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실학을 태동시킨 반계의 꿈, 용인에 잠들어 있다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황석마을 정비산 동쪽 자락에 는 다소 뜻밖에 인물이 묻혀 있다.
반계 유형원 (1622~1673) 교과서에서 얼핏 스쳐갔던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스쳐갈 사람이 아니다.
부안에 칩거한 유형원, 왜 묘소가 용인에 있을까
유형원은 서울 서부 소정릉동 외갓집에서 태어났고,
지역을 떠돌다가 말년 20년간을 저날도 부안현 우반동에서 살다가 돌아간 사람인데, 왜 묘소는 용인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용인은, 부친 유흠(예문관 검열을 지낸 문관이었다)이 1623년 유몽인 옥사(폐위된 광해군 복위 혐의)에 연루되어
27세에 처형당한 뒤 묻힌 곳이다.
유형원이 갓 태어나 1살이던 때이다.
14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조부모와 어머니(이씨), 그리고 유형원은 원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난 뒤 조부모는 부안으로 내려갔고, 유형원과 어머니는 서울로 돌아와 살았다.
26세 때인 1648년, 어머니가 돌아갔고 용인에 부부합장을 했다.
그러니까 용인은 유형원에게는 한 맺힌 부틴의 뜻을 겨억하는 성소였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 품에 자란 '고독한 천재'가 늘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초심의 좌표였다.
유형원은 31세 떄인 1653년 전라도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사했다.
말년까지 20년간을 이곳에 집을 짓고 칩거했다.
그의 호 반계수록을 저술한 부안 우반동의 계곡을 뜻한다.
1673년 51세로 유향원이 타계했다.
부모가 묻힌 용인이 그의 유택이 된다.
유형원은 7세 떄 서경을 읽다가 발떡 일어나 춤을 추었고, 주역을 꺠쳐 이해했던 신동이었다.
부틴의 억울한 죽음을 젖먹이 때 겪은 그는 진사에 급제했으나, 여러 차례 추천에도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평생 제야로 살면서, 조선의 개혁을 위한 깊고 넓은 궁리를 펼챴고 주위의 가난과 고난을 구제하여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100년 앞섰던, 조선 실학의 조종
그는 조선 후기의 실학 트랜드를 100년 앞서서 주창한 학문적 조종이라고 불린다.
1930년대 조선학(국학)운동이 일어나면서, 실학을 학문의 뿌리로 삼게 된다.
이때 안재홍은 유형원을 '조선학의 창시자'로 일컬었다.
정인보는 그를 '실학의 제1조'라고 했다.
반게수록은, 조선을 혁신할 재도 개혁을 주창하고 있는 책으로 원래 타이틀은 'ㅜㅅ록'이었다.
용인은 부친의 뜻 되새겼던 '유형원의 성소'
'토지를 나누면 인간은 그 안에 존재...만사의 기본'
'반계수록'의 균전론은, 조선 살학의 선구적 통찰
토지개혁론은 '균전론'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고루 나눠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관리와 선비에게는 더 많은 땅을 배분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이 혀교신이 신분제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반데 세력에 대해선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반계수록'에 나오는 균전론은 그 자체가 뺴어난 명문이라 읽으며 곱씹을 만하다.
'인간은 토지를 떠나서 살지 못하고, 토지는 인간이 아니고서는 개간되지 못한다.
그런데 토지는 일정해서 옮겨지지 않는다.
인간은 살고 죽는 일이 부상하다.
그러므로 토지를 기좁으로 하여 그 나눔을 명확히 한다면 인간은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요, 공평하지 못한 폐단도 없다.
토지를 기본으로 삼지 않고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들쑥날쑥함과 새나가는 일을 제대로 살펴낼 도리가 없다.
이것이 다스림과 혼란의 길림길이 되고 만사의 기본이 되는 일이 아닌가' ('반계수록' 중에서)
이 균전론을 바탕으로 병농일치의 원칙을 세웠는데, 보유한 토지의 면적에 따라 군포를 납부해야 한다고 외ㅏ쳤다.
유형원이 주장한 초지 공유의 경자유전 사상은 실학사상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투쟁 구호는 경자유전이었다.
그는 교육 개혁도 주장했다.
한성과 지방의 교육 과정을 통일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공거제를 내놓았다.
토지 제도와 맞물려 국가 전체의 교육을 활성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왕실의 관청들을 축소하여 재정을 안정시키고, 비변사와 좌우의정 제도를 없애며 관직의 임기제를 도입하여 행정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사구시 용인'이 품은, 최고 혁신사상을 만나다
현재의 서울특별시를 내다본 선각자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을 400년 전에 그려 놓다
1949년 조봉암 토지개혁엔 '반계의 구상' 숨어있다
용인특례시, 반계묘역 길 정비로 '문화르네상스' 연다
유형원은 또, 당시 한성부의 행정부를 확장 디자인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놀랍게도 그가 제안한 지역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대부분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또, 수원에 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장조가 수원화성을 세움으로써 이 말은 실현되었다.
그는 북벌에도 뜻을 두어 '기효신서절요'와 '무경초' 등의 병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재발견되는 것은 영조(재위 1724~1776) 시대였다.
영조는 '수록' 26권을 일컬어 '경제 대문자'라고 상찬하면서 재인쇄하여 세상에 알리도록 했다.
왕은 거기에 수록된 경세제민의 제도 개혁을 꼼꼼히 검포하도록 했다.
성호 이익,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진 그의 혁신사상은 실학이란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했다.
이 책을 읽은 성호 이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책(반계수록)을 구해 읽어본 사람들은 책을 덮고 탄복하며 '시무(세상이 펼쳐야할 중요성한 일)을 파악할 수 있는 요결'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손을 모아 귀를 기울여 봐도 한마디 제언이라도 받아들이거나 한 가지 일이라도 시행하여 백생들에게 은택이 미치도록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입으로 칭송하는 것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과 다르고, 공공의 법이란 사사호운 이익에 가로막히기 때문이다.
그 몸(유형원)은 멀리 떠났으되 그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어 생생해 죽지 않았다.
한떄를 기약하지 않고 먼 훗날을 바러보고 있었다'
반계사상에서 조봉암 토지개혁, 한국 근대화까지
반계 유형원의 토지개혁 사상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유형원은 백성들에게 최소 40마지기(약 3헥타르)를 나눠줘야 백성들이 세금을 내면서 살 수 있는 구조가 나올 수 있다고 보인다.
이것이 균전제다.
이후, 성호 이익은 토지 소유 상한제를 주장한다.
너무 많은 땅을 가지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다.한다
연암 박지원은 토지 소유 하한제를 내놓았다.
농민의 절대 빈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산 정약용은 집단농장제인'여전제'를 주장했다.
우물 정자의 가운데 것은 국가에 조세를 내고 나머지 땅은 개인들이 경영하자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만들면서 농지를 개간해 백성들에게 나눠졌다.
국가가 농토를 만들어 무료로 분양하는 방식을 쓴 셈이다.
대한민국 남한은 6.25 직전인 1949년에 농림부장관 조봉암에 의해 토지개혁이 시행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소작농들이 나중에 지주에게 갚는 방식이다.
유형원이 말한 것과 비슷한 규모인 3헥타르 이내의 땅을 곡물로 나눠 냈다.
이런 개혁으로 소작농이 사라지고, 경제의 기초 소비단위가 살아났으며 기업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본다.
토지개혁은, 한국 산업화의 중요한 바탕으로 제공하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유형원은의 '갸혁사상'은, 한국의 근대화까지 뭋밑으로 흘러온 셈이다.
무려 400년 전에, 이 땅의 토지개혁을 주창한 실학자,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면서 한국 근대화의 기틀을 닦은 놀라운 선각자가 반계 유형원이다.
반계 묘역 진입로 정비
유형원은 생전에도 틈만 나면 용인의 부모 유택을 방문해, 삶의 근본을 새겼다고 한다.
용인 지역 사회에는 백암을 중심으로 '백암반계숭모회(회장 호아규열)가 생겼다.
2016년 백암의 축제인 '백중문화제'에서 는 반계숭모회 이름으로 '백암농민상'을 제정해 시상하기 시작했다.
반계묘역은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 28-1번지에 있다.
용인특례시는 2022년 10우러부터 반계묘역 진입로 정비(경기도 기념물 제32호,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를 위한
사업 검토에 들어갔다.
이곳을 반계의 '담대한 국가혁신 의지'를 기리는 명소로 가꾸는 일은, 그 은택을 입은 겨레붙이로서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용인이 뽑은 '혁신 정신의 큰 인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참된 혁신은 무엇인가.
실사구시와 실학은, 현실을 정확히 읽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세상과 삶을 바르게 세우려는 집념과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유형원 정신은, 바로 지금 용인이 가고자 하는 '현실적인 혁신의 길을 가리키는 가치 있는 문화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용인소식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