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번째 편지 - 유불리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
"저는 가끔 조기 은퇴를 꿈꿉니다. 너무 오래 유불리를 따지는 세상에서 살아 그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유불리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꿔 이야기하는 태도들입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유불리로 이야기하면 더 낫겠습니다."
지난주 어느 오너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유불리의 세상에서는 어떤 결정이 사업적으로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를 기준으로 따집니다. 반면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는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기준으로 따집니다.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저는 30년간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는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여 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의, 즉 옳고 그름을 직업의 가치로 내세우는 직업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법조인이 그중 하나입니다.
직업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니 일상의 삶에서도 옳고 그름이 판단의 제1순위였습니다. 이런 관점 때문에 아내와 자주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저는 옳고 그름 이외의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오래전 어느 법무부 장관께서 취임식에서 검사는 반드시 검은색 양복을 입어야 하고, 넥타이 색깔도 튀면 안 되고, 반드시 끈이 있는 검은색 구두를 신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이 생각하는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처럼 엄중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저 같은 검사들은 이런 분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색깔은 정의의 상징인 <흰색>과 불의의 상징인 <검은색>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때로 회색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검정과 흰색이 주류를 이루는 무채색의 세상만 알고 살았습니다.
법무연수원장 시절, 건물 인테리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인테리어를 담당했던 분이 법무연수원 강당 앞에 있는 기둥에 멋을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만든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둥은 흔한 검은색 네모 기둥이었습니다. 그 기둥 아래쪽에는 밑변이 넓은 삼각형을, 위쪽에는 윗변이 넓은 삼각형을 대어 기둥을 사선으로 만들고 그 기둥에 빨간색을 칠했습니다. 저와 간부들은 그 빨간 사선 기둥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이것은 검찰의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늘 반듯하여야 하는 저희와는 달리 기울어져 있고, 무채색도 아니고 유채색, 그 유채색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빨간색이었습니다. 검찰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그 무엇이 강당 입구 정중앙에 설치된 것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너무 멋있다는 반응이 주류였습니다. 저는 그때 세상에는 무채색 아닌 유채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직선 말고 사선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사는 이처럼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만 삽니다. 그러나 그들이 퇴직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세상은 옳고 그름이 차지하는 영역보다 더 큰 영역을 유불리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 유능한 검사를 한 분이 재벌 총수인 장인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사직을 하고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6개월 동안 한 건도 결재하지 못했답니다. 대부분의 사안이 탈법이나 불법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업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유불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분은 이것을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 지대가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중간 지대에 속하는 결재 안을 판단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유불리로 돌아가는 면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불법의 선만 넘지만 않으면 유불리를 기준으로 사안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교적 가치관이 몸에 밴 우리는 사안을 유불리로 판단한다고 하면 무엇인가 좀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치환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편지 서두에서 소개한 그 기업인의 고민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유불리의 문제를 솔직하게 유불리로 이야기하면 서로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을 텐데 체면 등의 이유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 타협의 지점이 없어지고 대결 국면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로 둔갑합니다. 사실의 영역이 믿음의 영역이 되어 종교화하는 것입니다. 팬덤은 믿음을 먹고 성장합니다. 연예인, 정치인 등 팬덤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팬덤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우상화하고 비판의 여지를 봉쇄해 버립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그 영역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정치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탄생한 배경도 어떤 정책이 우리에게 행복과 이익을 많이 주느냐를 계량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익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관점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정당이 생기는 것이죠. 정당은 지지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법조인이 정치 영역에 들어가면 그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치환하여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팬층이 생기면 정치인의 생각은 절대적인 것으로 바뀌어서 신앙화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타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 미국 대선후보 트럼프를 향한 총격이 있었습니다. 정치가 신앙화되어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등 세계 곳곳이 이런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병으로 진입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결국 이 병이 위중해지면 그 병으로 우리는 자폭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를 자폭시키고 폐허 위에 새로운 질서를 재건하곤 했습니다.
저는 검찰을 떠나 변호사 이외에 사업을 한 지 13년이 흘렀습니다. 사안을 옳고 그름 이외에 유불리로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처음보다는 많이 유연해졌지만 여전히 제 머릿속에는 옳고 그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국 정치에 검사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보다 세상을 훨씬 더 유연하게 보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으니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