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스스.......
열 명의 흑의복면인은 유령이 움직이듯 소리 없이 북리뇌우에게로 접근해 왔다.
북리뇌우.
어느덧 마차에서 내린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자신감을 내 보여 상대로 하여금 절로 위축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흑의복면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대단한 예기!'
주고받는 그들의 눈빛에서는 대충 그런 감정들이 읽혔다.
그들은 내심 매우 당혹해 하고 있었다. 십 인이 한 사람을 상대하면서 기세가 밀리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들 중에는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고, 장내를 지배하게 된 것은 팽팽한 긴장과
함께 무거운 침묵이 전부였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숨막히는 느낌과도 같았다.
그 두터운 침묵의 벽을 깨고 북리뇌우가 입을 열었다.
"피차에 이런 시간은 오래 갖지 않는 게 좋겠군."
비아냥에 가깝게 들리는 그 말 뒤로 그의 장심에서 한 줄기 적염(赤焰)이 피어 올랐다
. 여하한 음향도 수반되지 않았으나 곧이어 적염은 그의 팔 전체를 휩싸갔다.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십 인의 흑의복면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각오를
다진 듯 그들의 눈은 빠른 속도로 본래의 무심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삭풍이 스치듯 메마른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죽여라!"
외침이 있은 직후였다. 그들은 전후좌우(前後左右), 허공 중으로 각각 두 사람씩 나누
어 흩어졌다. 그 동작은 실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신쾌무비했다.
파파파팟!
열 줄기의 짙푸른 도강(刀 )이 그물처럼 북리뇌우를 덮어씌운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
다.
"지독하군!"
북리뇌우는 읊조림과 동시에 빙글 신형을 돌렸다. 그의 수중에서는 현란한 적염의 환(
環)이 탄출되었다.
파아아아― 콰쾅!
폭음과 더불어 흑의복면인들이 발출해 낸 도강은 대번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북
리뇌우가 쏘아낸 환에 부딪치자 맥없이 박살이 나고 만 것이었다.
이 때, 북리뇌우는 슬쩍 양 손을 뻗어냈다.
위잉―!
그의 양 손이 파공성을 울리며 한차례 세차게 휘둘러졌다.
파파파팍!
두 흑의복면인은 경악성을 발했다.
"헉!"
"이럴 수가......."
놀랍게도 허공에서 북리뇌우를 덮쳐 내리던 엽도(葉刀)가 그들의 수중에서 먼지처럼
부서져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아연한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가슴으로 두 줄기 붉은 선
이 환상처럼 파고들었다.
츠으으읏!
이 인의 흑의복면인은 허공에서 굳어져 버렸다. 그들은 죽음을 예견하고 항거하기를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우우, 적룡염환강(赤龍焰環 )을 어찌 네가......!"
그들은 불신과 회의가 뒤범벅이 된 음성으로 중얼거렸는데, 그 순간 그들의 눈에 나타
난 것은 의외로 경외감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그들 두 사람을 찔러 갔던 혈환강이 가슴을 꿰뚫고 등뒤로 번쩍 쏘아
져 나간 것은.
"크헉! 큭!"
두 마디의 비명 뒤로 참경이 연출되었다.
푸스스스.......
그들의 육신은 믿을 수 없게도 삽시에 한 무더기의 잿더미로 화해 허공 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돌발적인 사태에는 나머지 팔 인의 흑의복면인들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고도의 훈
련을 거친 그들이 신색을 정비하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한 순간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수중의 엽도를 기쾌하게 휘두르며
북리뇌우를 공격해 왔다.
쐐애애액!
팔 인의 합공(合攻)의 기세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공세라면 가히 태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 했다.
북리뇌우는 그 사이 전신이 적환으로 감싸여 있었는데, 그들의 공격이 있자 환은 두
배로 증가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쏘아져 나가며 쇠사슬처럼 엮여 팔 인을 휘감았다.
파파파팍―!
고막을 파열시킬 듯한 파공성이 울렸다.
"크악! 크으으윽―!"
여덟 명이 내지른 처절한 비명성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들도 결국 칠공(七孔)에서 암연(暗煙)을 내뿜는가 싶더니 전신이 타서 재가 된 채
부스러져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십 인이 전부 제거되자 사위는 고요를 되찾았다. 그제서야 북리뇌우는 적염의
환을 거두며 돌아섰다.
"큰일이군. 갈 길은 바쁜데 정말로 지치니......."
말끝을 흐리는 그의 음성에는 피로가 잔뜩 배어 있었다.
그의 상태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윤기가 흐르던 그의 긴 머리카락에서 기현상이 일어났
다. 아랫부분이 은색으로 변하며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탈기(脫氣)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하지만 북리뇌우는 이를 스스로 느끼면서도 개의치 않고 마차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는 흠칫 놀라며 안색을 굳혔다.
어느 사이엔가 이십여 명에 달하는 흑의복면인들이 마차를 엄밀하게 포위한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습을 외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각기 나무 위나 땅 속, 혹은 수풀 사이에
숨어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악이나 화자연은 그들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북리뇌우는 분명
히 알 수가 있었다.
스슥!
흑의복면인 가운데 한 명이 화자연의 등을 향해 여보란 듯 엽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그녀는 등판이 갈라져 죽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그 공격은 북리뇌우로서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
었다.
그는 다급한 표정이 되어 화자연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왜......?"
그녀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을 노려 엽도는 그녀의 등판에 내리꽂
혔다.
파아!
그런데 그 찰나, 뜻밖의 반전이 이루어졌다.
츠츳―!
어디선가 한 줄기 눈부신 섬광이 뻗어와 흑의복면인과 화자연의 사이에 작렬했다.
"크윽!"
짧은 비명성이 동시에 터졌으나 그 소리의 임자는 화자연이 아니었다.
휙!
북리뇌우는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의 눈에 별 탈 없이 무사한 화자연과
그녀를 해치려다 되려 비명횡사한 흑의복면인의 모습이 함께 들어왔다.
그 자의 백회혈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은빛의 강전( 箭)이 한 대 꽂혀 있었다.
"염병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까지 끌고 다니며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해
야 되다니......."
소악이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사이에 정황을 깨달은 화자연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일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당차고 영활한 여인이었는가는 이 순간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
다.
그녀가 알기로도 현재 자신들이 공동으로 상대하고 있는 적들은 예사로운 무리들이 아
니었던 것이다.
이 때, 북리뇌우의 당황한 음성이 그녀의 귀에 꽂혔다.
"허공!"
역시 그것은 그가 화자연의 곁에 이르기 전의 일이었고, 그녀는 질겁을 하여 반사적으
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파아아―!
"악!"
그녀의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에서 뻗어오는 칼날에도 무력했지만 머
리 위에서 기습적으로 덮쳐드는 적을 그녀로서는 방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상황은 이번에도 그녀의 편이었다.
츠팟―!
또 한차례 섬광이 일더니 화자연을 공격하던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케엑!"
비명 소리가 울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귀를 틀어막
았다. 그 바람에 정작 그녀는 보지 못했으되 북리뇌우는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아!"
화자연의 머리 위로 허공에 한 마리의 거대한 백학(白鶴)이 둥실 떠 있었다. 백학의
등에는 누구인지는 모르나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는 것도 보였다.
파파파팟―!
눈부신 백색의 섬광은 그 인물의 손끝에서 연이어 뻗어 나왔다. 그에 따라 위급한 상
황도 점차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퍼펑! 콰콰콰― 쾅!
굉렬한 폭음과 함께 주위의 수목들이 송두리째 뽑혀 날아갔는가 하면 땅거죽이 곳곳에
서 폭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벼락이 계속해서 천지를 강타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크아아악―!"
덕분에 장내는 물론 그 인근까지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는데, 북리뇌우
는 와중에서도 시종 흥미로운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혼란이 가라앉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그 사이에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백학을 타고 나타난 인물에 의해 모조리 형체도 없이 죽어간 것이었다.
그 여파만도 대단해 선우영령 같은 경우에는 혼절한 중에도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입
에서 선혈을 흘려내고 있었다.
휘이익!
허공에 떠 있던 백학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여 지면에 내려섰다. 그 주인도 백학 등에
서 내려 북리뇌우와 마주 섰다.
그는 일신에 남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보기 드물게 준미한 용모를 지니고 있는 청년이
었다. 오관이 너무도 섬세하고 아름다워 자칫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서늘한 봉목에서 발산되는 빛이 대체로 온화하여 초면임에도 북리뇌우는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청년의 오른손 소맷자락에 금색 실로 코끼리의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본 북리뇌우는 짚이는 바가 있었
다.
'이 자는 만상구중련(萬像九重聯)의 인물이 틀림없다. 금빛 코끼리의 문양은 그 곳을
뜻하는 표기이지.'
그는 중얼거리며 새삼 남의청년을 응시했다.
만상구중련.
이는 비인간류(非人間流)의 숨은 하늘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버려진 자나 패배자,
한(恨)을 품은 자,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똘똘 뭉쳐진 자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정상적으로 살아가지 못해서 축출되고 만 불우한 운명의 인간들이 구축한,
그들만의 절대적 세계라던가?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작금에는 무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패세(覇勢
)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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