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더 주 : 역사를 제대로 봐야 합니다..^^....그러면 뭐가 쓰레기인지 진주인지 알게 될 것이죠....아래 글 좀 깁니다....그러나 지루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속고도 정신 못차린 민족과 국가는 천하대란으로 소멸됩니다.
역사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살아남는 자가 선 그 자체입니다.
역사에 대해 무지몽매한 자는 역사에서 사리지는 천벌을 받게 됩니다.
진정한 "역사"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름하여 "인과응보"....라는 진리죠.....ㅎㅎㅎ]
1. 민족을 두번 죽이는 친일 단죄론
지금에 와서 50년 전의 친일에 대한 단죄론이 대두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무지에 기반한 부화뇌동이요, 또 하나는 음모이다. 여기서 무지라 말하는 것은 역사와 일제시대의 의미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일제시대의 친일행위에 대한 비난과 단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반대할 이유가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리고 친일 단죄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몹시도 놀라워하는 것 같다. 놀람과 동시에 분개한다. 친일파 단죄에 반대하면 무조건 매국노, 사대주의자, 수구꼴통, 혹은 정신이상자로 단정짓는다. 나도 30대 초반까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구름은 소싯적에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민족주의자로 자처했다. 오히려 국수주의자에 가까웠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역시 남달리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때의 그런 정서야말로 젊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이가 들면서 좀더 사유가 깊어지고 보다 폭넓은 공부와 사색의 기간을 많이 가지게 됨에 따라 이 사안이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 단정지어 말하기 어려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라를 외국에 빼앗긴 결코 짧지 않은 36년의 힘들고 참담했던 세월 동안 2천만명에 달하는 조선 민족이 각자 자기의 위치와 입장에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발걸음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여정에는 2천만이라는 사람의 수보다 몇 갑절 많은 곡절과 사연과 이면이 있을 것이다. 어떤 전지전능한 신도 한 인간의 인생을 심판하여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이분할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그 정도 오랜 세월 동안의 그 정도 수많은 사람의 행적에 대해 선악과 시비를 분명히 가릴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기준과 잣대를 만들어 재더라도 그것에는 무리와 억지가 개입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자칫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을 두 번 죽이는 우매한 짓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누가 친일파였는가를 가려서 확인하고자 하면 친일파가 아니었던 사람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시 조선인으로서 지식이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상위 그룹에 속했던 사람들 중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우리가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장삼이사가 당시를 어떻게 살았는 지는 논외로 치자) 해방 직후에 겨우 빌려 탄 비행기에서 여의도 모래사장에 초라하게 내린 그야말로 한줌도 안 되는 임정 요인을 제외하고는 반일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던 인사는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명백한 사실은 자칫하면 우리민족의 자괴심과 열등감과 자학의 만성적 원인으로 침잠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 민족의 치부를 들쑤셔서 공연히 모멸감을 되씹는 어리석은 짓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줌도 안 되는 임정의 요인, 해외의 독립투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국내에 있다가 친일로 전향하고 친일 행각의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불행했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애국심이 투철하다거나, 더 저항정신이 강고하다거나 더욱 신념과 인내력이 뛰어났다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들과 친일전향자들의 차이점은 일본의 직접적인 힘 앞에 노출된 상태이냐, 아니면 일본의 힘이 당장에는 미치지 못하는 외국 땅에 있었느냐의 차이로 봄이 더욱 옳다. 친일전향자들 중 아마도 대부분은 운이 좋게도 중국이나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면 광복의 그 날까지 자랑스럽게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임정 요인이나 해외 독립투사들 중 누구라도 국내에 남아 있었다면 치욕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최남선, 이광수, 김활란, 한용운, 조만식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이 크던 작던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특별한 사람들조차도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는 반증이다. 일본의 강압과 강요만이 요인이 아니라 전쟁의 추이가 어떻게 되어 가는 지 알 수 없이 정보가 차단되었다는 것과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 고립된 상태의 한계로 인한 전황의 오해가 친일 전향의 주된 이유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한두달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곧 전쟁에 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국내에는 없었다.
독일과 일본은 패망의 과정이 달랐다. 독일은 동으로는 소련군, 서로는 미영연합군이 밀물처럼 진격을 계속해서 마침내 엘베강에서 만나고 베르린이 함락됨으로서 나치는 종말을 고했다. 패망한 시점에서 독일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했던 1945년 8월 15일 그 날까지도 만주 전체와 중국의 주요부 전체,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 전부와 말레이반도, 자바 보르네오 등의 석유 자원 지대를 점령하고 있었고,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병력은 약 7백만에 달했다. 일본은 여전히 자기 나라 영토의 열배가 넘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백만 대군이 건재한 상태였으며, 그들의 사기는 조금도 저하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은 원자탄 두발을 맞고 졸지에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은 이미 해공군력이 궤멸되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된 상태였지만 국내의 지도급 인사들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여전히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의 건재만이 눈에 보인 것이었다. 최후의 승리는 연합군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여도 그 날이 10년 후일지 20년 후일지 알 수 없는 암흑의 세월이었다.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 항일지사들이 절망한 나머지 지조를 꺾고 무릎을 꿇은 데는 이와 같은 철벽의 시대적 절망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해외의 지사들말고는 끝까지 독립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와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을 본다. 프랑스와 조선은 결코 같이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다. 프랑스는 바로 한세대 전만 해도 독일과 싸워 이긴 승전국이며, 그 기술과 과학과 문화와 국력과 군사력에서 세계 굴지의 대국이요 열강의 하나였다. 짚신이나 삼고 삼베나 짜고 밥그릇이나 구워내는 기술 외에는 어떤 기술도 갖고있지 못한 상태에서 총 한방 쏘지 못하고 서류상의 합방으로 나라가 소멸되어버린 조선의 경우를 프랑스와 비교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어불설성이다.
그리고 프랑스는 인접한 영국의 BBC 방송이 희망을 부추기고 투쟁을 고취하는 선전을 연일 해대었고 전지구적인 전황을 신속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독일이 패망하리라는 것은 지식인 아니라도 누구나 감을 잡을 수가 있었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몇 년만 참으면 고난이 끝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인들 중에 나치 협력자가 수십만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독일의 점령기간이 36년 동안 지속되었다면 그래도 프랑스인 중에 대독 빨치산이 남아 있었을까? 그래도 대독항쟁의 신념을 꺾지 않고 독일에의 협력을 거부하는 프랑스인이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을 지는 의심스럽다. 아니 독일이 그런 프랑스인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겠는 지가 의심스럽다.
조선인의 경우, 결론적으로는 대부분의 지사, 인망가, 지식인들이 일제에 투항을 했을망정 그 과정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실로 그 어떤 민족도 하지 못 했던 정도의 치열하고 끈기있는 항쟁과 저항의 기개를 충분히 과시했다. 우리는 일제시대의 친일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친일 행각을 이유로 당시의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친일 단죄를 말하면 안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각자의 친일이 진심이었는지 자발적이었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심이고 어느 정도 자발적이었는지는 본인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 어느 정도로 고뇌하고 번민을 한 끝인지 그건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친일 행적을 보인 사람이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됐던 해방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조국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조국을 위해 헌신하리라고 각오하는 것이 결코 이율배반적이거나 자기모순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인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자기가 했던 일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슴속에 안고서 새 조국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의 애국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진정을 믿지 않는다. 이건 너무나 편협하고 단편적인 마녀사냥이나 마찬가지다.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고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광복된 조국의 간성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데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그 어떤 나라, 어떤 시대의 군인들에도 뒤지지 않는 모범적인 군인의 길을 걸었다. 대한민국의 법조계는 일제시대에 판검사를 했던 사람들이 틀을 잡았고, 대한민국의 언론은 덴노헤이까 만수무강을 축원했던 그 신문사들이 민족의 정론을 실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의 학계는 일본인 교수들을 스승으로 삼아 동경대, 게이죠대를 다녔던 그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 학장이 되고 총장이 되어 새 조국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들의 새 조국에 대한 충성과 애정과 헌신이 과연 위선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애국자들이었고 그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 친일했던 사람들이 각계에서 헌신하고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경험했으므로 그들이 앞서 이끌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인가? 천만에.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궁벽하고 가난했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라서 있다. 신식 총 한 자루 없던 나라가 세계 5위의 군사 대국이다. 누가 만들었나? 조선민족 전부가 노력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리더 그룹들은 대부분이 친일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제 와서 친일파를 단죄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대부분의 주인공들을 매국노, 파렴치범, 위선자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 역사적 정당성에 흠집을 만드는 통탄할만한 우매한 짓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 오매불망 그렇게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김정일 일당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묘한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를 척결했다고 주장하는 항일 빨치산들이 지도한 강성대국 조선은 민족의 수치이다. 친일파들이 일제한테서 배운 지식과 기술과 경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가 조선민족의 자랑이다. 전 세계에 당당할 우리의 모습에 오욕을 가하지 말라. 우리의 자랑스런 얼굴에 스스로 침뱉지 말라. 암울했던 고난의 시기에 우리를 위해 눈물을 삼켰던 우리 부모님들을 더 이상 욕하지 말라. 친일한 사람들? 그 전부가 우리의 부모들이다. 부모가 친일하지 않은 사람의 자식은 우리들 백명 중에 한 명도 안 된다. 소극적 의미에서는 당시 조선인의 95%는 친일했다. 살기 위해서, 굶지 않으려고, 일본인들한테 아부하고 굽실거리며 살았다. 그들이 전부 우리의 부모들이다.
우리가 누구를 욕하는 것인지를 돌아보라.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필설로 다 못할 고난과 고통의 시대를 신음하면서 살아가신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들이다. 당신들 눈에는 그 부모가 가증스럽고 한심하고 매국노로만 보이나, 내 눈에는 당당하고 부끄럼 없는 조선의 어버이로 보인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내 온몸을 던져 변호하리라. 그들에게 날아오는 돌이 있다면 내가 대신 맞으리라.
민족을 두 번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우리 부모님 가슴에 못박는 짓을 하지 마라. 일제 36년은 입으로 떠들 것이 못된다. 조용히 가슴에 묻고 각자가 생각하면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애쓸 따름이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는가를 따질 일이 아니고,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매국노인지 가릴 일도 아니다. 그런 치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모두 단결해야 했고, 과거를 불문하고 새 조국에 필요한 능력과 인재는 총동원해야만 했다.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우리가 오늘 어찌 되었을까? 북쪽을 보면 그 답이 있다.
2 친일파들이 구한 나라
해방 후 우리나라 해군이 보유하게 된 최초의 군함은 백두산함이다. 함번호는 701이었다. 미국에서 사용할 때는 함(艦)으로 끼워주지도 않는 정(艇)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잠초계정이다. 영어로는 'Patrol Craft', 줄여서 PC라고 부르는 종류이다. 한국에 팔리기 전에는 미 해군 PC823호정이었다. 군함다운 배 한 척 없던 신생 조국의 해군은 국민들이 피같은 돈을 모아준 성금으로 군함 보유의 비원을 풀 수 있었다. 당시 돈으로 국민들이 1만 5천불을 모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떨리는 손으로 4만5천불이라는 거금을 꺼내주었다. 그야말로 국고가 휘청거린 지출이었다. 미국이 2차대전 중에 불과 3년 동안 자그마치 361척이나 만들어 대서양과 태평양에 뿌려대다시피 한 초계정 한척의 구입을 위해서 온 국민이 코묻은 동전까지 각출하여야 했다. 참모총장 이하 전 해군 장병들이 월급의 10%를 각출하였고,. 해군 장교와 부사관들의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해서 돈을 모았다.
그 배를 인수하러 간 우리나라 해군 요원들이 49년 12월 29일, 뉴욕항의 8부두에서 명명식을 할 때 마스트에 태국기가 올라가는 동안 장면 대사와 인수단장 손원일 제독, 그리고 축하하러 모여든 우리 교포들이 모두 함께 울었다. 오는 중간에 하와이의 호놀룰루항을 들렀을 때는 역시 교포들이 나와 눈물로 마중했다. 하와이 교민들이 누구인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떠나 사탕수수농장의 노예로 팔려온 한국인들이었다. 조국의 군함이 온다는 소식에 보러 나온 교포들은 매일 같이 보아 눈에 익은 미해군의 엄청난 군함들에 비해보면 조각배 같은 조그만 초계정인 것을 보고 실망도 하였지만 그 뱃전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고 어찌 눈물이 나지 않았으랴. 백두산함이 하와이를 떠날 때 승조원도 울고 교민들도 울고 그렇게 백두산은 우리 해군의 첫 군함으로 태평양을 건너 어머니품 같은 진해만에 안기어 들었다.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인수해서 몰고 돌아온 박옥규 중령이 해군의 2대 참모총장이다. 그 뒤를 이은 2대 함장이 최용남 중령이었다. 최용남 함장이 지휘하는 백두산함은 6.25가 발발한 그날 진해만에서 출동, 동해안을 북상하다가 부산 앞바다에서 북괴의 1천톤급 무장 수송선을 만나 치열한 포격전 끝에 침몰시켰다. 수백명의 특수부대원을 태운 북괴의 수송선이 만약 부산항에 상륙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군수지원항인 부산을 교란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한국전쟁의 판도는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대한해협 해전이라 부르는 이 전투에서 백두산함의 분투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배에 장착된 무장은 포탑도 없는 벌거숭이 3인치 포 1문과 40밀리 고사포 1문이 전부였다. 돈이 없어서 실탄 사격을 못해본 지라 그 날의 전투에서 처음으로 포를 쏘아본 장병들이었으나 충무공의 후예로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고, 이겼다. 그리고 그 승리가 조국을 구했다.
최용남 중령이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진보 세력들이 싸잡아 친일파라 부르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다.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된 지 몇 달 후에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가 그런 것처럼 덴노헤이까에 충성을 맹세하고 황군의 장교로 임관된 그의 부친은 고향 평안남도 구성군에서 알려진 애국지사이다. 일본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 장교가 된 조선인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기구하고 각양각색으로 일본군의 경력만으로 친일, 반일, 애국, 매국으로 구분하다가는 큰 일 생긴다. 최용남 함장이 해방 후 월남해서 자신의 진로를 상의하고 의논을 드렸던 사람이 친일매국신문 조선일보의 사장 방응모였다. 방사장은 그에게 해군에 입대해서 조국의 해군을 건설하는데 한 몸을 바쳐보라고 권유했고, 최용남은 그 말에 따라 해군에 입대했고, 한국 해군 최초의 군함인 백두산함의 함장에 취임했다. 나이 26살 때이다. 그리고 그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고, 나중에 세계가 떤다는 대한민국 해병대를 만들었다.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그가 한국 해군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천황에 충성을 서약하고 황군의 소위로 임관된 사람이 매국신문 조선일보의 추악한 매국노 방응모 사장과 의논을 하고 그의 권유를 따라 해군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매국노들의 덕분에 이나마 살만한 조국에서 숨을 쉬고 있다. 나는 그 친일파 매국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존경을 바치며 산다. 그런 친일파는 너무나 많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구름이 어찌 살고 있을까 싶은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나는 너무나 민망스럽게도 일제의 법관을 했던 사람, 일제 때 대학교수를 했던 사람, 일제 때의 신문기자들, 일제 때 돈벌었던 기업인들, 일제의 경찰, 일본군 장교였던 분들의 은혜를 입어 자유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뭐라고? 친일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든다고? 그것은 누구도 못 만든다. 이 조국의 은인들을, 우리의 부모들을 니들이 무슨 수로 구분하고 무엇으로 재단을 한다 말이냐?
3 참군인 김종오장군을 생각하며
羊의 가죽이 호랑이 가죽의 문채가 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 한다.
한 두 城을 수복한 것은 나의 처음 품은 뜻이 아니고
자리 한 장의 좁은 땅 治安한 것이 어찌 명예 되겠는가
조국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감히 이 몸을 軍幕에 드러내어
胡敵을 물리쳤으나 이 어찌 나라에 입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 될 것인가?
이것이 누가 지은 시인 줄 아는가? 만주벌판을 말달리며 왜놈들과 싸운 독립군 대장의 시냐? 아니다. 그렇다면 민주와 개혁의 용사들인 386 세대 중에 장교가 된 어떤 이가 지은 호국시일까? 그것도 아니다. 친일 매국노, 덴노헤이까의 총알받이 견습사관 출신 대일본육군 장교로 복무했던 김종오장군이 서른세살 나이에 제1군단장으로 재직할 때 쓴 시다.
구일본 황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거기서 소위 계급장 달고 해방을 맞은 새파란 군인들이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이십대에 사단장. 삼십대에 군단장을 했고 마흔도 안된 참모총장이 나왔다. 전부 다 자랑스러운 대일본육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심지어 만주사관학교 출신 한 사람은 장장 18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근대화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누가 김종오 장군을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고 친일파니 하고 비아냥거린다면 그는 대한민국에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김종오 장군이 일본 동경의 주오우 대학에 다니고 있던 1943년,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동경 유학생회관에서 재일 조선 학생들을 상대로 성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시국 강연회를 했다. 육당이 누군가, 기미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33인의 한사람이다. 춘원은 누군가?1919년 2월 8일에 재동경 조선인유학생들이 유학생 회관에서 '조선독립선언'을 부르짖은 '2.8독립선언 사건'에서 그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다. 당시 춘원은 와세다대생이었다. 2.8 독립선언은 곧바로 3.1독립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2.8과 3.1의 선언서를 초안한 두 영웅이 동경에 나란히 나타나 황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성전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 강연회는 아수라장이 됐고 춘원과 육당의 변절에 분노한 유학생들이 항의를 하다가 일경에게 끌려가는 불상사를 빚었다. 김종오도 눈앞에서 벌어진 그 꼴을 보고 비탄과 비분의 눈물을 흘린 유학생 중의 한사람이었지만 어쩌랴 그 역시 그로부터 1년도 되기 전에 자기 입으로 학교의 교련 교관 오오야마 앞에 나가 '천황폐하의 홍은에 보답코저 김종오는 대일본제국의 육군에 지원입대할 것을 결심했습니다'라고 외치고 군문에 뛰어들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할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의 한국에 살고있는 진보 닭대가리들에게는 그것이 김종오란 사람의 본심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춘원과 육당의 변절과 시국강연도 본심이었다고 믿어야 속이 편한 자들이다.
어느 이름모를 땅에 끌려나가 개죽음을 할지 모르는 징병에 응하는 결심을 하는데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안듣고 안봐도 뻔한 것이다. 늙은 부모님, 어린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일본군의 군복을 걸쳐야 했다. 춘원이나 육당인들 부모없고 가족없고 형제가 없겠는가? 차라리 지 하나 매국노로 천세에 오욕을 당하는 것이 자기로 말미암아 온 가족 친척 일가들이 줄줄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국과 자기 목숨은 쉽게 바꿀 수 있어도 조국과 부모를 바꾼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국이 아무리 중요하고 자기의 명예가 제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이 살아있는 형제들의 목숨보다 무겁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춘원과 육당에게 욕을 퍼부운 유학생들의 태반이 그로부터 1년 안에 자기 입으로 '황은에 보답코저...'하고 입대 선서를 하게 된다.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극한 상황에서의 처신과 행동은 어떤 사람의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엄청난 압력과 폭력에 의해 왜곡된 모습이지 결코 그의 참모습이 아닌 것이다. 춘원과 육당이 시국강연의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번민하고 괴로워했는지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그들을 손가락질한다. 변절자, 친일파, 매국노. 그리하여 우리는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뛰어낫던 인물들을 모조리 비인간, 파렴치범으로 몰아버렸다.
그들을 빼고 나니 이제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로 교과서에 실을 인물이 없는 지경이다. 안중근, 유관순처럼 해방 전에 일찍 죽어 행복하신 분들을 빼면 백범, 이범석, 우남, 나철 등등 손꼽을 정도의 인물이 있을 뿐이다. 세계에 자랑해도 손색없을 음악가, 미술가, 문학가, 종교인, 체육인, 교육자, 여성운동가, 군인, 언론인, 법조인, 학자들이 모두 친일의 올가미에 걸려 걸러져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한민족은 국난의 시대에 지조를 지킨 애국자가 한줌도 안 되는 못나디 못난 서글픈 종족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 추락을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사악한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자.
해방된 조국에게 절박했던 것은 독립할 능력과 힘이었다. 그것은 여러 분야가 공히 마찬가지였으나 특히 시급했던 것은 자위력이요 민족의 존체를 보위할 군사력이었다. 이 군사력이 나올 곳은 크게 세 군데였다. 첫째가 광복군이요, 두 번째가 만군이요, 세 번째가 일본군이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일본군 내의 계급으로 최고 상위자는 영친왕 이은 중장과 필리핀 포로 수용소장이었던 홍사익 중장이었다. 홍중장이 전범으로 처형된 다음 최고 계급자는 홍사익과 일본육사 동기생인 이응준 대좌였는데 해방후 한국군 탄생의 산파를 맡게 된다. 대한민국 국군의 대부가 바로 이 사람이다. 원용덕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만주군 출신이고 구름이 가장 존경하는 군인인 김종오 장군이 일본군 견습사관생 출신의 장교이다. 백선엽, 인엽 형제도 마찬가지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미군정 군사국장 쳄페니 대령이 2만5천명의 국방경비대 창설을 발표했을 때 기간요원은 60명을 뽑기로 했다. 이들이 독립된 한국군의 첫 장교들이요 지휘관들이다. 미군정 당국은 이 기간요원을 정확히 삼분하여 20명씩 안배하여 뽑았다. 만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이들이 한국 군부의 최고 고참들이다. 일본군, 만군 출신과 광복군 출신 장교들이 새조국 군대를 건설하는데 출신 파벌에 따른 갈등이나 적개심 따위는 있지를 않았다. 일제때 어느 군에서 어떤 경력을 쌓았던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고, 오로지 미래의 조국을 위한 토대를 쌓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 역시 주축이 된 것은 일본군 출신이었다. 군사에 대한 실무경험과 지식의 수준이 역시 제일 나았던 것이다. 그들은 요즘 섞어빠진 후배들에 비교할 때 진정한 군인들이었고, 나라의 동량들이었다. 일제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믿고 이들이 갈고 딲은 기량과 능력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으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는데, 그리고 그들이 그 믿음과 의지에 훌륭하게 보답하여 이토록 자랑스러운 조국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누가 이들을 손가락질하며 일본군이라 하고 덴노헤이까를 섬겼다고 비난하는가? 누가 그런 자격이 있어 참람한 짓거리를 자행하는 지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과연 얼마나 잘난 애국자들이고 얼마나 조국을 위해 쌓은 공덕이 있는 사람인지 보고 싶다는 말이다.
김종오 같은 참군인이 있어 대한민국이 있는 거다. 참으로 박복한 우리 민족한테는 드물게도 하늘이 주신 복이었다. 김종오, 박정희 같은 분들에게 일본군 출신의 경력을 시비하여 친일 딱지를 붙이는 자들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대역의 매국노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 육군에 김종오장군의 6사단, 해군에 최용남 중령의 백두산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초전에 순식간에 부산까지 밀렸을 것이다. 북한이 회심의 전략으로 삼았던 부산 상륙이 최용남 함장한테 걸려서 무산되고 중부 전선을 돌파하여 수원선에서 한국군 주력을 포착한다는 전략이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의 선방에 좌절됨으로써 자유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백척간두에서 회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초기에 북한군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꺾인 것은 김종오의 6사단이 방어하던 춘천 방면 뿐이었다. 이 춘천 방어의 성공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전쟁 후반기에는 세계 전사에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을 궤멸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우리가 친일파를 구분하여 인명록을 남기자고 들면 그 기준 안에 우리가 존경할만한 위대한 한국인의 태반이 포함되고 만다. 교과서에 실을 인물이 없게 된다.
4 산하여, 민족이여.
우리나라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교내에서 데모를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구름은 워낙 기억력이 비상해서 10년 전의 일도 다 기억하고 산다.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안난다. 92년인가 93년인가였을 것이다. 데모의 목적은 '김정렬 초대, 3대 공군 참모총장의 동상 건립 반대'였다. 그 이유는 고김정렬장군이 일본사관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역시 친일파라는 딱지가 또 한사람의 뛰어난 한국인을 추락시킨 사건이었다.
해방 후 한국 공군을 창설했던 김정렬장군은 경성중학교를 졸업했고, 1938년에 일본 예과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 항공사관학교에 들어가 1941년에 졸업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고, 필리핀 공략전에서 실전에 참가하였다. 김정렬장군은 광복 후 비행 경험이 있는 국내의 인적 자원을 모두 결집하여 맨주먹에서 조국의 공군을 만들었다. 그 초창기 공군 멤버들 중 가장 많은 수가 구일본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박범진, 김창규, 박원석, 신상철, 장지량 등등 한국 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냈던 하늘의 별들, 공중에서 산화한 이들의 많은 수가 일본군 파일럿 출신이었다.
그 외에도 초창기 공군에는 러시아, 미국, 중국 등지의 해외에서 비행경험을 가진 항공인들이 모두 참여했다. 그 중에는 중국에서 일본군과 공중전을 벌인 중국군 출신의 조종사들도 있었다. 일본군 전투기를 몰았던 사람들과 그들과 하늘에서 싸웠던 항일 파일럿들이 날개를 나란히 하여 조국의 하늘을 날았다. 일본군 항공사관학교를 나온 김정렬장군이 지휘하는데 대해 반감이나 유감을 가진 조종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해방 직후에 조선인들은 각계 각층에서 일제 시대에 상대적으로 앞서가고 조금더 위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반감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조선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진보 좌익의 꼴통들이 김정일의 사주와 선동에 넘어가 열심히 공격하고 있는 조선일보에 대해 해방 후 조선사람들이 돌맹이 하나 던진 적이 없고, 매일같이 신문 지면을 통해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실었다는 방응모 사장은 당연히 해방 후에 맞아죽기 싫으면 일본으로 도망가야 했을 텐데도 신기하게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사들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의 조선일보가 그 악독했던 일제의 서슬 아래서 '용케도 그만큼 했다'고 대견스럽게 생각했고, 자랑스러워했지 일제 때 행적을 문제삼아 조선일보, 동아일보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선, 동아는 당시의 사정 하에서는 그야말로 베스트를 다 했다. 그 이상은 사실 기대할 수 없는 선이다. 폐간과 존속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넘겨온 세월인 것이다. 조선, 동아가 더 이상 했었다면 결과는 폐간이다. 폐간된 신문은 친일이니 애국이니 따질 것도 없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폐간과 복간을 거듭했던 두 신문이었다. 덴노헤이까 반자이를 실었던 어쨌건 폐간은 면해야 조선민중이 그나마 한글로 찍힌 신문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글 신문은 그래도 조선인이 일본과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상징이었다. 그 신문에 실린 덴노헤이까의 사진이 주는 혐오보다는 그 신문지면 전체에 깔린 한글 활자가 수백배 수천배 우리 민족에게 값지고 필요한 것이었다.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 덴노의 사진을 실어가면서라도 두 신문사가 버텼으므로 그래도 해방될 때 이 땅에 한글 활자판이 찍히는 윤전기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내용 여하간에 한글 신문이 매일 나왔다는 그 자체가 기적적이요, 광복 후 조국에 필설로 표현할 바 없는 크나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는데 나라 전체에 한글 활자 하나 없고, 일본의 패망과 광복을 민중에게 전할 인쇄술과 윤전기를 가진 신문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찌 되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그 반대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등에 땀이 흐를 지경이다. 덴노의 사진을 싣더라도 한글 신문은 찍어야 한다고 결심했던 선각적인 언론인들의 분투와 각고의 노력이 조국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 신문협회의 회장이 한국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윤전기를 독립기념관에서 뜯어내고야 만 바보들이 있다.
그 이전에 이미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과거를 다 잊었고 지난날의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다.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올바른 교훈이 전해지지 못하였고, 진보좌파들의 선동과 선전이 교묘하게 스며들었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것이 90년대 초반에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의 동상 건립에 대한 사관생도의 데모라는 있어서는 안될 패륜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작금의 이념적 혼란, 나라의 분열에 대한 조짐을 나는 그때 공사생도의 데모에서 보았다. 자유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들에 대한 좌익의 반격이 '친일 청산'이라는 교묘한 탈을 쓰고 친일의 낙인을 우익의 아킬레스건으로 보고 난도질하려 드는 사악한 이리들의 음모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에 철없이 동조하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과 생각 없이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민중들을 보았다.
나는 자기가 만들고 키운 공군의 후배들이, 한평생 사랑을 다 주었던 아들들이 자기를 거부하는 데모를 하는 광경을 보면서 김정렬장군의 유혼이 통곡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온다. 우리가 가슴에 못을 박은 우리 어버이들이 어찌 김정렬장군 한사람뿐이랴. 무도한 패륜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안타까운 산하여 못난 민족이여.
5 친일청산이라는 탈춤
친일 행위에 대해 거론치 않는 것은 정말 악질적인 몇몇 반민족 범죄행위자들을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속상하는 일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친일 청산을 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첫째 그런 반민족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 이미 시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대상자들 중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법도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옥석을 가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범위를 축소해서 너무나 명백하고도 확실한 대상자들만을 추려내겠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자의적인 판단과 법정신에 어긋나는 재량행위이며, 형평성을 맞춘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 반드시 포함되게 되어 있고 빠져서는 안될 사람 역시 반드시 빠지게 마련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친일 청산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들고, 국론을 분열시키며, 나라에 크나큰 공로를 세운 인물들을 격하시키고 그들을 공격하는 빌미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다카키 마사오로 불리우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고박정희 대통령이 그러하고,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이유로 독재자 이외의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국부 이승만박사가 그러하다. 자신이 키운 공군의 후배들에게서 능욕을 받고 동상조차 건립되지 못한 공군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장군이 그러하다. 일부 좌익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조선일보에 대한 악랄한 음해와 조직적인 공격이 그러하다.
일반 국민들은 이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몇몇 반민족범죄자들에 분노한 나머지 실제로 처벌을 받고 단죄되는 것이 그들인 줄 알고 있다. 그래서 기꺼이 박수를 치고 지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당하는 것은 고작 일반 국민들은 들춰보지도 않을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대한민국의 건국공로자들, 국가 근대화의 영웅들이 명부에도 등재되지 않은 채 단죄되고 있고 치욕을 당하고 있다.
티비나 언론을 통해서 비추어지는 친일파들은 용서할 수 없는 파렴치범이며 누구의 눈에도 이들을 용서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통탄할만한 일로 비쳐지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카메라와 언론의 취재를 벗어나면 실제로 친일 청산이란 섬뜩한 칼날이 노리고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다. 근대 한국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 친일 청산이란 명분을 앞세운 진보좌익분자들에 의해 사냥되어지고 있고 상처를 받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명예가 흙발에 짓밟히고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 친일 청산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자들의 뒤에는 이들을 선동하고 부추기는 사악한 세력이 숨어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실을 모르고 이면에 어두운 대부분의 국민들이 지지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국민이 뽑은 대표들인 국회가 이에 미온적이고 머뭇거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전부 친일파의 자식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애국심이라고 눈꼽만큼도 없는 수구꼴통이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만 고르고 골라서 뽑은 국민에게 문제가 있다. 그들이 망설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칫하면 어느 정도 나라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함에도 몇몇 악당들은 우리의 대의사들이 전부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기득권의 수호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친일 청산법을 처리하지 않는다고 매도한다. 진정 역적들은 나라의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고, 민족의 운명에 고뇌하지 않고 민중의 헛된 인기에만 의존한 대중영합적인 바람몰이로 권력 투쟁에서 이겨보려는 자들이다.
이들의 전략은 애국과 정의와 명분의 선점이다. 그것들은 결코 그들의 심장도 두뇌도 골격도 피부도 아니고 그저 그들이 얼굴에 뒤집어 쓴 탈일 뿐이다. 이 탈조차 너무 안 맞아서 자주 얼굴에서 벗겨질 때마다 그들은 황급하게 변명을 하고 쑈를 해서 위기를 넘기고는 한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속고 있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들의 얼굴에 씌워진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들이 누구인지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6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일제 통치의 치욕을 입은 이유는 조선에 애국자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비분강개하는 열혈남아가 없어서도 아니었고, 비록 말기에 들어선 왕조일망정 5백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에 충신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반만년 역사의 이 땅에 열사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 조선인의 용기와 저항정신이 허약했던 것도 이유는 아니었다. 한일합방, 경술국치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당시 조선인의 무지와 몽매함이었다.
서세동점의 광풍이 불던 그 때에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의 모든 종족들은 군함을 앞세워 세계의 정복과 약탈에 나선 서구의 열강에 비교할 때 토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역사가 몇천 년이 되건, 그 인구가 몇 억이 되건,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저력이 어떻든 간에 산업혁명을 해낸 서구의 열강들이 도달한 수준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엄청난 격차였다. 그들에 비하면 반만년 역사의 조선민족의 지성과 기술, 문화라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보통 서민들의 생활수준과 지식의 정도, 문명화의 수준으로 보면 한마디로 야만인들 그 자체였다. 해방 후에 한국전쟁 당시에 이 땅에 온 외국군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사람들도 아프리카 토인들과 별반 차이 없었다.
일제 시대 직전, 개화기의 조선인들은 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전부 맨발로 다녔다. 짚신은 먼길 갈 때나 두어켤레 준비했지만 그나마도 여정의 태반은 옆구리에 매달린 채였다. 여자들은 젖통을 태연하게 내놓고 돌아다녔고, 화장실(뒷간, 변소)이라는 것은 퇴비를 모으기 위한 시설이었지 위생을 위한 장소가 아니어서 남자나 여자나 길에서 들판에서 예사로 볼일들을 보곤 했다. 그것을 치우라고 개를 길렀다.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것은 누더기 넝마에 다름없었고, 그 먹는 음식이라는 것은 꿀꿀이죽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나마 없어서 춘궁기만 되면 사람들이 떼로 굶어 죽었다. 위생관념이나 인권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할 줄도 몰랐다. 기술? 밭갈고 씨뿌렸다가 가을되면 추수하는 전래의 농사법, 새끼 꼬고 짚신 삼는 겨울철 소일거리, 막그릇, 사발이나 구워내는 도기 제조술, 원시적인 호미나 가래 겨우 만들어내는 대장쟁이 기술, 소나무 꺾어다가 지게나 만드는 기술이 조선인이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물론 그건 조선사람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긴 칼 차고 게다짝 끌고 다니면서 뻑하면 사람 모가지나 댕겅댕겅 자르던 잔나비 왜넘들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인이었고, 아시아의 중화라는 대국 중국도 나을 것이 없었다. 3억 중국인의 수도 북경은 하수도 시설, 수도 시설은 전무했고 거리에는 똥오줌이 넘쳐서 홍수를 이루었다. 도시가 아니라 백만 명의 거지가 몰려 사는 거대한 빈민굴이 북경이었다.
2억 인구를 가졌던 찬란한 아소카 문명의 후예 인도는 또 어땠을까? 영국군 수천 명이 소풍가듯이 정복한 땅이다. 중국이라고 충신열사가 없었고, 의인, 지사가 부족했겠나? 의화단 수십만이 열강의 신식 군대 7백 명을 못 이기고 무너졌다. 찰톤헤스턴이 주연한 '북경의 55일'이 그 상황을 너무나 잘 그려낸 영화이다. 나라 전체 국민 전체가 무지몽매한 죄였지, 애국심이나 충성심, 용기 같은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암만 충만하고 넘쳐났어도 그걸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런 것으로 피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에서 비껴간 유일한 사례인 일본은 역시 사무라이 정신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선배열강들에게 비루하고 눈물겹도록 아부하고 굽신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배우고 익혀서 일본은 호구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말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세계사의 기적이라고 말해지는 메이지 일본의 환골탈태도 50년이 걸렸다.
조선,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기타 등등 아시아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은 일본 빼고는 모조리 서구 열강의 밥이 됐다. 조선, 만주, 중국 , 대만은 서구 열강 대신 선배제국의 허락을 받은 귀염둥이 일본 잔나비가 먹겠다고 설쳐대니까 형님들이 비켜준 케이스였다.
조선인만이 못나서도 아니었고, 애국심이나 용기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태가 아니었다. 세계를 통째로 뒤덮은 홍수요 해일이었다. 그것에 맞서 이겨내지 못했다고 우리가 스스로 자책하고 연민할 이유는 없다. 중국도 인도도 속절없이 파묻힌 대격랑이었다.
문제는 그것에서 헤어나는 길이요 방법이었는데, 그것이 애국자가 부족해서 겪은 일이면 애국자를 길러내어야 하고, 용기가 없어서 당한 일이면 용기를 길러야 하고, 체력이 약해서 당한 일이면 운동을 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무지몽매해서 당했던 비극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바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었다. 그 선생이 왜놈이던, 누구던 친일이건 매국이건 무조건 배워야 했다. 일본놈 앞에 무릎을 꿇고라도 배워야 했다.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다. 자존심 때문에 굽히지 않고 배우지 않아서 무지몽매한 상태로 있는 것이 진정 수치이다.
기술과 지식에는 일제 지식, 일제 기술이라는 것이 없다. 지식에는 국적이 없고,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며, 기술은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다. 총은 왜놈한테 배워도 쏘면 적을 죽이고, 미국놈한테 배워도 쏘면 적을 죽인다. 누구한테 배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총을 쏠 줄 알아야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총을 쏠 줄 모르고, 대포가 뭔지도 모르던 십만의 동학군이 우금치 고개에 잠들어 있다. 무지한 자의 용기가 통할 시대가 아닌 것이다. 모르는 애국자, 기술 없는 충신, 무지한 지사 만 명보다 친일 기술자 1명이 나라에 필요했다. 어느 쪽이 나라를 살리는데 필요한 사람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생독립국들의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피식민지 시절에 자기를 통치했던 주인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간디, 네루, 막사이사이, 장개석, 박정희, 이광요가 공히 마찬가지다. 모든 독립국들의 건설과 근대화는 식민지 시절의 친영파, 친미파, 친화란파, 친일파들이 담당했다. 그건 필연적인 일이고 당연한 일이지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어떤 나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도자들 리더들을 그것을 이유로 비난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인들만 그리한다.
그렇지 않은 나라가 한둘 있긴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존경하는 모택동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영명하고 위대하신 영도자 김일성주석이 세운 주체조선이 있다. 둘 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기 나라를 침략해 온 외국과 투쟁하는데 평생을 바쳤다는 사람들이 세우고 통치한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침략자들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한 범죄행위를 자국민들에게 자행했고, 두 나라 모두 일본 지배하의 생활보다 더욱 비참한 기아 상태로 국민들이 내몰렸다.
모택동과 김일성은 모두 일본에게 희생된 국민들 수의 열배가 넘는 국민들을 일제보다 더 혹독하고 처참한 고통과 비인간적인 범죄로 숨지게 만들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에 희생된 중국인 수가 3천만 명에 달한다. 남경 학살 때 일제가 죽인 시민 30만 명의 백배이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죽인 동족의 수는 아예 차치하고 그의 통치 하에서 맞아죽고, 굶어죽고, 총살당한 인민의 수는 일제한테 끌려가 죽은 사람 수의 열배를 넘는다.
지금 중국은 마오의 어록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등소평의 유훈으로 통치되고 있는 나라이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당시 주자파의 대표자로 혹독한 탄압을 겪었고, 등의 아들이 홍위병들에게 3층에서 아래로 집어던져져 허리뼈가 부러졌다. 평생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자가 됐다.
문화대혁명의 참화를 통해서 등소평은 정신주의, 애국주의의 폐해를 몸서리치게 실감했고, 모 사후에 다시 복권된 등소평이 중국을 개방하면서 8억 중국인민에게 내린 교시가 바로 '흑묘 백묘론'이었다. 검은 고양이던 흰 고양이던 쥐잡는 게 장땡이'라는 말이다. 이 등소평의 한마디로 8억 인민이 누가 검으냐 희냐가 아니라 누가 쥐를 잘 잡느냐로 경쟁하게 되었고 목하 황하의 기적을 우리가 보고 있다.
모택동은 지금 중국인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다. 언급이 타부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중국에 가서 노무현은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태연하게 말해서 중국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얼척이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기 딴에는 점수를 딸라고 한 짓이었겠지만 그 한마디로 중국사람들에게는 한국 대통령이 똥이 돼버렸다. '정신나간 놈'이 된 것이다.
얼마나 국제적 감각이 무디고 한마디로 몰상식한 사람인가를 잘 보여준 사례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한국전쟁 때 희생된 백만의 국군 장병과 10만의 유엔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우리는 해방된 조국,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과 건설을 친일파들이 앞장서서 해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없다. 누가 했건,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경제대국이며, 군사강국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자리를 찾아서 일본으로 밀항선을 탔던 그때처럼 지금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오는 나라가 한국이다. 왜놈들이 기생관광을 하러 몰려오던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왜놈들 호줌지 사정으로는 감히 우리나라 와서 룸싸롱 못 간다. 잘난 한국의 남자들이 동남아로 중국으로 해작질을 하러 다닌다.
이게 다 친일파들 덕분이다. 우리가 친일파라 불러서 그렇지, 사실은 그 암울했던 시절에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익히고 노력했던 뛰어난 인재들 덕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욕한다. 왜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7 당연한 일에 대한 감사
군인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고,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 은혜를 늘 생각해야 하고,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기 봉급받자는 잡이지만 그러나 정성을 다한 수업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경찰이 밤새 순찰을 도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기만 하면 우리는 걱정없고 행복하게 한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연한 일에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는 말이 오바가 된다면 우리가 이순신, 안중근인들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부모님 은공인들 뭐 그리 고마울 일이겠습니까?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해야할 당연한 일을 책임지고 해주는 분들에게 가장 고마움을 느낍니다. 구름이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8 내부적 우상화와 대외적 겸손
우리가 어떤 일을 도모할 때에 실패하고 싶으면 참여자들 중에서 가장 비분강개하고 정의감에 불타며 결사의 각오와 불퇴전의 신념을 주장하는 자를 쫓으면 된다.
그런 자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그 끝에는 낭패가 있고, 패배가 있고, 몰락이 있고, 비참한 눈물의 계곡이 있다. 소와 시대의 일본은 그런 자들이 앞장서서 패망의 길을 걸었고, 메이지의 일본은 그런 자들을 과감하게 숙청했으므로 극동의 야만국가에서 반세기만에 신흥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개국 당시에 힘도 없고 실력도 없던 일본이 세계 열강과 주루루 맺었던 불평등 조약들을 개정하라고 길거리에 몰려나와 악을 쓰며 데모하던 열혈우국지사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처넣었던 것이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도자들이었다. 조선 정벌을 부르짖던 사이고 다까모리를 내전을 각오하고 낙향시켰던 자들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이기고 일본의 국위를 세계에 세웠다. 왜넘, 왜넘 하고 욕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사고로 참변을 당한 여중생을 위해서 반세기의 맹방이며, 세계 무대에서 한국을 위해 벽이 되어줄 가장 믿음직한 우방을 배척하는 어리석은 결기의 촛불행렬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만들어보였다. 그러고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웠다 하고, 자주 한국의 모습을 보였다고 희색이 만연하다. 요즘도 걸핏하면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촛불을 든 군중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연출했던 나라 치고 잘된 예가 없다. 하켄그로이츠가 베를린 광장을 뒤덮은 때로부터 독일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데 불과 10년 걸렸다. 검은 샤쓰를 입은 남자들이 콜로세움 앞을 행진하는 꼴을 본지 10년 만에 이태리는 추태를 보이며 패망했다.
촛불 군중 10만을 자랑하는 바보들아. 평양의 광장에는 100만의 군중이 모이고 그들이 연출하는 카드섹션으로는 동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나라는 거지다. 그 군중집회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거지떼의 집합이다. 꺼러지들의 광란이다.
군중이 거리에 몰려나오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목졸려 질식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절차를 존중하는 정치제도이다. 그 절차는 법으로 정해진 절차를 말한다. 합법적인 절차를 비합법적인 군중 동원으로 압살하려는 시도야말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독일 국민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그런 방법으로 살해했고, 419 이후 한국 사람들은 같은 방법으로 제2공화국을 죽였다.
군중의 동원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가장 쉬운 일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러고 싶은 유혹을 스스로 자제하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치를 할 각오를 가진 사람이 민주주의적인 정치인이다. 그런 자를 민주사회는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 군중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가로 지도자의 능력을 가늠하게 되면 그 나라는 곧 망하게 된다.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인 군중의 수를 보고 노무현이란 인물의 인기나 지지도에 탄복하고, 혹은 감격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런 군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노무현의 불행은 비례하여 커지고 나라의 수렁도 그만큼 깊어진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사악한 권력과 사이비 종교의 공통점은 내부적 신격화와 위장된 대외적 겸손의 시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다수가 되고 지배적인 힘을 갖게 되는 순간 대외적 겸손의 탈은 서슴없이 벗겨지고 내부적으로 진행되던 우상화와 신격화가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강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탈권위를 개혁의 미덕으로 내세우며, 권위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림으로서 역사상 가장 초라한 대통령으로 위장하여 연극을 하는 동시에 저들의 내부적으로는 노무현 우상화, 무오류의 신격화 작업을 해온 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이다. 광화문에 모인 10만의 군중은 영생교 교주를 향해 감격의 기도를 하며 눈물 흘리던 교인들과 다를 바 없다. 본질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하고 그 행동의 심리적 내면도 같은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하고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되면 아마도 조급한 성격의 노무현은 대외적 겸손의 탈을 벗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는 북한과 비슷해져 가는 참여공화국의 칙칙한 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이 노란 잠바에 촛불을 든 군중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배고픔과 실직뿐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영명하신 지도자 동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길거리에 군중을 불러내는 지도자는 그 군중에게 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결론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다.
내가 앞 글에서 친일 청산을 위장하여 진보좌파들이 나라의 공로자들과 참된 애국자들을 말살하려고 기도한다는 것을 말했다. 이런 추악한 공작과 멋모르고 이에 동조하여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추는 탈춤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노리는 타겟은 모두 김정일의 적이고 주체조선의 장애물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일보이다. 조선일보를 쓰러뜨리면 자유대한민국이 쓰러진다는 것을 김정일은 잘 안다. 안티조선은 자유대한민국에 대한 좌익의 공격이 가열찬 최전선이다.
이들이 친일신문으로 매도하고 있는 조선, 동아가 일제에 얼마나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으며, 조선인의 동화작업에 장애물이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일제의 극비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동안 KBS가 조선, 동아의 친일행각을 폭로했던 특집방송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었는 가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자료의 원문을 전부다 옮기려니까 박스가 많아서 시간관계상 자료가 등재되어 있는 '프로조선' 사이트를 안내해 드릴테니 벗님들이 한번씩 가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런 자료는 가급적 자주 가시는 사이트에 홍보해주실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애국이다. 일제에 예속된 망국의 원인도 무지이며, 앞으로도 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다면 그 원인은 결국 무지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몰라서 저지르는 우행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 모르는 민중은 계몽하고 가르치는 수밖에 없다. 불과 50년 전의 일이건마는 똑바로 알게 하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 항차 수천년 민족의 역사를 올바로 가르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다음은 이 자료에 대해 어떤 사이트에 소개한 사람이 올려놓은 요약문이다.
< 요 약 >
다음은 총독부가 조선/동아일보의 강제폐간에 앞서 극비로 작성한 문건 내용임.
연구자들에 의하면 문서 작성시기는 1939년으로 추정되며, 조선, 동아의 폐간 목표일은 아래 문서가 작성된지 몇달 후인 1940년 2월 11일이었다 함 (조선, 동아가 실제로 폐간된 날짜는 1940년 8월 11일).
최고위층만 회람한 것으로 밝혀진 아래의 극비문서에는 '극비'라는 도장이 찍혀 있음.
직역이며, 원문 전체를 모두 옮겨옴.
한자표기, 글의 순서 등도 원문에 나온 그대로임.
KBS가 2003년 광복절 특집에서 주장한 내용 전체 -> 클릭 (동아일보 부분에 대한 검증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예정임)
아래의 "프로조선" 사이트에는 노무현 정권하의 KBS가 2003년 광복절 특집으로 보여줬던 일제시기 총독부의 조선,동아일보 폐간관련 극비문서 원문 등이 있습니다.
그동안 KBS, 안티조선 등에서 얼마나 나쁜 일을 많이 저질러 왔는지 많은 분들께서 직접 확인해 보실 수 있도록 극비문서 원문 등을 이곳 저곳으로 널리 퍼뜨려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탈북자 동지회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영명하신 지도자 동지는 결코 헛소리 잠꼬대를 하지 않습니다. 된다고 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요. 네. 구름~~
<김일성 비밀 교시-어록>
1963년 12월 : "지금 남조선에는 5.16군사 쿠테타로 말미암아 폭삭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모두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 이를 갈고 있으며, 그 중에는 정치인들도 있고 구관료도 있고 양식 있는 지식인, 종교인, 언론인들도 많은 데 김종태와 같이 우리하고 선이 닿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혁명가들이 대담하게 접근해서 좋은 대상을 물색해야 합니다. 김종태와 같은 사람 서너 명만 잡게 된다면 남조선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조국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이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1973년 4월 : "남조선에서는 고등고시에 합격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앞으로는 학생운동에서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준비를 시켜야 합니다.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되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그러니 각급 지하당 조직들은 대상을 잘 선발해 가지고 그들이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합니다."
"중앙정보부나 경찰 조직에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공채시험을 거쳐 들어갈 수도 있고 지연 등 인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조선에는 김종필 이후락 윤필용 간에 치열한 삼각암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알력과 갈등, 학연 지연관계를 잘 이용하면 권력핵심부에도 얼마든지 파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조선에서 제일 뚫고 들어가기 좋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이력서 보증서 없이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그저 성경책이나 하나 옆에 기고 부지런히 다니면서 헌금이나 많이 내면 누구든지 신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신임을 얻어 가지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미끼를 잘 던지면 신부 목사들도 얼마든지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공작원들이 남조선의 현지실정을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남조선에는 흔한 것이 교수 박사입니다. 그 가운데 빽이 든든한 몇 몇 사람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어렵게 박사학위를 따고서도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실업자나 다름없습니다. 요행 대학교수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인맥관계에 밀리어 연구활동의 기회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 교수 박사들에게 접근하여 프로젝트를 하나 따주는 형식을 취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1976년 4월 :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선동자료입니까? 청계천 피복노동조합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조직이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고 추모사업회도 가지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조선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더 단결할 수 있고 그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지 않고 그 정신을 본받게 됩니다."
1976년 8월 : "남조선에서 들여온 영화, 비디오를 보니까 거기에도 재능 있는 작가 예술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잘 나간다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가 실업자나 다름없는 형편입니다. 이들에게 혁명적 세계관을 심어주기만 한다면 훌륭한 걸작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 예술인들을 더 많이 포섭하여 직업적 혁명가로 만들고 그들이 외롭지 않게 똘똘 뭉쳐서 혁명적 필봉을 들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묶어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창작한 한편의 시가 천만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키고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혁명적 노래가 적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남조선의 문예인들이 아주 잘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높은 혁명적 열의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교양자료를 주고 창작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조선 인민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숭미 사대주의 사상을 뿌리뽑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서는 작가 예술인들로 하여금 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과 야수적 만행, 그리고 비인간적 각종 범죄사실을 폭로하는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지하당 조직들이 책임지고 팔아주고 대대적으로 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실망하지 않고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도 만들고 시도 짓고 좋은 그림도 많이 그리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떤 동무들은 돈이 많이 든다고 난색을 표한다는데 우리가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할 때, 돈이 있어서 <피바다>극본을 쓰고 연극 공연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북반부에 강력한 사회주의 혁명기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두려워 주저하겠습니까? 돈 드는 거 아까워하지 말고 대담하게 일을 벌려야 합니다. 남조선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혁명투쟁에 동원할 수만 있다면 억만 금이 들어도 해야 합니다."
"남조선 혁명의 결정적 시기는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정세는 오직 혁명가들이 끈질긴 노력에 의해 성숙됩니다. 혁명의 객관적 정세가 아무리 성숙됐다 하더라도 혁명들이 주동적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결정적 시기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각종 형태의 대중 투쟁을 적극 조직 전개하여 적들의 강경탄압을 유도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하여 자해공작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시위군중들이 동료들의 피를 보게되면 더 격렬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결정적 시기가 조성되었다해도 그 시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4.19때의 교훈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평양에 앉아서 무전으로 보고나 받아 가지고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결정적 시기를 제때에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혁명 정세를 자체로 분석평가하고 전략전술을 스스로 작성할 수 있는 노숙한 혁명가들을 파견하여 현지 당 지도부를 시급히 꾸려야 합니다. 조선혁명을 모스크바에서 지도할 수 없듯이 평양에 앉아서 남조선 혁명을 지도한다는 것은 혁명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이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11 웃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
조회수: 175 작성자: 이경숙 작성일: 2004-04-01 01:24:38.0
노자는 자기의 도를 듣고 사람들이 웃을 거라며 미리 연막을 치고서 설법을 해야했다.
그런데 요즘은 욕을 듣지 않으면 말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한 사회의 구성원 중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지도급 인사들 외에는 자기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도, 수단도 사실 없었다.
10%도 안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90%의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다수의 대중과 엘리트들의 생각이 다를 경우 결정의 방향은 엘리트들의 주장을 따라가는 것이 되기 쉬웠다. 여기서 소수 엘리트와 다수대중의 판단과 식견 중 어느 것이 전체에 이익인가 하는 문제와 어느 것을 따르는 것이 정의인가 하는 문제가 부딪힌다.
역사는 다수 대중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정의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체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다수의 의사를 쫓았던 결과가 결국 다수에게 피해로 돌아가는 사례가 너무나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것도 결국은 선택된 엘리트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하는 제도라 말할 수 있다.
대의사 제도를 통하지 않은 직접적인 다수대중의 의사 표출은 언제나 그랬다시피 더욱 소수인 음모가들에게 조종되고 선동되고 세뇌된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수대중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었던 사례는 극히 드물다. 다만 당대에는 그것이 다수대중의 자발적인 의사였다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다수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의사의 관철은 언제나 다수대중에게 피와 살륙과 배고픔과 잔인한 탄압과 박해를 가져왔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비극적 종말은 다수대중이 저항했던 적이 아니라 그들을 선동했던 자들이 보답으로 준 것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수대중을 선동하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유효한 수단이 인터넷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과거와는 달리 인터넷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인터넷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논리가 아니라 욕설이, 이익이 아니라 명분이 판을 치게 된다.
모두가 똑같이 발언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다면 소수 엘리트의 이성과 논리는 다수 대중의 감정과 욕설에 묻히고 만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수 대중에 의한 엘리트의 압살이다. 원래 엘리트들은 그 사회 전체의 보물이며, 그 사회의 경쟁력이고 힘의 원천이다. 일본에 예속된 망국을 포함해서 모든 과거의 불행과 비극은 우리 민족의 엘리트 그룹이 자질과 능력이 떨어졌고 그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에리트 집단이 제 역할을 다했던 희귀한 경우가 근대사에서는 박정희 통치의 18년간이었다. 유신 정치는 엘리트 지배의 말기적 현상이다.
엘리트 집단의 허약함이나 그들의 지나친 독주의 문제는 뛰어난 엘리트 그룹를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사회에 공급하고 이들 간의 세대교체를 원활히 해서 국가사회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것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대한민국은 엘리트 집단에게 실망한 나머지 이들을 질식시키고 압살하여 없애버리려고 광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르짖는다. '우리도 너희만큼 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들에게 맡기면 사회 전체가 질적으로 저하되고 만다. 작금의 한국 정치에서 보듯이. 타락한 엘리트집단이 이끄는 것이 무식한 대중이 직접 하는 것보다 언제나 상대적으로 낫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타락하고 부패한 의회라도 아크로포리스나 광화문에 모여든 대중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라는 것이 역사적 결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점이 많고 약점이 있더라도 의회민주주의, 대의정치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민중의 직접적인 지배, 그리고 다수 대중이 참여하는 정치를 선동하는 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을 선동하는 것이다. 진정 권력이 민중의 손에 쥐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결코 선동하지 않을 자들이다.
인터넷은 자질과 능력에 상관없는 균등한 벌언권을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재앙인지를 알게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도를 듣고 웃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합리적인 견해는 무지막지하고 저열하며 저속한 욕지거리에 매도당하여 팽개쳐지고 있다.
엘리트들은 이런 싸움에 약하다. 그래서 침묵하게 된다. 엘리트들이 침묵하게 되면 그 나라, 그 사회는 끝이다.
온 세상이 웃어도 노자는 도를 말했던 것처럼 엘리트들은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암만 더럽고 추잡한 욕설들이 자신의 얼굴과 이름과 명예에 날라와 그것을 뒤덮더라도 침묵 속으로 편하게 숨으려해서는 안된다.
남보다 많이 배우고 더 아는 대가를 사회는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에 불응할 권리는 없다.
엘리트는 고사하고 얼라 키우는 평범한 아낙인 구름도 그런 욕설 따위는 두려워 하지 않으며 무지한 대중의 손가락질에는 개의치않고 산다.
엘리트 집단이 우리를 실망시킬 수록 우리는 진정한 엘리트들을 키워내야 하고 그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결국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노무현을 배척하는 이유는 용접공을 붙들어다가 공장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학교 경비원에게 교단을 맡기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랬던 나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으뜸가는 피해자들은 바로 프롤레타리아였다. 지금 중국은 엘리트들에게 나라의 전권을 주고 있다. 무제한적인 활약을 보장하고 있다. 우리도 그랬던 18년이 있었다. 지금 중국에 미국도 떨고 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에게 떨었던 한 때처럼.
그러나 노무현의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조롱거리다. 광화문의 10만 인파를 두렵게 쳐다보는 이웃나라는 없다.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엘리트들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압살해갈 수록, 광화문의 민중들이 기세등등하면 할 수록 우리가 우리를 겁내기를 바라는 모든 나라들이 쾌재를 부른다. 물론 김정일은 춤을 춘다.
열등자가 우수자를 조롱하고 핍박하는 국가 사회는 언제나 몰락했다. 대한민국은 몰락 중이다.
12 민주화시대의 폐막을 바라보는 소회
조회수: 158 작성자: 이경숙 작성일: 2004-04-02 01:50:43.0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유명한 복사에게 점을 치니 장차에 진나라를 해칠 것은 '호(胡)'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것을 진시황은 북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만리장성을 쌓게 된다. 그러나 점괘에 나온 '호(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진시황의 둘째 아들 호해였다. 진시황의 사후에 환관 조고는 부왕의 어명을 날조하여 진시황의 장남을 자결케 하고 둘째인 호해를 2대황제로 옹립한다. 조고의 전횡과 2대황제 호해의 학정과 무능으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과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진시황 사후 20년도 못가서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의 연합군에 의해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장보고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그려낸 최인호의 소설 <해신(海神)>에서 잘 소개된 바 있는 신라삼랑의 후예들이 2백년을 이어간 일본 전국시대의 명문인 다케다 가문의 마지막 가주는 다케다 가쓰요리였다. 가쓰요리는 그의 부친이자 전국시대 일본 최고의 무장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이웃 나라인 시나노를 멸망시키고 시나노의 당주의 딸을 억지로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가쓰요리의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가쓰요리는 아버지와 고국 시나노의 원수의 씨를 잉태하여 낳은 아들인 셈이다. 가쓰요리 본인에게는 아버지 신겐은 외가를 멸망시킨 어머니의 원수였던 셈이다. 이런 업보 때문인지 신겐 사후에 다케다 가문을 계승한 가쓰요리는 무능하고 졸렬한 통치와 어리석은 전쟁으로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전하여 2백년 역사의 명문 다케다 가문은 멸망당하고 만다.
중국 전국시대의 천하6국이 힘을 합해도 대적하지 못했던 진나라가 호해라는 아들로 인해 20년만에 멸망했고, 일본 전국의 쟁쟁한 가문과 수많은 무장들이 결코 이기지 못했던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는 원수의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로 인해 다케다 일족 전체가 멸문당하여 씨가 남지 않았다.
모든 유서깊은 것의 쇠망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내부에 있었다. 백만의 외적보다 단 1명의 후계자가 제국을 무너뜨린다.
해방 후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민주세력의 강고한 집단이었던 민주당이 마침내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소회가 새롭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그 막강한 적들과의 투쟁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그 맥이 단절되지 않았던 민주당이 시나노에서 얻은 아들 가쓰요리가 그랬던 것처럼 영남에서 귀순한 노무현이 그 당주를 계승한지 1년 만에 흔적도 남기 어려운 멸문의 위기를 맞고 말았다.
군부의 총칼을 배경으로 무소불위하던 군부독재권력도 끝내 없앨 수 없었던 정통민주세력의 본산이 좌충우돌하는 통키호테의 무데뽀 창질에 변변히 저항도 못해보고 맥없이 쓰러지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면서 멸망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어이없는 멸망의 사례가 그리 드물지는 않았으나 대한한국 민주세력의 몰락과 해체는 너무나 허망하고 희극적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열우당은 광복 이후 면면히 맥을 이어왔던 그 민주세력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의 폐문으로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화 시대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민주화라는 것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시대의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민주당이 영남인 노무현에 의해 말살되었다는 것과 그 마지막 당주가 조병옥 박사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로 기억될 듯 하다.
또 한편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가 근대화시대의 잔재인 한나라당의 총재가 됨으로서 민주화시대의 종식 후에도 근대화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은 이 무슨 오묘한 역사의 신탁인가 말이다.
13 먼저 사용한 자가 최종적으로 진다.
조회수: 127 작성자: 이경숙 작성일: 2004-04-02 22:36:02.0
참신했던 방법도 두 번째는 낡은 방법이 되고, 대부분의 승자는 같은 수단에 의해 패배당했다.
전격전 교리를 도입하여 훈련받은 독일군은 2차대전 초기에 유럽에서 무적의 상승을 자랑했다. 그러나 독일군에게서 전격전을 배운 소련군은 독일보다 더 대량의 전차, 더 무지막지한 속도전, 더 숙달된 기계화전술로 독일군을 밀어붙여 마침내 패망시켰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이 전유럽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혁명 후 고조된 프랑스인들의 국민의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민으로서의 애국심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다른 유럽국가의 군대가 군주의 사병이거나 용병이었던 것과 달리 법으로 징병된 최초의 국민군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역설적으로 프랑스군에게 정복당한 모든 나라에 국민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대부분의 나라가 징병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유럽의 군대는 군주의 사병에서 국민의 군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애국심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그 자신이 일깨운 영국과 프러시아의 국민군과 워털루에서 맞붙어서 무참하게 졌다.
이런 것은 전투의 기술이나 무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날카로운 칼은 상대가 쥐어도 역시 날카롭다. 아군이 사용할 때 위력적인 무기는 적군이 사용해도 위력적이다. 그래서 가공할 위력을 가진 무기는 서로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사례는 유럽의 석궁을 들 수 있고, 근대 이후에는 독가스와 핵무기를 들 수 있다. 내가 쓰면 상대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차대전의 독일군은 모든 전차의 표면에 찌메리트라는 시멘트를 발랐다. 이것은 자석이 들러붙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군은 흡착식 지뢰라 해서 강력한 자석이 붙은 지뢰를 병사들이 적의 전차에 붙인 다음 폭발시키는 무기를 개발했는데, 연합군들도 당연히 똑같이 그것을 모방해서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자기들의 신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그에 대한 대비책까지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공군력이 압도적이었던 연합군은 적전차 곁에까지 병사가 다가가서 손으로 붙여야 하는 흡착식 지뢰를 시용할 이유가 없어서 독일군의 찌메리트 코팅은 도둑이 제발 저린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무기건 전술이건 최초로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쉽게 이긴다. 상대에게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써먹은 후에는 이미 그 효과는 반감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재탕 삼탕시에는 별무효과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최초의 놀라운 성공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 쪽은 이미 효과가 약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것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최종적인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진보좌파세력이 이런 우를 저지르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도그마의 확산술이 바로 그렇다. 지난 총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데는 확실히 인터넷의 역할이 컸다. 사이버언론이 종이언론을 타격해서 그 지배적 위력을 반감시키고, 네티즌들에 의한 기성세력의 공격이 상당히 주효했던 때문이다. 독일보다 훨씬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독일군의 전격전에 무너진 프랑스와 소련처럼 한국의 보수진영은 진보좌파의 이 새로운 전술이 갖는 의미와 위력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무너졌다. 호되게 한방 맞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일격은 보수진영에 이 새로운 형태의 싸움에 대한 경험과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장차의 포텐샬을 알게해 주었다.
지금 진보좌파들은 이번 대선에까지는 선점한 인터넷 전장의 우위가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손잡이가 없는 칼이다. 누구던 그것을 쥐는 자는 손을 다치게 되어 있다. 손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휘둘러 상대를 치겠다는 결의와 의지가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무기이다. 이제 보수진영에서도 그 각오를 마악 하고 있다. 그리고 한다고 하면 진보좌파들보다는 훨씬 악랄하게, 끈질지게 또박또박 행사를 하게 될 것이다. 나폴레옹을 추방한 영국과 프러시아와 러시아가 그랫던 것처럼, 자기들에게 전격전을 가르쳐준 독일군을 말살해버린 미영소 연합군이 그랬던 것처럼, 해방 후 좌익의 테러를 몇갑절 잔혹하고 가차없는 테러로 분쇄했던 우익이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인터넷을 전쟁의 수단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적은 같은 전쟁터에서 그들보다 훨씬 큰 잠재력과 능력을 갖고 있다. 20대, 30대가 그들의 영원한 편이리라는 것은 환상이며, 인터넷이 언제나 그들의 철옹성이 되리라는 것은 꿈이다.
정동영의 6,70대 배제론은 인터넷이 없다면 하루 이틀 종이신문에 오르내리다가 끝날 정도의 사안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있는 한, 이 과오는 총선이 끝날 때까지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고, 정동영이 정치를 계속하는 한 지겹고 진절머리나도록 따라다니는 마귀가 될 것이다. 인터넷의 칼끝이 자기를 향하게 되는 순간 그것을 휘두른 것에 대해 후회가 막급이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사는 언제나 흉기를 먼저 휘두른 자에게 최종적인 패배를 선물한다.
첫댓글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노통의 부모도 창씨 개명했다는데..현재 지도층 중에 친일친북에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