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천붕지통(天崩之痛)
[1]
불빛은 한 석전(石殿)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다.
긴 암로(暗路)는 지하로 이어져 있었고, 끝 부분에 하나의 방대한 석전이 자리잡고 있
었던 것이다.
북리뇌우는 석전 앞에 이르자 뚝 멈추어 섰다. 마음은 더없이 급하면서도 선뜻 들어설
수가 없는 그였다.
석전에는 평소와는 달리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은 그런 느낌이 아니라 그가 연상하는 최악의 사태, 혹시라
도 맞이하게 될지 모를 대사부의 죽음이었다.
'설마 그 일까지는......!'
북리뇌우는 애써 부정을 하면서도 숨통을 조여오는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한차례 심호
흡을 해야만 했다.
이윽고 그는 석전 안으로 들어섰다. 내키든, 아니든 직접적 부딪쳐 보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으므로.
석전의 내부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기운이란 암울
하고도 섬뜩한 살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진작부터 북리뇌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자에서 뱀의 그것처럼 차갑고 소름이 끼치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리뇌우는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냉정할 정도
로 이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무심한 표정으로 검은 그림자를 마
주 응시했다.
석전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정체불명의 괴영(怪影).
그 자는 흡사 얼음으로 깎아 빚은 듯 냉막한 얼굴에 한 올의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은
비정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상대를 질식시킬 듯한 사기(邪氣)를 피막처럼 전신에 두른 그 흑의인은 다름 아닌 지
옥사인(地獄死人)이라는 자였다.
바로 얼마 전 거대한 선박 안에서 광오하기 그지없는 황포인과 함께 있던 그 위인이다
그렇다면 그 자가 이 곳에 와 있는 이유는 불을 보듯 뻔했다. 북리뇌우를 제거하기 위
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옥사인의 뒤로 또 한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의를 걸친 중년인으로 석벽에 힘겹게 기대 서 있었는데, 잿빛이 되어 있는 안
색으로 보아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가운데서도 본래 지니고 있던 기
도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물처럼 담담하면서도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진들 꿈쩍하지 않을 당당함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를 보자 북리뇌우는 신음처럼 읊조렸다.
"대사부(大師父)......!"
자의중년인.
그는 십 년 전 표류하는 배에서 북리뇌우를 구했던 십방무림통사단의 총사(總師) 북리
무해(北里武海)였다.
"뇌우...... 네가 왔구나."
북리무해는 굳어진 채 할 말을 잃고 있는 애제자를 향해 간신히 안면근육을 움직여 미
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시기가 영 좋지 않으니...... 이를 어쩌지?"
말을 하는 그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마도 극심한 내, 외상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북리뇌우는 존경해 마지않는 대사부의 그런 모습을 대하게 되자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북리무해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대사부, 제가 있으니 안심하시고 속히 요상부터 하십시오. 호법(護法)을 서겠습니다.
그러나 북리무해는 손을 저어 만류했다.
"아니다. 이미 늦었느니라......."
그는 말과 함께 석벽에 기댄 채 허물어지듯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
람에 그가 등을 대고 있던 석벽에는 선열한 핏자국이 세로로 길게 그려졌다.
그 광경을 본 북리뇌우의 안면에서 한차례 거센 경련이 일었다. 아무리 드러내지 않으
려 해도 그 이상은 도저히 들끓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리뇌우는 지옥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지옥사인은 냉막한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그어 보였다.
"이제야 너와 상면을 하게 되었구나.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북리뇌우는 그를 마주보며 무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근 들어 정사파의 구별도 없이 무림을 마구 휘저어댄 것도 모두 그대와 연관이 있
는 자들의 소행이겠지?"
지옥사인은 칼날처럼 차디찬 웃음을 입가에 베어 물었다.
"그것은 너를 찾아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북리뇌우는 실소했다.
"나 따위가 무엇이라고?"
"솔직히 너는 스스로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그렇기에 십 년 전에도 내
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지. 그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기적이다."
"후후후, 그대는 나를 높이 보아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있군.
지옥사인은 그 말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어쩌면."
북리뇌우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 역시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할 말이 더 있을지 모르나
잠시 기다려 주어야겠다."
"좋을 대로. 내게 있어 기다림이란 곧 생활이었으니까."
"후후후, 그것도 자랑인가?"
북리뇌우는 비웃음을 흘리는 한편, 대사부인 북리무해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지
옥사인은 약속대로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북리무해는 체내의 진기가 완전히 고갈된 듯 핏기 한 점 없는 얼굴로 천하에 하나뿐인
제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이 순간에도 진한 애정이 깃들여 있었다.
북리뇌우는 가슴이 저려와 감히 그 눈길을 마주 대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란 묵묵히 죽어 가는 사부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주입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북리뇌우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사부가 되살아날 희망이란 실낱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그의 심중을 들여다본 듯 북리무해가 나직이 말했다.
"애쓰지 말아라. 죽음이란 결코 비극만도 아니다. 할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떠나는 것
이 애석할 뿐......."
"대사부......."
"걱정되는 건 너다. 부디 지옥잔륜도(地獄殘輪刀)를 조심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북리뇌우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그는 핏물에 절어 있는 사부의 손을 움켜쥐어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북리무해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을 이었다.
"자, 시간이 없구나. 네게 두 가지 부탁을 하겠다."
"말씀...... 하십시오."
가까스로 입술을 뗀 북리뇌우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색이 깃든
북리무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로서는 가히 천붕(天崩)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십방무림통사단의 총사직을 맡아 주어야겠다. 이 물건을 보이면...... 모두가
나를 대하듯 너를 따를 것이다."
북리무해는 품속에서 진귀한 녹옥(綠玉)으로 만들어진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북리뇌우
의 앞에 내밀었다.
녹옥검은 손잡이에 정교하고도 신비한 안개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투명한 빛을
발하는 검신(劍身)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녹옥통사령(綠玉通社令)>
이르자면 녹옥검은 십방무림통사단 내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의
신물이었던 것이다. 필요할 시에는 단주(團主)를 대신하기도 한다.
북리무해는 만감이 교차되는 듯한 시선으로 녹옥통사령을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심중의
말을 전했다.
"제룡과 나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너에게 물려줄 날을 기다렸었다. 그 때가 지금이라
니...... 미안하구나."
북리뇌우는 격동을 눌러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부질없습니다. 대사부가 계시지 않는 십방무림통사단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울부짖는 그 음성을 들은 북리무해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진 것은 준엄한 질책이었다.
"어리석은! 고작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너는 필히 십방무림통사단의
총사가 되어...... 내가 못 다한 일들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래도...... 거절하겠느냐
?"
힘이 부치면서도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그의 앞에서 북리뇌우의 고개가 절로 푹
꺾였다.
"용서하십시오, 대사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북리무해는 표정을 풀고 화제를 돌렸다.
"두 번째로 부탁할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만 너에게서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말씀은......?"
북리뇌우가 묻자 그는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날...... 아비라 불러줄 수 있겠느냐?"
"아!"
짧은 탄성 뒤로 북리뇌우의 입에서는 어렵지 않게 북리무해가 원하는 소리가 튀어나왔
다.
"아버님."
"오오! 고맙구나, 내 아들......."
북리무해는 삶의 불꽃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감격해 마지않은 듯 새로 얻게 된 아들의
손을 힘주어 거머쥐었다.
그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인연을 사제지간에서 부자(父子)로 바꾸는 형식은 늦어도 한
참 늦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실상 북리뇌우라는 존재는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북리뇌우를 거두던 그 순간부터 자식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성
(姓)을 붙여 주기도 했었다.
"아버님......."
북리뇌우는 그의 앞에서 결국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반면에 북리무해는 메마른 입
술을 열어 말했다.
"아들아, 나는...... 더 바랄 것이 없구나."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정말로 그는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 위로 북리뇌우의 눈물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우우우......!"
소리 죽인 그 울부짖음에는 통한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북리무해 자신은 아무런 여한 없이 세상을 떠난다고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는
아직 죽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은 타살(他殺)이나 진배없었으며,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북리뇌우가
제공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북리뇌우가 이 순간에 느끼고 있는 감정이란 상실에서 비롯된 슬픔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자(死者)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창백한 그 얼굴에 감도는 미소는 마치 이
렇게 타이르는 것 같았다.
다. 절대 자책 따위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아비가 원하는 바가 아니야....
....
"아버님......!"
북리뇌우의 입에서 그 호칭이 다시금 울려 나왔다. 이는 어쩌면 북리무해의 부탁이 없
었어도 종국에는 그가 자발적으로 쏟아 놓았을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가 오열하고 있는 동안 북리무해의 모습이 뜻하지 않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
했다. 청수한 중년인에서 서서히 주름진 노인의 얼굴로 변해 갔던 것이다.
윤기 흐르던 흑발도 금방 새하얀 백발이 되어 버렸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본연의 모
습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으음......."
북리뇌우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길게 신음을 발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평범
한 노인으로 화해 있는 북리무해의 시신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편히 가십시오. 어떤 모습이시건 소자(小子)는 아버님을 천하의 누구보다도 존경합니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 습니다
아버님!
굿밤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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