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가 오 지 마 [13]
“유리안……. 유리…….”
조용한 전주 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 목소리의 떨림이 내 귓가에까지 전해졌다. 자칫하면 음악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뻔 했지만, 그 조심스럽게 떨림이 느껴지는 소리로 인해 난 잠시 떨어지리란 공포감
은 잊을 정도로 내 생각과 행동들이 굳어 버렸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난 엠피의 전원을 꺼 버렸고, 그렇게 몇 분을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 불규칙한 박동의 심장소리가 이제 내 귓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쿵,쿵’
거리는 소리가.
“유리안…….”
아직도 내 이름 세 글자에서 머물러 있는 그의 목소리가, 날 숨 가쁘게 만들어 버렸다. 이
러면 안되는데, 이 사람은 이럴 사람이 아닌데, 분명 이 사람의 지금 이 말들이 거짓일수도
있는데, 왜 난 또 부정하려 하는 거지? 이 사람 가식적인 사람이 분명하잖아. 너무나.
그래, 유리안.
정신 차려. 이건 이자식의 계획일 뿐이야.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고 뒤를 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리려 하자, 내 콧등으로 떨어지는 무언가가 내 콧등을 간질이고 흘러내렸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니, 눈을 꾹 감은 채 그 속눈썹에 간신히 지탱해 있던, 또 다른 눈물이 내게로 떨
어지려 하고 있었다.
“뭐예요!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라고 했죠?”
조용한 공간 한가운데 작은 유리구슬이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난 그렇게 그 상
황을 깨어버리려 했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 날 붙들어 맨 팔을 풀지 못한 채.
그렇게 그 상태로 멈춰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입은 한쪽 끝이 올라가면서, 한마디 말을 뱉어내었다.
“너무 감동 하지 마. 그러면 내가 너무 부담스럽지.”
다시 장난스러워져 버린 그의 말 한마디. 그 말과 함께 그의 팔이 내 몸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그 팔이 떨어져 나감과 함께 내 귓속에서 울려대던 내 심장박동도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게 되었다.
“무슨 짓이야. 창가에서 그러다 정말 떨어지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겠지?”
“미친 게 정말 맞네요. 정말. 당장 나가! 나가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두 손을 내게 펴 보이며 진정하라는 듯 날 타일렀지만, 이유모를 화가 머리끝까치 차고 올
라오는 게 또 내 목소리 톤을 높여 버렸다.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다시금 느껴지는 허전함이 내 몸은 에워싸 버렸다. 아직도 내
콧등에서 느껴지는 촉촉함이 가시지도 않은 채, 갑자기 감상적이 되어버린 날 인정하지 못
해 손으로 그걸 닦아내어 버렸다. 분명, 다 거짓일 테니.
그렇게 차가운 가을바람이 내 어깨를 스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그렇게 창가에 앉
아 있었다. 물론 들어오는 길에 날 본 새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주혁이. 언제나 그랬듯 내
이런 행동에 적응되어버린 사람들이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제 모든 건물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나도 그제야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몸은 차가워 질대로 차가워져 버렸고, 그 추위가 내 입술을 떨리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침대에 머리를 뉘이자 나는 잠이 잘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잠드는 것에 대한
공포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조금씩 내 깊이 패인 상처들이 조금씩 그 새살을 채워가고 있어서 일까?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뒤척이고 있는 나를 보면 아직 내게 그 큰 상처를 치유할만한 약을 가슴이
가지고 있질 못한 것 같아 그 낫는 시간이 더 걸리는 이유 때문이겠지 아마.
일요일 아침이 다가왔음을 가을햇살에 따뜻해져 버린 내 뒷머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비계에 얼굴을 묻고 자는 바람에 벌써 중천에 떠버린 해를 난 미쳐 몰라봤고, 잠이 덜 깬
눈으로 흐릿하게 보인 탁상시계의 작은바늘은 이미 10이란 숫자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약에 의지 하지 않고도 이렇게 긴 시간의 잠을 청해 보았던 적은 아마 손에 꼽기도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침대에 조금 더 몸을 누이고 싶어 하는 내가 놀라울 따
름일 수밖에 없었다.
[똑똑.]
내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달갑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누구세요?”
[똑똑.]
“누구세요!”
“아침 가져 왔어.”
퉁명스런 목소리. 주혁이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이 갖다 주었는데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버린 듯 했다. 저 녀석이 내 아침을 갖다 줄 정도라면. 난 침대에
서 일어나 문을 열어 쟁반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주혁이와 마주했다.
“고마워.”
“웬일로 아직까지 자고 있었어. 지금 10시도 넘었어.”
“어제 좀 피곤했었나 봐. 아무튼 잘 먹을게.”
주혁이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내게 쟁반을 건넨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난 녀석이
건네 준 아침을 받아들어 책상에다 내려놓았다. 서툰 솜씨로 만들어 계란 노른자가 터져 버
린 후라이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작은 접시에 담긴 방울토마토가 누가 이아침을 차렸을
지 대충 짐작을 가게 해 주었다.
이럴 때 보면 그냥 주혁이는 내 동생처럼 보이는데, 가끔씩 내게 아주 많이 가끔씩 보이는
녀석의 눈빛과 차가운 말들이 내가 더 가까이 다가서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간단히 주혁이
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부엌에 가져다 놓기 위해 방문을 열어 아래쪽으로 내려가려 하자,
뒤에서 들리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런 건 객인 내가 해 줘야지 공짜로 자는 것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지.”
재석은 내가 들고 있던 쟁반을 가로 채 아래층으로 재빠르게 달려가 버렸다. 난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난 빈손으로 계단을 내려갈 수 밖
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주혁이가 아침부터 그 것에 눈을 빼앗
기고 있다.
“주혁아, 좋은 일요일이다.”
“네. 선생님, 안녕 하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하나도 바뀌지 않은 채 주혁이는 재석에게 인사를 건넸고 난
두 사람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재석은 뭔가 바쁜 듯
분주했고, 난 어색한 자세로 주혁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텔
레비젼에만 시선을 두었고, 나도 하는 수없이 테이블에 놓인 잡지를 괜시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다닐만 하냐?”
“그럭저럭.”
“넌 졸업장 어차피 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다니는 거야?”
“그냥, 남들은 모두 해 본 학교생활을 나만 모자라게 한 느낌이랄까…….”
“그럼 열심히 해서 검정고시라도 봐. 그래야 대학도 갈 테니까. 나 같은 인간도 대학갈 수
있다니까.”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지.”
“넌 왜 스무살인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 너 같은 인간보고 애늙은이라고 하는 거
야. 무슨 세상의 짐 너 혼자 다 짊어졌어? 넌 지금 다른 사람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있어.
그런데 왜 넌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보다 더 힘든 척 하는 건데?”
“나보다 네가 더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유리안! 주혁아!”
또 대화를 잘라 버리는 재석. 뭐가 저리도 신나는지 혼자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우리에
게 다가오고 아니 달려들려 했다.
“우리 놀러 나가자.”
“애들같이 무슨.”
“유리안, 너 애 맞잖아. 안 그래?”
“뭐라구요?”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냐. 어차피 집 안에만 있을 거면서.”
나보다 놀러가는 데에 더 관심 없는 주혁이가 그런 말을 내게 하니,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
다. 혹시, 재석이 주혁이에게까지 영역을 넓혀간 건가? 벌써 옷가지를 챙기고 나온 주혁이
가 날 다그쳤다. 화난 표정으로 다그치는 게 아닌, 날 바라보며 아무표정을 짓지 않은 채.
“알았어.”
얼떨결에 휩싸여 밖을 나섰다. 재석은 처음 보는 차에 타서는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주혁이가 내 어깨에 손을 대었다. 녀석의 손이 이렇게 따뜻했었구나. 물론 이런 적이 처음
이었기에 난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그래.”
주혁인 뒷자리를 열어놓은 채, 먼저 앞자리에 탔다. 난 무슨 귀신에 홀린 것 같이 그의 차
에 올라탔다. 재석은 내가 타자마자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혼자서 중얼거리며 운전
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가 차를 세운 곳은 여의도 공원.
“내리자.”
“도대체, 여기서 뭘 하려고 그러는 거죠?”
“궁금하면 어서 차에서 내려.”
벌써 차에서 내려버린 주혁이와 재석. 난 끌려나온 똥강아지 마냥 그들의 뒤를 따라야만 했
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이 머문 한
곳. 도란도란 가족이 모여 간소하게 차려놓은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뺏겼
을 때 재석이 내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
“벌써부터 시집가고 싶은 거야? 그러면 곤란한데, 난 어쩌라고?”
“빨리 이 손 못 치워요?”
“이거 신으면 그래줄게.”
그의 손에 들린 건 인라인 스케이트 였다. 그는 날 그늘이 지는 벤치에 데리고 가서는 억지
로 스케이트를 신기려 하고 있었다.
“됐어요. 내가 신을테니.”
“얼마나 착해. 이렇게 고분고분 존대하고, 말도 잘 듣고.”
“당신, 날 애취급 하려거든 당장 집에서 나가.”
“알았어, 난 이렇게 항상 여자에게 약하다니까…….”
여자에게 약해? 난 그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다 준비한 뒤였고, 아직도
헤매고 있는 나에게 헬멧을 씌워 주었다.
“어때? 그게 뭐냐. 창백하게. 여름은 이미 지났지만 가을햇살을 빌어서 좀 태워야 쓰겠네.”
“그럼 피부과로 가는 게 빠를 텐데요?”
“오, 그런 유머도 할 줄 알아?”
“윤재석!”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가자.”
“주혁이는 어떻게 된 거죠?”
“일보다 온다고 그랬으니까.”
안 봐도 뻔 하지 주혁이를 도구로 이용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의 뛰어난 말솜씨, 사람
홀리기 십상일 친근한 미소에 안 넘어갈 사람이 거의 없었겠지.
그는 내 두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내 스텝은 허둥지둥 개그가 따로 없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날 이끄는 그였다. 햇살을 등지고 있는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지
만 그의 얼굴은 햇살을 받고 있는 내 얼굴보다 더 밝아 보였다.
그의 진짜 모습은 어떤 걸까? 지금 이 천진난만한 얼굴? 아니면…….
“조심해!”
“네?”
“그렇게 내 생각하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내 생각은 집에서 만으로도 족하니까 어서 집중 해.”
“뭐라고요?”
다시금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날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이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야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손을 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기에.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리안, 가을바람이 얼마나 좋냐. 매일 그렇게 방안에서만 박혀 살면 되겠어?”
“바람은 무슨, 땀만 나는데.”
“그럼, 잠시만 눈 감아 봐. 내가 꽉 잡아 줄 테니.”
난 그의 말대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는 내 팔꿈치까지 잡고 날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끌
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씩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 분명하진 않았지만, 내 뺨 쪽의 솜털을
간질이는 바람이 느껴지려 하자, 난 눈을 떠 버렸다.
“어때?”
“어떠긴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그래. 거짓말이라고 알아두지.”
아무리 가을 날씨긴 하지만, 내가 쉽게 지쳐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숨도 조금식 가빠지고,
다리도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다.
“좀 쉬자.”
재석은 스케이트를 갈아 신던 벤치로 데려와 홀연히 사라지더니 이내 곧 두 손에 이온음료
두 개를 쥐고 있었다. 그는 벤치에 앉아 음료 한 개를 내게 건넸다. 난 그가 건넨 음료를
내 옆에 그대로 뜯지도 않은 채 내려놓았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왜냐고? 네가 좋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렇다면, 만약 내가 그 쪽 행동에 혹시나, 정말 혹시나 감동해서 사귀자고 한다면?”
“한 가지만 묻겠다고 했으니, 난 대답할 의무 없겠지?”
그는 대답하기 싫다며 들고 있던 음료수를 한숨에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
더니 내게 다가와서 하는 한 마디.
“혹시나, 정말 혹시나 니가 궁금해서 해 주는 말인데, 네가 사귀자고 한다면.”
“한다면?”
“내 대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NO’ 야. 알겠지?”
그렇게 또 웃음을 지어보이며 혼자 사람들이 많은 트랙 안으로 사라져 버린 그였다.
그런데, 왜? 왜…….
=리플 달아주셨던 님들. 제다 완전 사랑합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