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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군산 상주사 대웅전 추녀 밑의 용두. 법당 외부의 용두는 반야용선의 뱃머리를 의미한다. 용의 형태와 단청의 색깔이 매우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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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법당 기둥과 천장을 비롯해 처마와 추녀 밑, 닫집, 벽체, 계단 소멧돌 등에 장식된 용은 사찰 장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용의 외형을 살펴보면 머리는 소, 뿔은 사슴, 배는 뱀, 꼬리는 물고기를 닮았고, 수염, 여의주, 발톱을 갖춘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어 중국 전래의 용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성격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
불교의 발상지인 고대 인도에서는 이미 뱀을 신격화한 용신(龍神)이 등장했다. 인도의 용신 개념은 원래 코브라 중 가장 큰 킹코브라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아난다라는 용신을 그린 힌두교의 채색 그림을 보면 한 몸체에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머리를 부챗살처럼 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뱀이 신격화된 인도 전래의 용신은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수용되었다. 그 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용신은 인도 용신의 모습을 벗고 중국 전통 용의 도상(圖像)을 따르게 되었고,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중국 용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수용하였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불전 어칸(御間, 전면 중앙의 칸)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해 놓은 용과 추녀 밑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용이다. 어칸 용의 경우에 머리는 바깥에, 꼬리는 실내에 두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고, 추녀의 경우 구례 천은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듯이 법당 앞쪽 추녀에는 용두, 뒤쪽 추녀에는 용꼬리를 조각한 경우도 있다. 이 용은 법당을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말하며,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하는 것은 ‘피안의 세계로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피안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탈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반야용선이다. 법당 앞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용두는 극락정토로 향해가는 반야용선의 뱃머리가 되고, 법당은 부처님과 불자들이 타고 있는 선실, 그리고 법당 뒤의 용의 꼬리는 선미(船尾)가 된다. 반야용선을 그린 벽화가 양산 통도사 극락전 외벽에 있다. 극락세계를 향해 배를 타고 가는 중생들의 환희에 찬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간 양쪽기둥과 범종 종뉴 부도비 등에 주로 장식…
법당 추녀밑의 용두는 극락세계로 이끄는 ‘반야용선’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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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양산 통도사 극락전 후벽의 반야용선도. |
절에 있는 용두 조각상 중에는 훌륭한 것이 많지만 군산 상주사 대웅전 추녀 밑의 용두가 볼만하다. 투박하기는 하나 어느 한 구석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이 작품에서 한국적 미감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단청 색깔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편하게 즐겁게 해준다. 단청은 물론이고 몸체 각 부분의 선의 흐름과 굵기, 그리고 움직임의 방향 등이 건물의 서까래, 추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용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괴기스러운 느낌을 주고, 채색의 화려함이 도를 넘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용두 장식은 개념적인 표현 속에 여유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균형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범종을 매달기 위해 종 위쪽에 만들어 놓은 장치를 종뉴(鐘紐)라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 등 우리 주변국 경우에는 대개 단순한 고리형태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범종의 종뉴는 용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특별히 용뉴(龍紐)라고 부른다. 범종의 용은 보통의 용이 아니라 포뢰(蒲牢)라고 하는 용이다. 포뢰는 전래의 용생구자전설(龍生九子傳說)에 나오는 아홉 용 가운데 하나로, 용의 또 다른 화신이다. 전설에 의하면 포뢰는 바다에 사는 고래[鯨魚]를 특히 무서워하여 그것을 보기만 해도 놀라 비명을 크게 지른다고 한다. 포뢰와 종과 고래에 관해 〈삼국유사〉는 “(종은) 모두 각(閣)과 포뢰가 있고 고래로 당(撞)을 삼았다(皆有閣有蒲牢 鯨魚爲撞)”(권3 〈탑상〉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조)라고 적고 있다. 옛 사람들은 포뢰 형상을 만들어 종 위에 앉히고 고래 모양의 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놀라 큰 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에 따라 종소리도 크고 우렁차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범종 소리를 일명 경음(鯨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둥근 통나무 형태의 당으로 종을 치고 있지만. 승주 선암사에서는 비늘 문양이 뚜렷한 물고기 형태의 당을 사용하고 있다. 근세에 만든 것이긴 하지만, 형태에서 경어 모양의 당으로 종을 쳤던 옛 전통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다.
포뢰 조각 중에서 볼만한 것으로는 공주 갑사 동종, 부안 내소사 동종, 양양 낙산사 동종 등을 꼽을 수 있다. 갑사 동종의 용뉴를 소개하자면, 포뢰 두 마리가 몸을 뒤로 맞대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법당 어칸이나 처마 밑에 있는 용과 달리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다.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갑작스런 경당(鯨撞)의 공격에 놀라 입을 크게 벌리는 포뢰 용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갑사 동종의 용뉴는 단순히 종을 매다는 장치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용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중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처님과 불국토를 외호하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용은 사찰 경내 도처에서 불국 도량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사찰 초입의 돌다리 밑에 숨은 듯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용이 그 중 하나다. 산지 사찰 경우에는 대개 절 입구에 계곡이 있고, 그 위를 건너지르는 극락교, 승선교, 능허교 등의 이름을 가진 돌다리가 놓여 있다. 승주 선암사 일주문을 지나 개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아치형의 아름다운 돌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 이름이 승선교(乘仙橋)인데, 다리 밑 천장에 용두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이 용은 다리를 건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위치에 용두를 조각해 놓은 것은 당초부터 그 목적이 다리를 치장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류를 통해 침입해 올지도 모를 사악한 무리를 막으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불국 세계와 부처님을 수호하는 용은 법당 안에도 있다. 법당 내의 닫집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장식되어 있는 용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용이다. 닫집의 용은 대개 조각품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이나 대들보, 기둥 등의 용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당은 부처님이 계시는 장소이자 설법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이 곳에 있는 용들은 부처님이 임하고 계시는 법당을 지키고, 부처님이 설하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용은 열반한 선사들의 부도비에서도 볼 수 있다. 등에 비신(碑身)을 지고 있는 거북 형상의 돌을 귀부(龜趺)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대석(臺石)이다. 귀부라고 하는 것은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기 때문인데, 현존 유적들을 살펴보면 대개 ‘용머리에 거북 몸’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귀부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음에도 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앞서 말한 용생구자설에서 찾아진다. 용이 낳은 아홉 아들 가운데 비희라는 이름을 가진 용이 있다. 비는 거대한 거북(일설에는 암자라)을 말하는 것이고, 희는 몹시 세찬 모양을 표현하는 말이다. 거북이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용이라고 하는 것은 “깃털과 털, 비늘과 딱딱한 껍질을 가진 모든 것은 전부 용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萬物羽毛鱗介皆祖於龍)”(회남자)는 용에 관한 동양 전래의 관념과도 연관되어 있다.
비희는 성품이 세차고 강하여 비석 같은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한다고 하는데,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부도비의 귀부가 바로 비희 용인 것이다. 금산사혜덕왕사탑비, 법천사지광국사탑비, 고달사원종대사탑비, 쌍봉사철감선사탑비, 봉림사진경대사탑비 등의 귀부가 걸작에 속한다.
용(龍) 에 대한 이야기.
■ 아홉마리 용에 대한 이야기...
. 명나라의 호승지 라는 사람이 쓴 [진주선(眞珠船)]의 용생구자(龍生九子) 이야기. . 반고가 쓴 <서도부주(石賦註)> 아홉마리 용 이야기
■ 용이야기.
왕궁을 용궁, 왕의 의자를 용상, 왕의 부채를 용선,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타는 가마를 용가, 왕이 입는 옷을 용포라고 하듯이 용은 왕을 상징한다. 따라서 왕이 정사를 보는 동안 머무는 곳에도 용그림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경복궁에는 전지 넉장을 이어붙인 화폭에 수묵과 채색을 써서 두 마리의 용을 그린 쌍용도가 있는데 이 쌍용도의에 있는 용의 발톱은 넷이고 쌍룡은 모두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용의 옛 우리말은 '미르'이다. 미르의 어근은 '밀-' 로서 물(水)과 같다.
용은 스스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한다.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하기도 하고, 잉어가 변해서 용이 되었다 하기도 하며, 이무기가 변해서 용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용은 모든 실제 동물과 상상 속 동물들의 능력과 장점을 취합하여 만들어 낸 신비한 동물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대체로 아홉가지의 동물을 일부분씩 닮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잉어비늘, 이무기 배, 매의 발톱, 호랑이 발바닥이 그것이다. 어떤 책에서는 용의 코가 돼지코이며 발굽도 돼지발굽으로 제일 못생긴 것만 닮았기 때문에 용은 돼지를 싫어하고 그래서 용띠와 돼지띠가 서로 잘 안맞는다는 속설도 있다. 울음소리가 구리쟁반을 울리는 소리 같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있고 턱 밑에 여의주가 있고, 목 아래에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박산(博山:전설상의 산)이 있다 했다. 특히 역린(逆鱗)이 용의 급소인지라 재앙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 건드리지 말아야한다고 적혀있다 한다. 어쨌거나 중국을 중심으로한 동양에서는 봉황, 기린, 거북과 더불어 상서로운 사령(四靈)의 하나로 인식하여 왔다. 용의 본성은 거칠고 맹렬하고, 옥구슬을 좋아하며 구운 제비를 즐겨 먹는다고 하여 제비고기를 먹은 사람은 물 건너기를 꺼리고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제비를 제물로 하여 비를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쇠, 망초, 지네, 연꽃잎, 오색비단실을 싫어한다고 되어 있다.
용은 81개의 비늘을 가지고 있다. 81은 9×9이다. 곧 양수의 최고 수인 9를 거듭 갖추고 있는 양(陽)의 극치인 동물이다. 이것은 음지보다 양지를, 음울한 것보다 밝은 것을 좋아하는 인간 욕구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용은 81개의 비늘이 있어 99라는 양수를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 특히 닮은 것을 9가지라고 한 것은 9라는 숫자가 극양(極陽)이고 또 99의 양수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모두 존엄과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는 뜻이라한다.
용은 모든 동물의 우두머리로서 조화가 무궁하여 사람들이 가히 측량하지 못하는 능력과 힘을 지닌 동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문양에서는 구름속에 반쯤 감추어진 운룡(雲龍)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용의 신비스럽고 영험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상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수많은 종류의 용을 만들어냈다.
비늘이 있는 것은 교룡, 날개를 가진 것은 응룡, 빛이 붉고 뿔이 있는 새끼 용인 규룡, 빛이 노랗고 뿔이 없는 이룡, 승천하지 못한 반룡 , 물을 좋아하는 것을 청룡, 불을 좋아하는 것을 화룡, 울기좋아하는 것을 명룡, 싸우기 좋아하는 것을 석룡그가운데 규룡을 여러 용들의 우두머리로 친다.
룡은 뭇 용들을 나아가고 물러 나게 할 수 있으며, 구름을 타고 비를 뿌려 창생를 구제하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신으로 여긴긴다. 용생구자(龍生九子)라 하여 용에는 구룡이라고 하는 아홉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도 만들어 냈는데 ,이 용들에게 각기 독특한 성질도 다양하게 부여했다. 명나라의 호승지 라는 사람이 쓴 [진주선(眞珠船)]에 구룡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1.비희 : 일명 패하 .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해서 커다란 비석 아래에서 무거운 돌을 등에 진 모습인데, 흔히 거북이 처럼 생긴 모양의 귀부龜趺)에 새겨진 용이 그것이다. 2.이문 : 멀리 바라보면서 바닷물을 모을 수 있는 용이 바로 이문이라 한다. 어떤 기록에서는 이문이 먼데 보기를 좋아해서 지붕의 마루 끝에 장식하는 동물들이 여기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 전각(殿閣)의 지붕위에 있는 짐승머리가 바로 이것이다. 일명 조풍(嘲風)이라고도 하는데 험한 곳을 좋아한다. 또한 치미라 하며, 화재를 누를 수있다. 3.포뢰 : 소리지르기 좋아해서 종의 울림통에 달아 놓았다고 하는 것으로 옛종의 음관에 달았던 용을 말한다. 혹은 고래(종을 치는 당목 이 물고기 모양임에서 나옴)를 무서워해서 칠때마다 우는 용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종(鐘)위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다 속에는 큰 고기인 고래(鯨)가 있는데,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번번이 놀라 크게 운다. 종의 소리를 크게 하고자 할 때는 포뢰를 종위에 조각하고 고래 모양으로 만든 당(撞)으로 ] 친다. 4.폐안 : 일명 헌장(憲章)이라고도 한다. 호랑이 모습을 닮아 힘이 센지라 범죄인을 가두는 옥문에 장식으로 세워놓은 용이라 한다. 위엄과 힘이 있어 감옥의 문에 세운다. 5.도철 :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좋아해서 솥뚜껑에 장식했다는 용이다. 6.공복 : 기혈은 물을 좋아해서 다리 기둥에 새겨 놓아 물을 관장하는 용이다. 물을 좋아하는 성질을 가졌다. 한편 범공이라고도 하는데 마시기를 좋아한다. 7.애자 : 싸움하고 살생하기를 좋아한다하여 칼의 콧등이나 칼자루에 새긴다. 8.산예 : 모양이 사자와 닮았고 태우고 불지르기를 좋아하고, 연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에 새긴다. 또한 앉기를 좋아하는데, 부처님 자리의 사자가 바로 이것이다. 일명 금예(金猊)라고도 한다. 9. 초도 : 모양이 소라고동을 닮았다. 가두고 걸어닫기를 좋아하며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해서 주로 문고리에 장식했던 용이라 한다 그 외에도 민간에서는 더 많은 용들을 우리 주변에 두고 때로는 물을 다스리고, 때로는 불을 다스리며 풍농 풍어를 빌고 재앙으로부터 수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최대의 힘을 가진 상징적인 동물로 여겨져 온 것이다.
이렇게 용에게 부여된 다양한 성격과 상징성을 옛 사람들은 건축물, 예기(禮器)나 가구, 의복, 문구등의 장식에 널리 응용하면서 그들의 욕구와 기대를 담았던 것이다. 민속을 통해서 보면 용은 홍수와 가뭄을 주재하는 수신으로서의 용, 바다에서 항해와 조업을 주재하는 해신으로서의 용,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 주는 벽사 진경의능력을 지닌 용이 있고,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서의 용, 정치적으로는 왕권과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신으로서의 용이 있다.
사람들은 용의 다양한 성질과 신비한 능력에 의탁하여 그들이 바라는 바가 성취되기를 빌었다. 무속에서는 용을 수신(水神)으로 섬기면서 풍요와 안전을 빌었고 궁중에서는 용을 임금의 권위에 비유하여 여러 장식 문양으로 활용하였으며, 민가에서는 용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여놓고 용의 능력을 빌려 잡귀신을 물리치고자 하는등 생활 용품, 문방구 등 매우 넓은 영역에 걸쳐 길상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 용(龍)의 세계
신라가 백제(AD660년)와 고구려(AD668년)를 제압하고, 당을 축출해가며 통일의 위업을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문무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보호하겠다는 호국의 의지를 가지고 동해 감포 앞 바다의 해중릉에 묻혀 호국룡이 되었다는 내용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최근 백제의 궁성지에서 발견된 금동용봉문봉래산대향로(金銅龍鳳紋逢來山大香爐)의 받침대에도 용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았겠지요. 고구려의 웅건한 기상이 서려있는 평안남도 강서대묘에 그려있는 청룡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시라도 살아 움직일 같은 느낌을 받는 답니다. 조선의 건국과 태종 이방원의 왕권 강화 과정을 역은 [용의 눈물]이라는 연속극을 한 두번 정도는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제목이라도… 용은 한국 문화 곳곳에 그림, 조각, 이야기 등에서 상상으로서가 아닌 그의 실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동양의 용: 최고의 초자연적인 존재
용은 동양 문화권에서 항상 최고의 위엄과 권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제왕이 자리는 용의 자리(용상)요, 제왕의 얼굴은 용의 얼굴(용안)이며, 옷은 용의 옷(용포)로 불렸다. 그림과 문양도 일반인이 함부로 달 수 없는 국왕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중국의 용문양의 발톱이 3개 4개 5개로 일정치 않지만 북송의 철종은 천자를 상징하는 문양을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머리에 2개의 뿔과 다리에 5개의 발톱을 그리도록 법으로 정했다. 우리나라는 그리하여 4개의 발톱을 그리는 것이 상식이 되었는데 민간에서는 오히려 이런 법을 따르지 않고 쓰이기도 했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서도 용은 동방의 수호자이다.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주작, 북방에는 현무가 각각을 맡아 지키고 있다. 한편, 이러한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용은 많은 신화나 설화를 남기고 있다. 왕건의 용과 관련된 설화라든지, 문무왕이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킨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만파식적 수로부인 망해사 거타지 황룡사 등 삼국유사 외 여러 문헌에 관련 설화가 기록 되어 있다.
■ 용(龍)에 관한 몇 가지 자료
1. 고대 전설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로 평소에는 연못이나 바다 속에서 살다가 일정한 때가 되면 물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 지상(地上)과 초월적인 하늘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영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2. 중국인들은 영적인 존재인 용의 초월성에 입각하여 최고 통치권자인 임금 즉, 천자(天子)의 상징으로 용을 사용하였는데, 중국에서의 용에 대한 표현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3. 용과 관련된 속담들
㉮ 자가사리 용 건드린다. (자가사리-몸 길이가 한뼘밖에 안 되는 동자개과 물고기) - 뜻 : 제 힘에 겨운 것은 생각지도 않고, 함부로 저보다 큰 놈을 건드리는 경우 - 비슷한 속담 : 금두(金頭)물고기가 용에게 덤벼든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 개천에서 용 난다. - 뜻 : 보잘 것이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왔을 때 - 비슷한 속담 : 개똥 밭에 인물 난다. 누더기 속에서 영웅 난다. - 옛 문헌 : 개천용출호(開川龍出乎) [동언해(東言解)] ㉰ 용 가는 데 구름가고, 범 가는 데 바람간다. - 뜻 : 항상 함께 하여 서로 떠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비유 - 운종룡풍종호(雲從龍風從虎) ㉱ 용의 알을 얻은 것 같다. - 뜻 : 매우 귀중한 보배를 얻었을 때 ㉲ 용이 물 밖에 나면 개미가 침노를 한다. - 뜻 : 사람이 불행한 환경이나 처지에 빠지면 아주 하잖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모욕과 멸시를 받게 되는 세태를 비유하는 말 ㉳ 용춤을 추다. - 뜻 : 다른 사람이 추켜 주는 바람에 좋아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경우를 비유
■ 용이 있는 역사 기록 ㉮ 해모수가 하늘에서 오룡(五龍)이 끄는 수레를 타고…
전한(前漢) 선제(宣帝) 15년(BC 59년) 4월 9일,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제는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나라를 열었다.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했다. 천제는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이름짖고 <해(解)>로써 성을 삼았다. 왕은 뒤에 상제의 명령에 따라 근거지를 동부여로 옮겼다. 이 북부여를 계승하여 동명제(東明帝)가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다 서울을 정하여 졸본부여가 되었다. 곧 고구려 왕조의 시작이다. - [삼국유사] 권1 북부여 ㉯ 박혁거세와 알영에서의 계룡(鷄龍)
~ 전한 선제 5년(BC 69년) 3월 초하룻날에 있었던 일이다. 육부의 조상, 즉 육촌의 우두머리들은 각기 그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 냇가 언덕에 모였다.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는 위에 군림하여 백성을 다스려갈 군주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은 각자 제 마음내키는대로 행동하여 질서가 잡혀지지 않고 있다. 어찌 덕있는 분을 찾아 내어 군주로 맞이하지 않겠으며,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갖추지 않을까 보냐' 그때였다. 모임 장소인 알천 냇가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 기슭에 이상한 서기가 보였다. 그들은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라보았다. 양산 기슭의 나정(蘿井) 곁, 신비스러운 서기는 땅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전광과 같았다. 그리고 그 서기가 드리워진 곳에 흰 말 한마리가 꿇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몰려갔다. 알에선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왔다. 모두가 놀랍고 신기해 했다. 아이를 동천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몸에선 광채가 났다. 새와 짐승들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하늘과 땅이 울렁거리고 해와 달의 빛이 더욱 청명해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위에 대한 칭호는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했다. 육촌 사람들은 하늘이 자신들의 임금을 내려 준 이 경사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했다. '이제 천자님은 이미 강림하셨다. 그렇다면 또 덕있는 아가씨를 찾아 왕후로 짝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우물가에서다. 한 마리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그 왼편 옆구리로 한 계집아이를 탄생시겼다. 그 자태가 유달리 고왔다. 그러나, 단 한가지 그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처럼 생겼었다. 곧바로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시내로 데리고 가서 씻겼더니 그 부리가 빠지면서 예쁘장한 사람의 입술이 나타났다. 부리가 빠졌다고 해서 그 시내의 이름을 발천(撥川)이라고 했다. 남산 서쪽에다가 궁실을 짓고서 두 신성한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고, 그 알이 마치 박 같았으므로 <박(朴)>이라 성을 지었다. 그리고 계집아이는 그가 나왔던 우물의 이름 알영(閼英)을 따서 이름으로 했다. 성남아와 성녀아, 이 둘이 자라 13살이 되었을 때, 즉 한의 선제 17년(BC 67년)에 성남아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었고, 성녀아 알영은 왕후가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 했다.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 왕이 계정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국호를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그것은 계림이 상서로움을 나타낸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얘기로는 탈해왕 시대에 김알지(金閼智)를 얻게 될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고 해서 국호를 계림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정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간 뒤 7일만에 왕의 유체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며 알영 왕후도 따라 돌아갔다고 한다. 서라벌 사람들이 그 흩어져 내린 왕의 유체를 한 자리에 모아 장사지내려고 했더니 커다란 구렁이 한마리가 사람들을 쫓아내며 그렇게 못하게 했다. 하는 수 없이 오체로 흩어져 놓인 그대로 각기 따로 능을 모았다. 5개의 능, 그래서 오능(五陵)이라 했다. 한편 구렁이에 관련된 능이기 때문에 사능(蛇陵)이라고 했다. 운엄사 북쪽에 있는 능이 그것이다. 태자 남해가 왕위를 계승했다. - [삼국유사] 권 1 신라 시조 혁거세왕
㉰ 용과 만파식적(萬波息笛)
제 31대 신문대왕(재위 AD681~692)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개요(開耀-당(唐)나라 고종(高宗)시기 연호로 AD681~682동안 사용) 원년 신사(AD681년)7월7 일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재위 AD661~681)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 -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에 사지가 있다.- 를 세웠는데 - 절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개요 2년(AD682년)에 역사를 마치고 금당(金堂) 뜰 아래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는데 후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이듬해인 임오 5월 초하루 - 다른 책에는 천수(天授-당(唐)나라 중종(中宗)시기의 연호로 AD690~692동안 사용)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서 감은사(感恩寺)를 향하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일관이 말하기를, "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해룡(海龍)이 되어서 삼한을 진호(鎭護)하시고 또한 김유신공도 삼십 삼천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동덕(同德)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게 되면 값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 보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 형상이었다. 그 윗켠에 한간(一竿)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 혹자는 말하기를 대나무와 같이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나아가 머물렀다.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져서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일어나며 7일동안이나 계속 캄캄하였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는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서 왕에게 바치었다. 자리를 같이하여 왕이 묻기를, "이 산에 있는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무슨 까 닭인가?" 용이 대답하기를, "비유를 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용이 되셨고 유신공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저에게 주어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웁고 기쁘기 그지 없었다. 5색 비단과 금,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보내어 그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아니하였다. 왕은 감은사에 유숙하고 17일에 지림사의 서쪽 시냇가에 다다라 어가를 멈추고 점심을 드셨다. 태자 이공 -즉 효소대왕(재위 AD692~702)- 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했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진짜 용입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하고 왕이 말하자, 태자가 아뢰기를 "눈금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이겠습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왼편의 둘째 눈금을 떼어 물에 넣으니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은 곧 못이 되니 이러한 이유로 하여 용연이라고 불렀다.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여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때는 맑아 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AD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기이한 연유로 하여 다시 봉하여 말하기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 [삼국유사] 권 2 만파식적
㉱ 헌강왕 때의 처용은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 - 처용랑과 망해사(望海寺)
제 49 대 헌강대왕(재위 AD875~886) 때는 서울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소리가 길거리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왔다. 때마침 대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려고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용(龍)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도록 했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는 걷혔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을 개운포라 이름했다. 동해 용왕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에서 일곱째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가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그의 아내로 삼게하여 그를 치하했으며, 또한 급간이란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여 밤이면 사람으로 변하여 그 집에 가서 몰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른 남자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렇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앗겼으니 어이하리. 이 때 역신은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며, 처용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하노니, 이제부터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것 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로운 일을 맞아들이는 습속이 생겼다. 서울로 돌아오자 왕은 이내 영취산 동쪽 기슭에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 이름했다. 혹은 이 절을 신방사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왕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신)이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 자신도 이를 따라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나타내었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심상 이라고 했으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 산신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와서 춤을 추엇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공인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혹은 상염무(霜髥舞-상염은 흰수염이다.)라고도 하니 그것은 그 형상에 따라 일컬은 것이다. 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했으며, 또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 신의 이름 을 지백급간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 산신이 춤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는 데, 도파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사태를 짐작 하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 즉, 지신과 산신은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 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을 즐김이 더욱 심했으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한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2
㉲ 용에게 잡혀갔던 수로부인
성덕왕(재위 AD702~737)때다. 늦은 봄날, 동해를 끼고 굽이쳐 나간 길, 그 길을 순정공(純貞公)은 그의 부인 수로(水路)와 그리고 종자를 거느리고 가고 있었다. 그는 강릉 태수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부임해 가는 도중이었다. ~ 아직 임지를 향해 이틀을 더 가서 역시 바다를 임해 있는 어느 정자에 다다라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용(龍)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계책이 나서지 않았다. 또 한노인이 지나다가 알려 주기를, '옛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입길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이제 바닷속의 한 축생이 어찌 뭇사람의 입길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보오.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들여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노라면 부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순정공은 노인이 일러 주는 대로 했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 빼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리라.> 뭇사람들이 이 해가(海歌)를 외치며 막대기로 물가를 쳐댔더니 그제사 용은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다. 순정공은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을 물어 보앗다. 부인은, 7가지 보배로 지은 궁전이 있고, 그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와는 전혀 다르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옷에는 일찌기 인간 세상에서 맡아 볼 수 없었던 이상한 향내가 스며 있었다. 수로부인은 자태며 용모가 절세의 미녀라서 매양 깊은 산골이나 큰 못을 지나다 이처럼 여러 번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되곤 했다. - [삼국유사] 권 1 수로부인
㉳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 이름이 황룡사(黃龍寺)
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AD553년) 2월이다. 용궁 남쪽에 새로 대궐을 지으려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그래서 대궐을 지으려던 계획을 불사(佛寺)로 바꾸어 짓고, 황룡사(黃龍寺)라 이름했다. 왕 즉위 30년(AD569년)에 담장을 두르고, 17년만에야 겨우 공사를 끝냈다. - [삼국유사] 권 3 황룡사의 장육
㉴ 고려 건국의 아버지 왕건에게도 용의 피가 흐른다.
㉵ 세종대왕께옵서도 선대 제왕을 칭송하며…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 1 장 = 우리 나라에 여섯분의 성인이 나타나시어 생긴일이 모두 하늘이 내려준 복이시니, 옛 성군(聖君)의 업적과 서로 부합하여 서로 차이가 나지 않으시도다. - 여기서 육룡이란 세종 임금을 기준으로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태조(太祖) 태종(太宗) -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가 천명에 의한 것이며, 중국 역대 성군(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의 사적과 일치함을 칭송한 노래 - 용은 신령스럽고 그 변화를 측량할 수 없는 영물이므로 천자나 임금, 성인을 비유하는 말로 쓰입니다. - 임금님에 관한 단어 모음 ① 용안(龍顔) = 천안(天顔) - 임금의 얼굴 ② 용상(龍床) = 용평상(龍平床) - 임금이 집무를 볼 때 앉는 평상 ③ 곤룡포(袞龍袍) - 임금이 집무할 때 입는 정복 ④ 용가(龍駕) = 대가(大駕) = 용거, 용차(龍車) - 임금이 타는 수레 ⑤ 용곤(龍袞) = 용권(龍卷) - 용을 그린 옷, 임금의 옷 ⑥ 용광(龍光) - 임금의 은혜 ⑦ 용교의(龍交椅) = 곡교의(曲交椅) - 용의 형상을 새긴 임금의 교의 ⑧ 용궐(龍闕) - 궁궐(宮闕)의 경칭 ⑨ 용기(龍旗) = 교룡기(交龍旗) ⑩ 용덕(龍德) - 임금의 덕 ⑪ 용루(龍淚) - 임금의 눈물 ⑫ 용수(龍鬚) - 임금의 수염
■ 용이 있는 지명
㉮ 금강 하류에 용당포(龍塘浦)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한 농부가 살고 어린 처자와 함께 용당포 인근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하얀 신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곳은 오늘 밤이 지나 날이 새기 전에 바다로 변할 것이니, 곧 이곳을 떠나거라.'하지 않겠어요. 꿈에서 깨어난 농부는 괴상한 꿈도 다있다고 의아했으나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서 가족과 함께 가재도구를 황급하게 챙겨 잰걸음으로 집을 나서 귀암포(龜岩浦)까지 다다라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날이 어슴하게 밝아오자 용당포 쪽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더니 산이 무너지고 그 순간 먹구름이 싸여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바다물이 밀려와 삽시간에 큰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이곳을 용이 승천하면서 이루어진 곳이라 하여 이곳을 용당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 용두암(龍頭岩)은 제주도 용담동(龍潭洞) 해안에 있는 바위로 바위가 마치 입을 벌려 하늘로 솟아 오를 듯한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용두암이라 부른답니다.
㉱ 용문(龍門) 중국 황하 중류의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산서성 하진의 북서, 섬서성 한성의 북동에 경치가 대단히 좋은 곳으로 유명하며, 세상 사람들은 잉어가 이곳을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믿고 있답니다. 등룡문(登龍門)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 세시풍속(歲時風俗)에서의 용
㉮ 용날, 용알뜨기 매년 첫번째 되는 용날( 진일辰日이라고도 합니다.) 닭이 울때를 기다렸다가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앞을 다투어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던 풍습으로, 정월 열나흗날 밤에는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들어가 알을 낳는 데 첫번째 물을 길어가는 이의 물에 용알이 들어가 이 물로 밥을 지으면 그해에는 집안이 운수대통하고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하여 먼저 용알을 뜨려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답니다. 우물물을 먼저 길어간 아낙네는 자신이 먼저 용알을 떠갔음을 표시하기 위해 지푸라기를 우물물 위에 뛰워 놓습니다. 뒤에 온 아낙네는 아직 용알을 떠간 흔적이 없는 다른 우물을 찾아야 했지요.
㉯ 용의 밭갈기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조선 헌종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전합니다. 해마다 동지 무렵에 함창의 공검지, 밀양의 남지, 당진의 합덕지, 연안의 남대지 등의 저수지에 얼음이 얼면 마치 보습으로 밭을 갈아 놓은 것 같아,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용이 한 것으로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미리 점쳐 보았는 데, 얼음장의 모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있으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있으면 흉년이 들며, 동서남북으로 엇갈려 있으면 평년작이라고 예견했습니다.
■ 용이 등장하는 민속놀이
㉮ 전라북도 김제군 부양면 벽골제 쌍룡놀이에서는 백룡(白龍)과 청룡(靑龍)이 놀이판을 벌인답니다. ㉯ 전라북도 남원 용마(龍馬)놀이 ㉰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 용호(龍虎)놀이
■ 용이 있는 문화재
㉮ 고구려 강서대묘 사신도의 청룡 ㉯ 충청남도 부여 규암면 외리 출토 용무늬전돌 ㉰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 금동용봉문봉래산대향로 ㉱ 용두보당 ㉲ 용을 닮은 청자 - 용형 주전자 ㉵ 신륵사 다층 석탑의 기단부를 날고 있는 용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곳곳에 있는 용
■ 용꿈을 꾸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꿈에 용을 타거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면 고위 관직에 올라 만인을 호령하게 되고 자신이 용이 되면 성공을 암시하는 길몽으로 여겼다. 용이 우물이나 바다에 떨어져서 죽거나 나뭇가지에 걸려 있으면 흉몽으로 간주하여 조심하였다 한다. 용꿈을 꾸고 자식을 얻으면 훌륭하게 된다는 말처럼 용꿈을 꾸기위해 일부러 용장식으로 꾸민 '몽룡실'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방의 이불과 베갯모, 병풍, 촛대 등에도 용을 새겼다. 돼지꿈과 용꿈은 최고의 꿈이나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돼지띠 여자가 용꿈을 꾸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여겼다. 특히 원숭이 띠와 쥐띠 용띠가 용꿈을 꾸는 것은 지극히 좋다나?
■ 민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용
1) 물을 다스리는 신 물이 바다이든 연못이든 용은 물과 관련된다. 수신으로서 용은 농사를 지으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민족에게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생명으로 받들어졌음을 볼 수 있다.
2) 불을 다스리는 용 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구리용은 경회루 중건당시 목조 건물의 화재를 막기 위해서 넣은 용이라 한다. 경복궁이 풍수지리적으로 화(火)에 해당하여 불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물을 관장 하는 용을 넣어 불을 제어할 수 있도록 했다 한다. 3)복을 주고 재앙을 쫒는 용 농촌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고 풍농을 빌며 어촌에서는 정초에 풍어제, 용왕제 등 굿을 지내면서 풍어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해 왔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가 마을이면 어디 라도 당제와 당집이 있다. 한편, 새해들어 첫 용의날에는 새벽에 하늘에 사는 용이 내려와 우물 속에 알을 낳는데 가장 먼저 이 우물물을 떠 밥을 지으면 그 해에 운수가 좋고 풍년이 든다하여 새벽에 주붇들이 물동이를 이고 서로 먼저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경쟁하는 풍습도 있다.
4) 풍수설의 용 흔히 지역의 이름 (산, 절, 마을, 건물 등)에서 용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산을 용으로 보고 지형에 따라서 산 모양과 산맥등에 따른 지명이 붙은 예가 많다.
■ 용을 보았다는 기록?
용에 대한 상상의 출발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고 한다. 뱀에 대한 공포와 숭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토네이도 같은 기상현상에서 출발했다는 설이다. '천년묵은 이무기가 용 된다' '용은 구름을 타고 승천한다' 등의 말이 두가지 설을 대변주는 것 같다. 첫째 설은 뱀에 대한 공포와 숭배에서 비롯되어 뱀의 신격화한 개념으로서 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왕이나 용신은 뱀과 신이 혼합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면서 혼합된 관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기상현상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은, 원래 바닷물이나 호수 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오르는 용오름 형상에서 출발했다는 설이다. 그런 것을 뒷받침해주는 사례들은 역사 실록에서 얼마든지 있으며 현대에 와서도 토네이도 용오름 회오리바람등의 기록을 보면 용의 승천을 보았다는 옛 사람들의 증언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기상현상은 자주 발견되고 있으며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는 것이 이 설을 뒷받치고 있다. 용에 대한 옛 기록들을 보면 대체로 짙은 안개와 비를 동반하면서 구름에 싸여 움직인다고 표현하였으며, 세종때 기록에 "지나간 병진년 8월 다섯 용이 바다속에서 솟아 올라와 네 용은 하늘로 올라 갔는데 운무가 자우룩하여 그 머리는 보지 못하였고 한 용은 해변에 떨어져 금물두에서 농목악까지 뭍으로 갔는데 풍우가 거세게 일더니 역시 하늘로 올라갔다 하옵고 ..생략" 라는 보고서의 표현도 용오름 현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용오름은 무엇일까? - 주로 해상에서 발생하는 토네이도를 부르는 이름으로 주변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회오리바람과 같이 주변 공기보다 기압이 낮은 원기둥이 생겨나 이 곳으로 주변 공기가 일시적으로 몰려들어가면서 생기는 소용돌이라는 것. 가까이 1988년 10월 우리 나라 울릉도 앞바다, 1996년 서귀포 앞바다, 그 밖에도 여러번의 용오름이나 회오리바람이 보고 되었는데 특히 1964년 한강 뚝섬지역에서 발생했던 토네이도로 엄청난 인명, 재산피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출처: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에서 |
첫댓글 예전엔 사천왕두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이젠 사찰을 가면 유심히 보게 된답니다...다음엔 신비의동물 용을 유심히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