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떡 同行
任仁弘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아내는 뜬금없이 해장국집엘 가자는 것이다. 저녁이나 점심나절이면 몰라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해장국집을 가자는 제의는 같이 살아온 세월 동안 없었던 일이다.
어제는 시청 앞 프레지덴트 호텔 19층,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었다. 피로연을 마치고도 동지들과 헤어짐이 아쉬워 종로1가 피맛골 '열차집'에 다시 모였다. 빈대떡 안주로 옛정에 겨워 거나하게 취해서 해질녘에야 귀가를 했다. 그런데, 집에서도 아내는 가까운 친구들과 조촐하게 한 잔 하는 자리가 아닌가. 마냥 반가워서 합석을 했으니 술이 좀 과한 날이었다. 그러니 해장국은 오히려 내 쪽에서 더 원했을 법도 하다.
성장한 자식들이야 제각기 바쁘고, 노부부라고 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나이가 들면서 요즈음 불현 듯 둘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겠지만 둘만의 식단 마련도 그렇고 식후의 설거지도 아내에게는 가끔씩 부담스러운 듯하다. 그런 아내가 충분히 이해는 되면서도 예전 같으면 밥상에 오르는 반찬이 가지가지였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다.
동네에 있는 '양평 해장국'집을 찾았다. 해장국 집에는 이른 새벽인데도 지난 밤 술 속을 풀기 위한 사람들이 두서너 명씩 짝을 지어 앉아 있다. '백세주'와 함께 하는 세 아낙의 자리가 있는가 하면, 어느 테이블은 두 여인이 '참이슬'로 대작이다. 또 한 곳은 남정네 넷이서 간밤을 술상에서 지새웠는지 해장술 자리가 조금은 시끄럽다. 여기 저기 나름대로의 사연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 마냥 정겹다.
해장국이야 소내장, 양지머리, 선지, 양곱창, 여기에 우거지와 콩나물, 마늘 파 등의 야채를 넣어 진하게 우려낸 국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언제 먹어도 술을 마신 후의 속 풀이는 물론 구수해서 더욱 입맛을 돋우는 별미이다. 뚝배기 열기에서 돋아 오르는 김 서림에 안면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도 잠깐, 이내 땀 닦는 군손질도 바쁘지만 미식(美食)은 언제나 즐겁다. 오늘 아침 아내의 주문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다. 해장술도 생각이 났지만 일요등산을 해야 하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참았다.
늘 그렇듯이 일요일이면 으레 등산을 작정하는데, 오늘은 아내도 우리 집 특별한 두 식구, '똘이'와 '짱아'까지 대동하고 따라 나설 태세다. 녀석들을 위해 우유팩의 허리를 잘라서 물통도 준비하고 치즈 몇 장을 간식거리로 마련하였다.
첫째 놈이 '똘이'다. 요크셔테리어(Yorkshire Terrier). 조막만한 것이 초롱초롱한 눈매며 얼마나 귀여웠으면 '눈으로 말하는 개'라는 별칭까지 얻었을까? 친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친밀한 눈길과 사랑스런 행동을 보이면서도, 상대가 적이라고 판단을 하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앙칼진 성격의 양면성을 지닌 놈으로, 식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둘째 '짱아'는 시츄(Shih-tzu). 튼튼한 골격에 다부진 체구로, 커다란 눈망울, 코와 입이 조화되지 않은 못생기고 납작한 얼굴이지만 애교 만점으로 아무에게나 다정하다. 게다가 성격 또한 밝고 명랑하며,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은 그냥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덮어놓고 형아 '똘이'의 흉내만 내고 쫓아다니느라 늘 정신이 없다.
아침 8시쯤 동막골 유원지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벤치 여남은 곳에 사람들이 드문드문하다. 차에서 풀려 나온 녀석들이 우선은 해방감으로 방향도 없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느라 제정신이 아니다.
아내와 '똘이', '짱아'의 뒤를 이어 두 시간여 가파른 계곡과 능선 길을 오르면서 상념에 잠긴다. 미국 연수 중 어느 해 늦가을 이른 아침이었을 것이다. 맨허턴의 센트럴 파크에서 때때옷을 입힌 강아지 두 마리를 끌고 다정히 산책하던 곱상한 노부부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부부가 같은 무늬, 같은 색상으로 맞춰 입은 케주얼한 복장을 보면서 더할 수 없는 다정함, 그리고 멋스러운 품위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처럼 세 식구를 앞세우고 산에 오르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기분으로 새삼스레 그들을 생각하고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어쨌거나 비지땀으로 술독도 충분하게 빼었다. 능선을 넘어 울창한 소나무 그늘, 단골 쉼터에 당도하였다. 이 자리는 지세(地勢)가 좋아서 시간이 늦으면 다른 사람들 차지인데 오늘은 일찍 서두른 탓에 빈자리로 남아서 다행스럽다. 치즈와 물이 녀석들에게는 만족스런 간식이 되었는지 혀를 한껏 내저으면서 뒷맛을 더듬는다.
자그만 텐트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시원하게 산세를 만끽하기도 하고, 녀석들까지 넷이서 낮잠으로 잘 쉬었다. 7월에 막 접어들었는데도 진달래 두어 송이가 피어 벌 나비 몇 마리를 교대로 맞아들인다. 텐트의 그물 창으로 내보이는 자연의 활동사진이 참으로 아름답다.
내려오면서는 '당고개 냉면'으로 점심 메뉴를 정했다. 물만두 하나에 물냉면 한 그릇씩, 그것도 주문이 밀려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근방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탓인가 보다. 이 집은 냉면 발이 쫄깃쫄깃하고 특히 냉면 육수가 매우 진하고 고소하여 뒷맛이 개운하고 달기 때문에 아내와 즐겨 찾는다.
식탁이 붙은 옆자리는 보아하니 딸 내외와 장인장모 자리가 분명하다. 갓 결혼한 듯한 딸의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지고 주고받는 대화의 분위기며, 말수는 없지만 믿음직스런 사위까지, 자랑스럽게 딸네를 마주하는 부모님 표정이 너무도 다정스럽고 따뜻하다. 나이가 드는 탓일까, 30이 가까운 딸애를 생각하면서 새삼 부럽게 느껴진다.
차에서 기다리는 녀석들이 안쓰러워 냉면에 고명 고기는 남겨와서 제공을 했으니 점심도 녀석들과 함께 한 셈이다.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는 등 나들이 채비를 차렸다. 어제 샀다는 아내의 옷이 주황색과 쑥색으로 어우러진 브라우스며 쫄 바지의 무늬가 다소 야한 듯하다마는 하얀 샌들(sandal)에 화려하고 멋있다. 언제 보아도 아내가 흐뭇하게 멋지다면 나는 분명코 팔불출이다.
시간도 넉넉하지 않고 일요일이라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바람에 무난하게 공연시간 15분전에 '예술의 전당'에 당도할 수 있었다. 뮤지컬이 코미디, 무용, 음악들이 어우러진 공연물인 만큼 오늘 '키스 미, 케이트'에 대해서도 기대가 크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만 보여지는 독특한 위트와 유머, 재치 넘치는 말솜씨를 뮤지컬로 감상하는 것도 여간한 즐거움이 아니다. 말괄량이 '케이트'역 '정수경'의 노래 솜씨며, 이를 길들이는 '페트루키오'역 '남경수'의 카리스마도 볼만하였다. 일주일 전부터 약속된 관람이었으니 소원을 푼 셈이다.
마치고 나오는데 마당에서는 수많은 관중들에 둘러싸여 풍물놀이가 한창이다. '날뫼북춤'이라는 큰 글씨에 '대구광역시'라고 적은 깃(旗)발이 나부낀다. 놀이꾼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고 북을 메고 있는 걸 보면 대구 어느 고장의 전통 북춤인 듯하다. 흰 한복 바지저고리에 한복식 조끼를 입었다. 상투를 튼 머리에는 흰 수건을 동여매고, 허리에는 붉은 색 끈을 매어 발뒤꿈치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품이 멋스럽다. 옷매무새가 객지를 떠돌다 막 돌아와 고향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듯한 분위기이다. 언제 보아도 느끼는 바이지만 풍물굿은 참으로 신명나는 한 판의 마당굿이다.
아쉽지만 갈 길이 멀어서 놀이마당을 빠져 나왔다. 마을 버스로 '남부터미널' 역에 내려서 3호선에 올랐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는데 칸마다 테마별로 마련된 작품 전시장이다. 우리가 앉아 있는 칸에는 마치 승객들의 소지품이나 혹은 잊고 내린 물건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인형 비슷한 물건들로 연출해 놓았다. 신기해서인지 승객들이 구경삼아 떼지어 칸칸이 가고 오느라 전철 안은 조금 번잡스럽다.
집 동네에 다 와서는 저녁밥을 해결할 양으로 두 정거장을 더 지나서 가끔씩 찾는 '수원갈비'에 들렀다. 요즈음은 주말이면 외식이 일반화되는 추세라서인지 여기도 만원이다. 얼마를 기다려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갈비는 뭐니뭐니 해도 고기 근본이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질 좋은 고기를 취급하는 곳으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우리 내외는 갈비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양념을 하지 않은 채로 구워서 소금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한다. 전통 숯불이 아닌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개량 숯불이라도 오늘따라 갈비 맛이 그만이다. 부딪치는 첫 술잔의 소리도 경쾌하고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걸 보면 조반부터 점심, 저녁까지 세끼를 줄기차게 외식으로 마주한 아내의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닌가 보다. 더욱이나 오늘은 식단이나 설거지에서 완전 해방되었으니 그 얼마나 후련한 하루였겠는가.
이른 새벽에 해장국집을 시작으로 꼭꼭 붙어 다니다가 밤들어서 함께 귀가했으니 오늘은 정말 아내와 찰떡 동행이었다. 참 기분 좋은 하루다.
다음 동행은 언제, 어디로 할까?
첫댓글 영광이로소이다. 자랑스럽고 기분 짱이다. 축하합니다. 임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