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중섭(0425), 가짜화가 이허중, 그리고 나
이중섭은 일제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천석꾼(연간 소출 곡식이 천 석 정도되는 부자. 현재 가치로 50억원~100억원 정도. 토지 자산 가치 포함)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나 자신이 식민지 백성이라는 사실도 잘 느끼지 못한 채 일본 가서 일본 여자 사귀며 잘 먹고 잘 살았다.
하지만 해방된 북한에 공산정권이 서면서 이중섭 일가는 부르조아로 찍혀 재산을 갖고 있던 형이 행방불명되고(공산당에 잡혀간 듯), 이어 육이오전쟁이 터진다.
이중섭은 어머니와 형수 등을 북한에 남겨둔 채 처자와 큰조카만 데리고 피난선을 탄다.
전쟁 중 화가란 ‘먹고살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견디다 못한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친정에 보내고 홀로 남아 몸부림치다가 40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물론 생활에 관해 그는 무능했다. 일자리도 못구하고, 돈 만드는 게 뭔지도 몰랐다. 필요하면 어머니에게 말하고, 형에게 말하면 줄줄 나오던 돈이 어느 날 가문 논바닥마냥 바짝 말라버린 것이다. 그는 부잣집 자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용 빼는 재주가 있지 않고는 이런 시국에서 종이 되지 않고 제 정신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말년에 정신병이 겹치면서 작품에 깊은 흔적이 남았지만, 오늘날 수십억 원씩 하는 그의 작품조차 당시의 생계를 온전히 지탱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인물 이허중.
육이오전쟁 중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러다 친일독재정권이 서면서 이승만(1120)에 붙은 깡패들의 꾐에 넘어가 남의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화가가 되고, 이어 4.19혁명과 5.16쿠테타의 거친 물결 속으로 빨려들어가 기어이 죽고 만다.
이허중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공식으로 삭제되었으며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 , 그런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이 흔했다. 내 형들과 숙부들 모두 거친 시대를 거쳐 갔다. 이름 석 자 남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아버지는 스무 살에 징용되고 , 숙부는 스무 살에 소위가 되어 전쟁터로 나갔다 석 달만에 전사했다.
나 이재운(함평 李씨, 載 항렬, 클라우드 雲)이라고 별 수 있나.
육이오전쟁이 끝난 지 5년 뒤에 태어나 4.19혁명과 5.16쿠데타 시기를 지났다지만 당연히 기억에 없다. 유신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박정희(0555)가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기쁘게 웃고, 전두환의 반짝이는 대머리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겹게 보면서 대학을 다녔다.
우리 말과 글이 쓰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뭘 모르고 소설가가 되었다. 대학 다니면서 소설을 전공할 때도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
우리 말과 글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충청도 사투리 쓰며 자랄 때는 그 말이 표준어인 줄 알았으니까). 중국과 일제 잔재인 한자어와 외래어에 오염된 언어 환경, 그 속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우리말의 한계를 진작 깨달았더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영어로 글을 쓸 걸 하는 후회도 해보았다.
점차 우리 역사와 한국어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 내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당대의 소설들은 시간이 흐르면 생명력을 잃고 허섭스레기가 되고 말 운명이지만, 언젠가 올 내 시절을 위해 우리말 사전 만들기와 바이오코드 연구에 돈과 시간을 쏟았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내가 쓰는 말의 절반은 일본식 한자어였다. 결국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일제의 쓰레기다. 안쓰려고 노력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미국에 가면 할 수없이 영어 써야 하고, 중국에 가면 할 수 없이 중국어 써야 하듯이 지금은 그들과 내가 함께 쓰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판을 바꿀 때마다 더 쉽게, 더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지만 끝이 없다. 2000년쯤에 나온 우리나라 소설 대부분이 2050년쯤의 독자들에게는 거의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1919년의 독립선언서를 현대인들이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니 내 작품 중 운이 좋아 살아남는 것이 있다 해도 후손들은 고치고 다듬은 새 글로 읽지 않으면 아마도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100년 밖에 안된 기미독립선언서도 읽지 못하며, 당시 최남선, 이광수가 쓴 쉬운 소설조차 원본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지금 출판되는 그들의 소설은 요즘 언어로 꼼꼼하게 윤문한 것들이다. 일제 때 나온 소설도 편집자가 다듬어주지 않으면 출판이 불가능하다. 김소월의 시도 마찬가지며, 내 스승 서정주의 시도 마찬가지다.
난 우리글로 쓴 좋은 문장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원 다니던 시절 한글로 쓴 논문은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 이후 가진 내 확신이다.
문학을 한창 배우고 쓰던 대학 시절에 이오덕(0155, 1925년 11월 14일)씨가 쓴 책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유명한 작가들의 소설이 논리와 상식과 과학과 문법으로 난도질당했는데 차마 읽을 수가 없었다. 당시 나를 가르치는 교수들의 작품도 이오덕 씨에게 사정없이 비판당하였다.
특히 시의 경우 대개 거짓말이 너무 많다. 그때부터 나는 사실만 쓰는 것, 정확하게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름답기만 한 글이나 감상에 젖은 글은 쓰지 않았다. 특히 심리학이나 두뇌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채 어줍잖게 심리묘사를 펼치는 건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 우정, 의리, 충성심 같은 감정 따위는 결코 묘사할 생각이 없었다. 인간의 내면을 감상으로 포장하는 소설은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는 가짜 감정에 기대는 대신, 탄탄한 스토리와 플롯이라는 뼈대 위에 두뇌과학과 탄탄한 구조의 진실을 얹는 방식으로 많은 밀리언셀러, 베스트셀러를 써온 내 창작관은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지금도 바이오코드를 연구하느라 오랜 시간 두뇌과학에 대해 공부했지만 심리묘사는 피한다. 어차피 거짓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독자를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역사소설을 많이 쓰다보니 그만 몰라도 될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았다. 우리 역사와 남북한 문제, 일본과 미국, 중국, 그 속에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위태로움을 알았다. 동학농민항쟁, 여수순천반란사건, 4.3사태, 6.25전쟁, 광주항쟁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집단광기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구나 나는 바이오코드 때문에 몰라도 될 남의 속마음까지 들여다 보면서 더 불편하게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불편하고 시시각각이 불안하다. 이도 싫고 저도 싫다.
그러고 나니 친일파로 몰린 내 스승 미당 서정주(0330) 선생님이 얼마나 고단한 시대를 살았는지 이해가 된다. 나머지 스승들은 아예 작품이 읽히지도 않으니 말할 것도 없다. 당시 하늘같이 모시던 스승들의 작품이 오늘날 전혀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내 세계가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때 이래라 저래라 까불거리던 선배작가들 역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밀리언셀러 작가, 내 또래 가운데 가장 많이 중앙일간지 연재소설을 쓴 나조차 그렇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내 소설이 살아남는다면 글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와 플롯 때문일 것이다. 스토리는 내가 공부한 힘으로 나온 것이고, 플롯은 나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세월이 가도 더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사전을 더 만들어야지, 바이오코드와 브레인리퍼블릭을 더 열심히 다듬어야지 생각한다.
세상 너머의 커튼을 살짝 열어본 뒤로는 소설가만으로 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