 덮어보려고 하다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나 여호수아 시대의 아간처럼 물질,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갖게 되면, 거짓말하게 되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합과 이세벨처럼 이웃의 밭이나 권력에 대한 탐심을 품게 되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범하고, 나아가서 살인과 도둑질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죄의 뿌리를 욕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교만이나 불순종으로 보는데, 따지고 보면, 교만도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 다른 사람보다 더 유명해지려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교만해지고, 교만한 마음이 들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3장을 살펴보면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가?
교활한 뱀의 유혹도 있었지만 그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 교만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하나님처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청지기 직분을 맡았습니다.
감사하고 순종하면 되었습니다.
인간이 욕심만 갖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세상 만물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통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과 교만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을 때 불순종과 타락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요,
잠언4:23절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시려 하실 때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어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을 때 겉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예수님이 이 말씀을 친히 해석해 주셨듯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음식)은 다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에 더러울 것이 없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써,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이 다 마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죄악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피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첫째가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세 가지 : “탐(貪)”, “진(嗔)”, “치(痴)” 등인데, “삼 독(毒)”이라고도 합니다.
“탐냄”, “분냄”,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공자도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젊을 때엔 음욕을 조심하고, 나이가 들면 물욕을 조심해야 하고, 더 나이가 들면 명예욕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음욕과 물욕과 명예욕을 조심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조심해야 할 욕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강영안, 십계명 강의, p.355)
그렇다면 모든 욕망이 나쁜 것인가?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이 헛되고, 불필요하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에서는 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욕망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편의상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였습니다.
“욕구”는 “needs”이고, “욕망”은 “desir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의 욕구, 욕망 중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심어놓은 자연스러운 욕구, 욕망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 먹고 싶고, 목마를 때 마시고 싶은 욕구,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기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승부욕, 안전에 대한 욕구 등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10계명에서 금하는 “욕망”, “탐심”은 ‘있는 것, 하나님이 허락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없는 것에 불만을 품고, 더 가지려하는 것,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대해 시기하고 욕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탐욕이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벗어나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이 탐욕이 발동하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이웃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열 번째 명에서 명하는 것처럼 “이웃의 것들을 탐내지 않고 만족하며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자족이란 욕심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빌립보서4:11-13절을 다시 보세요. 사도 바울의 인생관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현재 내 환경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항상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비천할 할 때도 있고, 풍부할 때도 있지만, 그런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고 감사하게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족하는 습관은 처음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족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족은 형편 때문이 아니라 오직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내 간증)
저는 사도바울만큼 고생해보지는 않았지만, 목회자로, 선교사로 살면서 나름대로 다양한 형편에 처해 보았습니다. 후진국에서도 살아보았고, 선진국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소위, 3년 이상 실직자가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과 똑 같은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형편이 문제가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가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가난, 약함을 통해서 더 귀한 진리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편이 좋으신 분들 ? 자만하지 마십시오.
지금 형편이 안 좋으신 분들 ?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려면
둘째로, ,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6장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의식주 문제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염려와 걱정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걱정에 시달리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을 먹고 사는 문제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염려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특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구할 것이 있을 때, 담대히 구하여 기도 응답을 체험하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혼의 구원 문제 뿐 아니라 건강, 직장, 물질, 진로 등 생활 모든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생활의 염려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나오는 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대로,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고, 염려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고,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해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욕심을 갖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려면
셋째로 “인생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과 같은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인 역대상29:15절을 보세요.
“우리는 우리 조상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안개와 같다고도 하고, 금방 시드는 풀의 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인생이 길지 않고 짧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시90:10,12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고, 인생이 길지 않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욕심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차이점도 있겠지만, 타락한 인간은 탐욕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본능적인 욕구가 있지만 탐욕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사자라고 해도, 배가 고프면 먹이감을 잡아 먹지만, 일단 배부르면 절대로 다른 동물을 더 죽이지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평생 먹을 것이 있어도 더 가지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채울 수 없는 욕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욕심 많은 사람을 돼지에 비유하지만, 돼지보다 사람이 더 욕심이 많습니다.
만약 돼지들이 말할 수 있다면, 욕심 많은 돼지를 햐해 ‘너 사람을 닮았구나!”라고 할 지 모릅니다.
인생은 그렇게 길지않고, 이 땅에 나그네로 와서 살다가 떠나는 것임을 인식할 때, 과도한 욕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이 주신 황금율을 실천할 때,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마7:12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황금율을 쉽게 풀어보면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내가 받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용서 받을 때 기쁘지 않으세요?
그러면 용서해 주십시오.
이 말씀대로 실천하면 십계명을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고, 내 명예가 귀하면 다른 사람의 명예도 귀한 것입니다.
내 물건이 귀하면 남의 물건도 귀한 것입니다.
내가 칭찬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때 좋지 않으세요?
그러면 먼저 섬기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말씀을 잘 들어주고, 순종할 때 좋으세요?
그러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비판 받을 때 기분이 상하고, 칭찬받을 때 행복해진다면 이제 남을 비판하기 보다는 늘 칭찬하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신 황금율을 잘 기억하시고, 그 말씀대로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지키기 까다로운 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열 번째 계명인 것 같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 탐심을 물리치는 것이 그 만큼 어렵습니다.
마가복음10:17-2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여짜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은 제5계명에서 9계명까지 잘 지켰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나중에 주님께 돌아와서 제자가 되었는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물질이나 명예, 권력과 같은 욕심을 버리는 것은 인간적인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마음을 비우고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 번째 계명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마지막은 점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제10계명에서 그냥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이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습니다.
“네 이웃의 집, 네 이웃의 아내, 네 이웃의 소유”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이웃’은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시골에서 한 동네 사람들은 이웃 집의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도 알았습니다.
결혼과 환갑 때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일날에도 서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야말로 한 식구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거리상으로 가깝다고 다 가깝게 지내지 않습니다.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이웃입니다 .
그러나 도시 아파트 문화에서는 “옆 집에 사는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거의 교제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자주 연락하며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웃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우리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맞고 빼앗기고 옷 벗김을 당하고 쓰려져 있기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지만, 그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 후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자 불쌍히 여깁니다.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자세히 묘사하십니다.
(1) 가까이 다가감
(2)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음- 응급처치
(3) 자기 짐승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줌
(4) 그 이튿날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돌보아 주라고 함,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함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누가 우리가 사랑하고 돌봐야할 이웃인지 은연 중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죠?
강도 만난 사람, 세상에서 환난당한 사람, 가난한 사람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알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서기관은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잘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즉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 속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무슨 바쁘다는 핑계로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십계명에 대한 공부를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계명의 요약은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냥 사랑하는 것만으론 안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도 그냥 사랑한다고 말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성경 지식이 좀 부족해도 흠이 되지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식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오늘 들은 제10계명을 잘 기억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시고, 항상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사실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주신 황금율을 잘 실천하시고, 위기 당한 사람을 보면 사마리아인 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