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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오계서원과 그 배향인물 艮齋 李德弘 先生의學問과 思想
이장희 추천 0 조회 55 15.11.15 20: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第14回 安東 所在 書院 巡廻講座

▣ 日時:2000年 12月 2日(土) 午後 3時
▣ 場所:오계서원(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發表者:李 載 坤

오계서원과 그 배향인물



Ⅰ.오溪書院
가. 오계서원 연혁
1570년(선조 3, 경오)여름에 艮齋 李德弘 선생이 30세 때 太祖峯 남쪽 기슭(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천 마을 東南隅)에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汚

溪精舍를 건립하여 동재를 觀省齋, 서재를 驗爲寮라 하였다.“庚午 先生三十歲 築汚

溪精舍 溪之上流 山麓平夷爲臺 乃築精舍於其上 以爲養省捿息之所 … 又有觀省齋觀書軒驗爲寮活潑臺君子塘諸詠 堂名齋號 皆稟定於退溪先生” 간재선생문집간행위원회, ꡔ艮齋先生文集ꡕ上, 1985, 선문출판사. 525면. 이하에서는 ꡔ간재집ꡕ이라 한다.
“隆慶庚午夏 艮齋先生構一精舍 於溪之上流 以爲養省捿息之所 卽太祖峯南麓汚

川村東南隅也” 간재선생종택소장, ꡔ汚

溪志ꡕ(필사본), 丁巳(1737년) 撰. 이하에서는 ꡔ오계지ꡕ라 한다.
그 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兵火로 정사가 퇴폐된 것을“自兵燹之後 書堂頹廢 其基又圯于溪流 碩人遺躅鞠爲荒草 野田過者 無不指點 而嗟惜矣” ꡔ오계지ꡕ.
1600년(선조 33, 경자)에 선생의 장자 선오당 蒔가 오천 마을의 西北隅인 雙溪(源塘川과 龜川의 합류지점)의 위(곧, 옛터의 서쪽임)에 오계정사(오계서당)를 옮겨 세웠고“萬曆庚子 先生胤子蒔(號善汚

堂) 移築書堂 於汚

川下流雙溪上 因以舊額揭之 觀省齋觀書軒等扁額 皆善筆韓濩所題也…書堂階下 有巖盤陀 可座數十人 巖上有池塘…移建時 首唱奉事吳得成進士琴大遂主倅李覽” ꡔ오계지ꡕ. 또한, 李蒔의 유고인 ꡔ선오당일고ꡕ에는 「汚

溪書堂移建時請助文」庚子 및 「書堂上樑文」이 실려 있다.
, 1636년(인조 14, 병자) 5월 21일에 대홍수로 서당의 거의 모든 건물이 표실되었다(다만 몇 칸만 남았음)“崇禎丙子五月二十一日 書堂卒爲大水所圯 齋軒扁額盡爲漂失 唯觀省扁榜 偶得於拱辰亭溪邊 是日 善汚

公卒 享年六十八” ꡔ오계지ꡕ.
“丙子爲大水所漂而毁 只有數間餘耳” ꡔ간재집ꡕ하, 「오계서원이건기」, 909면.
. 이 때 현판이라도 찾으려고 향내의 유림들이 냇물을 따라 예천군 보문까지 백여 리를 냇가는 물론 강바닥까지 파헤쳐도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新川邊(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에서 쉬고 있을 때 건너편 바위 밑에서 석양을 받아 瑞氣가 어리므로 이상히 여기고 건너가서 물 속을 살피니 ‘관성재’ 현판이 있는지라 예사롭지 않는 일이라 여기면서 求得하고 이 바위를 ‘汚

溪巖’이라고 名하였다. 1663년(현종 4, 계묘) 여름에 향내의 선비들이 간재선생의 사당 건립을 논의하여 1665년(현종 6, 을사) 10월에 道存祠에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崇禎後癸卯 鄕之人士 始發爲艮齋立祠之論 宋公光井琴公大雅琴公碩達 實主張之 遂定基於汚

溪書堂之後(主倅李敏厚) 越三年 乙巳 廟宇旣成 齋舍繼完 其年冬 奉安艮齋先生 因擧得議 位版 卽溪上後孫李公克哲所題也 廟號曰 道存祠 乃鶴沙金先生所製 而吳公慶基之筆也 廟宇上樑文奉安文及常享祝文 亦皆鶴沙所製(立祠時事蹟 詳見琴上舍大雅所記)” ꡔ오계지ꡕ.
. 1691년(숙종 17, 신미)에 榮川(영주)사림에서 오계서당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강당을 明倫堂, 정문을 入道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신묘)에 현재의 위치(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번지. 釜谷)에 다시 건립하여 복설하였고(陰圃 羅學川이 庚子(1720) 仲秋 下浣에 「書院移建記」를 지음)“辛卯 又以院近水 而水每爲患 時山長宋斯文敏道氏 興院之諸生謀 得地于西北兩山之間 名釜谷者 而移建焉 距舊址可以百步許” ꡔ오계지ꡕ.
* 이 때에 參判 金熙周(호는 葛川)가 「廟宇(道存祠)重建上樑文」을 지었다.
, 1724년(경종 4, 갑진)에 榮川 사림의 공론으로 간재선생의 장자 선오당 李蒔를 배향하였다“戊申春 回安東士林通諭 有善汚

堂祔享精舍(‘서원’을 말함)之議…是年秋 祔享善汚

堂於汚

溪精舍” ꡔ오계지ꡕ.
「安東士林榮川鄕校通文」의 註에는 ‘進士 南矴等’으로 되어 있고 연도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汚

溪書院通榮川禮安士林」의 註에는 ‘甲辰五月 善汚

堂先生追配時 李龜鏡等’로 되어 있다. ꡔ간재집ꡕ하, 982면.
생각컨대, 무신년(1728, 영조 4)으로 되어 있는 것은 ꡔ오계지ꡕ 1군데 뿐이고, 갑진년(1724, 경종 4)으로 되어 있는 것은 ꡔ간재집ꡕ하, ꡔ민족문화대백과사전ꡕ 등 여러 군데일 뿐만 아니라, ꡔ汚

溪書院任錄ꡕ에도 갑진년에는 상·하유사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나 무신년에는 기록이 빠진(缺)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갑진년이 맞는 것 같다.
이 때에 「善汚

堂追配時奉安文」과 「常享祝文」은 小山 李光靖이 찬했다. 또한 鄭維地가 지은 「선오당추배시봉안문」은 ꡔ오계지ꡕ에 실려있다.
. 그 뒤 1868년(고종 5, 무진) 8월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1919년(기미)에 복향하기 위하여 明倫堂·觀省齋·驗爲寮·入道門·廚所를 다시 세웠고, 1973년(계축)에는 입도문을 중수하였고, 1975년(기묘)에는 관성재·험위료를 중수하였다. 1978년(무오) 음력 3월 8일에 道存祠를 다시 짓고 복향하였다. 1993년(계유) 12월에 주소를 중건하였다. 유물로는 목판 300장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7,000평, 임야 10정보, 대지 1,000평이 있다.
향례는 매년 음력 3, 9월 中丁日에 행하고, 常享祝文은 ‘信道之篤制行之端水長山高餘芳不刋’(鶴沙 金應祖 지음)이다.
2. 오계서원 경내의 건물 및 유적
1) 道存祠 : 간재 이덕홍 先生과 선오당 이시公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으로 6칸이다.
2)明倫堂 : 중앙에 6칸의 대청과 좌우에 각 2칸의 방이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정면에는 오계서원 현판(金宗濟 씀)이 걸려 있다.
3)觀省齋 : 東齋(2칸의 방)로 宋代學者 南軒(張栻)이 晦菴(朱憙)에게 ‘動靜相須 體用不離’라는 글을 보내자 晦菴(주희)이 삼가 座右에 써서 ‘出入觀省’한데서 간재선생이 취하였다“南軒先生與晦菴先生書曰 要須察夫動以見靜之所存 靜以涵動之所本 動靜相須 體用不離 而後爲無滲漏也 此數句卓然 義語俱到 晦菴謹書座右 出入觀省 今我退陶先生書敬齋箴白鹿洞規 以示學者日用規程 德弘竊以爲南軒所謂相須不離之功 必從事於此 然後得 故敬以承之 幷揭齋壁 時時觀省云” ꡔ간재집ꡕ상, 83~84면.
. 편액의 글씨는 石峰 韓濩가 썼다.
藏板閣(1칸)은 ꡔ간재선생문집ꡕ과 ꡔ선오당일고ꡕ의 木版(300장)이 보관되어 있던 곳이나 지금은 비어 있다.
4)驗爲寮 : 西齋(2칸의 방)로 「夙興夜寐箴」의 應事에 ‘事至斯應 則驗于爲(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石峰 韓濩가 썼다.
典祀廳(1칸의 마루)은 향례시 祭需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5) 入道門 : 정문(1칸)으로 초학자가 학문하기 위해 들어오는 문이란 뜻이다. 6) 廚所 : 庫直舍로 건물이 낡아 1993년(계유)에 6칸 一字겹집으로 지었다.
7)君子亭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6호), 1570년(선조 3, 경오)에 간재선생이 오계정사 창건시에 같이 건립한 정자로 4칸의 大廳과 우편에 夾室 2칸이 있고 정면에는 軒檻이 달린 툇마루가 있다. 대청에는 다섯 개의 丸柱가 있고 중간에 대들보를 남북으로 小椺를 동서로 십자형으로 연결하여 주역의 先天八卦를 상징하고 서까래의 배열과 도리의 이음새 및 목재장식은 后天八卦를 상징하였다. 근래에 보수하였다. 「君子堂記」趙普陽이 撰한 「오계서원군자당기」에는 “…이 곳(釜谷)에 서원이 없었다고 하여도 이미 못이 있으니 어찌 폐하겠는가? 계유년(1753)에 牛川 鄭公(鄭玉)이 지나는 길에 사당을 배알하고 못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찌하여 못 위에 堂을 지어서 여러 군자의 즐거운 휴식장소로 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이에 여러 사람이 같은 소리로 응하여 감독은 선생의 후손 慶泰씨가 맡고 그의 족제인 常泰씨와 琴泰玉이 실무를 맡아서 일을 마치니, 그해 7월에 시공하여 이듬해(갑술, 1754년) 6월에 마루 4칸 방 2칸을 준공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는 任寅(1782) 5월에 八友軒 趙普陽이 撰하고 慕圓庵 宋得龍이 글씨를 썼다(「書君子堂記後」는 漢陽 趙葵陽이 지었음). 堂號는 觀書軒이며 朱子의 ‘雲谷觀書理發揚’의 觀書詩에서 취하였다. 현판 글씨는 석봉 韓濩가 썼다. 청대 權相一의 찬시가 있다. 정자 앞에는 약 22평의 연못(君子塘)이 있는데 蓮은 15세기 種蓮이며 사철 못물은 加減이 없다.
8)鳶魚臺와 活潑臺 : 서원 입구의 양측에 있는 臺로서, ꡔ詩經ꡕ의 「大雅 旱麓篇」에서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로다(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거늘 물고기는 못에서 뛰놀도다 - 上下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임).’라고 한데서 ‘鳶魚’를 취하였고, 이 구절을 子思가 ꡔ中庸ꡕ 제12장에서 인용하고 程子의 해설에 ‘喫緊爲人處니 活潑潑地라(요긴하게 사람을 위한 것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다)’라고 한데서 ‘活潑’을 취하였다. 臺에 오르면 깎아 자른듯한 절벽이 울창한 숲 사이로 고요히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어울려 ‘鳶飛魚躍’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Ⅱ. 배향인물
1. 艮齋 李德弘
字는 宏仲, 號는 艮齋이다(名, 字, 號는 모두 퇴계 선생께서 친히 지어주신 것임). 본관은 永川으로 聾巖 선생(이현보)의 從孫이다.
1541년(중종 36, 신축) 음력 10월 14일에 榮川 南村 九龍洞(현재의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鹿洞) 외가에서 參判公(李忠樑)과 貞夫人 潘南朴氏(平度公 朴訔의 6세손 司直 承張의 女)의 第 4子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용모단정하고 성품이 순수 온아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여러 아동들과 장난하지 아니하고 자라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19세에 惺惺齋(琴蘭秀)의 주선으로 퇴계 선생을 뵈니 선생이 一見하여 입문을 허락하였고(이 때부터 퇴계 선생 역책시까지 12년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언제나 侍側하여 수업을 하였음), 21세 때에는 공부를 권장하는 의도로 勉勵詩 3수를 지어주었다. 30세 때에 스승의 명으로 璿璣玉衡을 제작하여 천리연구에 활용하였다(현재 도산서원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에 보존되어 있음). 이 해 퇴계 선생께서 역책하실 때 선생의 명으로 서적을 관리하였으며, 돌아가심에 心喪3년을 하였다. 31세 때는 ꡔ계산기선록ꡕ을 저술하였고, 32세 때는 도산에서 동문들과 모여 상덕사를 짓기로 논의하는 등 추모사업에 힘을 쏟았다.
38세 때 조정에서 전국의 名儒 9賢을 천거함에 제 4위로 뽑혀 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고, 그 뒤로 창릉참봉(41세), 풍저창봉사(42세), 현릉참봉(43세), 종묘직장(49세), 사옹서직장, 익위사우부시(52세)를 지냈다. 임진왜란 발발시 잠시 귀향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관동을 경유하여 용강산성에 이르러 왕세자(광해군)를 배알하고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올렸고, 다음해 정월에 행재소에서 선조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소를 올렸다. 이 소에서 육지에서는 龜甲車를 바다에서는 龜甲船(거북선)을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말미에 첨부된 龜甲船圖는 우리나라 최초의 거북선도이다. 전란중(53세)에 永春縣監에 제수되어 왜란으로 인하여 飢寒에 시달리는 난민을 撫恤하다가 54세 12월에 母夫人喪으로 사직하였다. 1596(선조 2, 기사) 음력 9월 28일에 오천 본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이미 經史에 통달하였다. 일찍 鄕解에 합격하였으나, 어지러운 科場의 기풍을 보고는 아버지의 道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오계서당(오계정사)에서 聖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스승인 한강(鄭逑)과 學友인 여헌(張顯光)이 찾아와서 보고는 ‘代를 이은 家學’이라고 칭찬하였다. 「오계서당동화록」에 의하면 29회 講를 열어 당시 국내 유수한 석학 장현광 등 239명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참가자의 面面은 기록된 諱啣으로 알 수 있으나 강의 내용은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문인록」에는 宋尙憲 등 118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문과급제가 6명, 진사·생원이 10명이다. 易理와 道學에 정통하여 앞일을 예지하는 경지에 이르러 광해조시 당쟁이 극심하여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생 4형제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善汚

公晩年乃曰 夫文者吾家敗亡之讐 遂盡焚其稿 由是 遺集未傳焉” ꡔ오계지ꡕ.
14년간을 두문불출하고 지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 음력 5월 21일에 졸하니 향년 68세였다. 配는 淑人 진성 이씨로 진사 宗道의 딸이다.
묘소는 오계(丑坐)에 있다. 1757년(영조 33, 정축) 7월에 通訓大夫 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오계서원에 配享(1724년)되었다. 눌은 李光庭이 遺事를, 강고 柳尋春이 行狀을, 부제학 李炳觀이 묘갈명을 지었다.
유고로는 ꡔ선오당일고ꡕ(不分券 1冊, 간행년도 미상)가 있다. 특히 「操舟候風歌」 3章과 「烏鷺歌」 1章의 시조 2수는 국문학연구에 참고할 만한 자료이다.


오계서원과 그 배향인물
艮齋 李德弘 先生의 學問과 思想

Ⅰ. 序 論
艮齋 李德弘(1541~1596)은 퇴계의 문인 중에서 비교적 긴 세월에 걸쳐 그를 가까이 모신 高弟였기에 스승에게서 傳受한 학문적 성과도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易學에 조예가 깊어 陰陽互根의 원리에 따라 剝復의 이치를 賦로 읊었으며, 曆法에도 뛰어나 스승 퇴계의 명으로 제작한 璇璣玉衡이 지금도 도산서원에 전해져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왕세자와 선조에게 疏를 올려 禦倭策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간재는 실로 月川 趙穆에게 못지 않을 만큼 퇴계께 親炙를 입은 心悅·誠服한 제자로 性理學에 있어서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兵略·算學·曆法에서도 精通하였다. 李家源, ꡔ退溪學及其系譜的硏究ꡕ(退溪學硏究叢書 第一輯), 退溪學硏究院, 1989, 299면.
그의 문집인 ꡔ艮齋集ꡕ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退溪의 지극한 훈도 아래 평생에 걸쳐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고 연구하는 일에 남다른 정열과 노력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하에서는 간재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관점에서 폭넓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Ⅱ. 艮齋의 生涯와 著述
1. 艮齋의 家系
간재의 본관은 永川이다. 시조는 고려초 平章事를 지낸 高鬱君 文漢이고, 중시조(1세)는 克仁의 후손 永陽君 大榮이다. 대영의 5대손 軍器寺 少尹 軒이 고려말에 벼슬을 버리고 영천에서 예안현 汾川(부내)으로 이거하였다. 다시 5세를 내려와 訓練院 習讀을 지낸 賢佑가 분천의 상류 川沙(내살미)에 卜居하였는데, 이 분이 聾巖 賢輔의 동생으로 간재의 조부이다. 盈海 敎授를 지낸 父 忠樑이 다시 천사에서 오천(외내)으로 이거하였다. 예안에 정착한 이래 영천 이씨는 이 무렵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의 有數한 世家로 정착하게 되었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세 6세 7세 8세
大榮(大將軍, 영양군파) - (중략) - 軒(少尹, 소윤공파) ┬ 坡(縣監) ┬ 孝孫(奉禮) →

 


│ └ 誠孫(進士)
└ 塢(文, 直提學)

9세 10세 11세 12세
→ ꠏꠇꠏ 欽(縣監) ┬ 賢輔(文, 知中樞, 聾巖)


ꠐ ├ 賢佑(習讀, 습독공파) - 忠樑(敎授) ┬ 命弘(參奉, 퇴계문인)
ꠌꠏ 鈞(直長) ├ 賢佐(部長) ├ 壽弘
└ 賢俊(察訪) ├ 福弘(部將, 퇴계문인)
└ 德弘(縣監, 퇴계문인)

 


농암, 퇴계는 다같이 안동부 예안현의 사족으로, 그들의 조상은 고려말 永川, 眞寶로부터 각각 이주해 와서 관의 비호, 묵인 아래 토지를 개척하고 노비를 늘려서 가세를 이루어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李樹健의 ꡔ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ꡕ(一潮閣, 1995) 165~168면 및 239~269면을 참조.
, 선점한 토성인 光山 金氏, 奉化 琴氏와 더불어 이른바 禮安 鄕內의 四大家門을 형성시켰다.
ꡔ도산급문제현록ꡕ에 등재된 인물들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특히 퇴계의 자질이 많이 포함된 진성 이씨를 제외하고는 영천 이씨가 15명으로 가장 많다. 이는 물론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탓도 있겠지만 퇴계와 농암, 나아가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 간의 누대에 걸친 세의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고 본다. 간재는 지역적으로도 퇴계와 아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수한 가문과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비교적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에 다른 여느 사람보다 우월적 위치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2. 艮齋의 生涯
간재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生長期로, 출생하여 퇴계에게 급문하기 전까지의 약 18년간이다. 간재는 중종 36년(1541)에 榮川(영주) 外宅에서 출생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뜻을 가다듬어 글읽기에 열중하였고, 18세 때에 琴蘭秀로부터 ꡔ古文ꡕ을 배웠다.
둘째는 퇴계에로의 급문 수업기로, 퇴계에게 급문한 때로부터 퇴계가 하세하기까지의 약 12년 간이다. 간재는 19세(명종 14년, 1559)에 퇴계 선생께 급문하여 30세 때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12년간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언제나 시측하여 수업을 하면서ꡔ艮齋集ꡕ上, 33~34면, 「간재집서」(이광정 찬), “自童丱 至老先生易簀之日 十二年之間 非有甚疾病大事故 未嘗不在老先生之側…”
학문뿐만 아니라 스승의 말씀과 행동까지도 독실히 배웠다
셋째는 스승 추모와 동료간의 학문 교류기로, 퇴계의 사후부터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의 약 7년 간이다. 간재는 퇴계 선생이 서거하신 후 3년 동안은 「輓章」, 「墓誌敍」, 「墓誌銘」, ꡔ溪山記善錄ꡕ, 「祭文」 등을 짓고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尙德祠를 건립하는 등 주로 선생을 추모하는 사업에 전력하였다. 그 후 33세에서 38세까지의 약 5년 동안은 동료학자들과 서신을 통한 학문적 교류와 토론을 활발히 전개하고 저술도 하였다.
마지막은 사환기로, 천거로 관직에 나간 뒤로부터 하세할 때까지의 약 18년 간이다. 간재는 38세 때 천거로 집경전 참봉에 제수된 뒤부터 56세로 1596년 모부인 박씨의 廬所에서 서거할 때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관직생활로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저술 활동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왕세자와 선조 임금께 왜적을 격퇴하기 위한 자세한 전술을 건의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사후인 광해군 을묘(1615)년에 衛聖一等功臣으로 錄勳되어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고, 그 뒤 오계書院에 제향되었다.
3. ꡔ艮齋集ꡕ의 刊行經緯와 內容
ꡔ간재(본)집ꡕ은 1752년 처음 활자로 印行하였고(이 초간본은 傳存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 초간본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1766년 8권 4책으로 재편하고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그리고 後刷本에는 「묘갈명」과 「행장」이 추각되어 있다. ꡔ간재속집ꡕ은 1829년 5권 3책으로 재편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985년에는 기존의 목판본은 물론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간재의 저술 등을 영인하여 ꡔ간재집ꡕ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이 지금까지 간행된 책 중에서 간재와 관련된 가장 많은 자료를 담고 있다.
ꡔ간재집ꡕ 상에는 「간재집 해제」(유정기)에 이어 목판본 본집·속집이, 하에는 필사본 8책·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본집은 모두 8권인데, 권8은 年譜 등 부록이므로 저자의 시문은 모두 7권으로 편차되어 있다. 속집은 모두 5권인데, ꡔ사서질의ꡕ·ꡔ주역질의ꡕ·ꡔ심경질의ꡕ(이함형과 합록)·ꡔ고문질의ꡕ·ꡔ가례주해ꡕ이다. 필사본은 모두 8책인데, ꡔ계산기선록ꡕ·ꡔ사서질의ꡕ·ꡔ주역질의ꡕ·ꡔ주서절요강록ꡕ·ꡔ주서절요기의ꡕ·ꡔ심경강록ꡕ·ꡔ심경표제ꡕ이다. 끝의 부록에는 기존의 문집에 빠져 있는 간재 관련 자료를 첨부하였다.
Ⅲ. 艮齋의 師弟 및 交友關係
1. 退溪와의 師弟關係
간재가 19세로 퇴계께 급문하였을 때, 퇴계는 그의 이름을 ‘德弘’으로, 자를 ‘宏仲’으로 지어 주면서, 그의 이름자의 뜻을 설명하고 그 뜻을 체득하도록 타일렀다. (또 후에는 ‘艮齋’라는 호를 지어 주기도 하였음). 간재가 일찍이 재질이 노둔함을 근심하니, 퇴계는 “공자의 문하에서 도를 전한 사람은 바로 자질이 노둔한 曾氏이다. 노둔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다만 노둔하고 독실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敎學詩 一絶을 지어 주었고, 주자가 여릉에 사는 제자와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를 손수 베껴서 간재에게 보내 면학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간재가 월천 조목(趙穆, 1524~1605)과 함께 퇴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으니, 퇴계는 “자네들이 ꡔ주역ꡕ의 효상(爻象)의 뜻을 정미하게 살펴서 자못 소장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여러 벗들에게 구해 보아도 (자네들 만한 사람을) 쉽게 얻지는 못하였네. 부지런히 힘써서 나의 여망에 부응해 주게.”ꡔ艮齋集ꡕ 下, 57면, 「溪山記善錄(筆寫本)」, “德弘 與趙月川侍坐 先生曰 君等精察易象之義 頗得消長之理 求之諸友 未易得 勉旃 以副余望”. 또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68년에 간행한 ꡔ국역 퇴계집ꡕⅡ( 언행록 (Ⅰ) 類編 敎人)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여기의 원문과 앞의 원문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다.
라고 말하면서, 가장 아끼던 두 高弟에게 은밀히 당부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또 일찍이 스승의 명으로 천체운동을 측정하는 기구인 선기옥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30세 때에 오천의 태조봉 남쪽 기슭에 오계정사를 창건하고 생도를 가르쳤는데, 그 堂名과 齋號는 모두 퇴계께 품정한 것이다. 간재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서 늘 스승을 모시고 독실히 학업에 정진하면서, 의문이 나면 질의하고 얻은 것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ꡔ간재집ꡕ에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간재가 퇴계께 비교적 많이 질의했던 책은 ꡔ사서ꡕ·ꡔ주역ꡕ·ꡔ가례ꡕ·ꡔ심경ꡕ·ꡔ주자서절요ꡕ 등이다. 이러한 학문적인 질의 문답을 통하여 간재와 퇴계 사이는 점점 더 깊은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퇴계가 임종시 간재에게 서적을 관리하라는 유명을 남긴 것이와 관련하여 유정기교수는 「간재집 해제」의 말미에서 “퇴계의 문하에는 실로 300餘人의 名士弟子가 있었지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篤學하고 가장 접근하기는 간재였기 때문에 퇴계는 임종때 간재께 遺命해서 그의 寶藏書를 관리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師道로 보면 간재는 퇴계를 無上한 스승으로 尊奉하였고 학문으로는 퇴계는 간재를 最愛한 제자로서 信任했던 것이니 그 師弟의 分이 보통과는 다른 것이다.”라 하였다. (ꡔ艮齋集ꡕ 上, 26~27면.)
을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스승의 사후에 ‘心喪三年’의 예를 지켰고, 「묘지서」·「묘지명」·ꡔ계산기선록ꡕ 등을 지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상덕사를 건립하는 등 추모사업에도 전력하였다. 이러한 퇴계와 간재의 돈독한 사제관계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2. 同門과의 交友關係
ꡔ간재집ꡕ에 나오는 56인과 타인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인물 21인을 합하면 문헌상으로 간재가 접촉한 인물은 아래의 77이다.

金김富弼·金富儀·金誠一·白見龍·朴允諴·李安道·金士元·具贊祿·金富倫·朴欐·南致利·金隆(道盛)·權好文·權宇(伊溪)·李교·金希仲·尹興宗(採蓮)·柳淇·柳成龍·李國弼·姜浩源(松巖)·任屹·李希淸(?)·金圻·許篈·趙穆·裵三益·盧守愼·孫興禮(君立)·李叔樑·琴蘭秀·鄭士誠·柳雲龍·柳景文(仲淹)·柳應霖(?)·金仁甫(?)·權景龍(施伯)·琴應壎·李咸亨·李寂·琴輔·張謹·李潑(景涵)·金垓·金蓋國·張汝山直(?)·金玏·禹性傳·鄭士信·李詠道·金就礪·禹世臣·李三熹(?)·申之悌·閔應祺·趙振·李文樑·吳守盈·琴應夾·權春蘭·宋言愼·金澤龍·裵應褧·文緯世·朴愼·李宗仁(改諱 華春)·鄭琢·琴悌筍·洪胖·李純仁·李洁·洪可信·兪大脩·金瞻·許鏛·朴宜·權應時

위의 인물들 중에서 姜浩源(松巖)·任屹 등 22인은 퇴계 문인이 아니나, 나머지 55人은 모두 ꡔ陶山及門諸賢錄ꡕ에서 그 이름이 찾아지는 同門들이란 점에 큰 특징이 있다. 또 동문 55인 중에서 대부분은 지역적으로 예안·안동 및 그 인근에 거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간재는 퇴계의 사후 동문들과 함께 퇴계집의 교정이나 상덕사의 창건 등 스승추모에 힘을 쏟았다. 아울러 그의 나이 30대 무렵부터 주로 동문들과 강학 내지 왕복토론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유운룡과 ꡔ역학계몽ꡕ을 강론하였고, 조목과 ‘未發已發’의 문제를 변론하였으며, 또한 권우와도 활발하게 왕복 토론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란수·남치리·정사성·김해·유성룡 등과 함께 강학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 동학 趙振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공부하다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부지런히 치료하여 병을 낳게 하기도 하였다. 간재가 종묘직장으로 재직시, 종 伊山이 종묘의 金銀寶器를 훔쳐내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종묘에 불을 놓은 사건으로 평은역에 유배되자 유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많은 동문들이 그를 위로하고 도와준 것ꡔ艮齋集ꡕ 上, 534면, 「艮齋年譜」, “時有舊守僕利山者 竊取宗廟金銀寶器 因放火廟中 欲滅其跡 火未起 有一守廟軍來告 先生方在直所 急令軍人上變告 又率他軍人急救火 火滅 命掌前後署僚及守僕 先生亦繫獄月餘 罪人伏誅 先生依原例 定配平恩驛 柳西厓贈詩云 得譴非由己 休官似返眞 ○是行也 柳判書成龍 金執義玏 金正言誠一 禹舍人性傳 權師傅宇 鄭典籍士信 李監察교 李參奉詠道 琴司評蘭秀 金僉正就礪 禹副正世臣 李廣尹三熹 皆以米布贈行 已而蒙放還家 敎授生徒”
을 보아도 그가 동료간에 매우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엇보다도 동문간에 그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갈암 이현일이 찬한 「간재행장」에서

賁趾 先生 南致利義仲이 일찍이 공과 더불어 ꡔ역ꡕ 復卦를 논하다가 마침내 말하기를 “오늘 그대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라 하였고, 松巢 權宇와 謙巖 柳雲龍公 또한 ‘그대에게 질의하여 의혹을 떨쳤다’는 말이 있다. 그가 선배 갈암에게는 선배이나 간재에게는 동료이다.
들에게 推重된 바가 이와 같았다.ꡔ艮齋集ꡕ 上, 560~561면, 「艮齋行狀」, “賁趾先生南致利義仲 嘗與公論易復卦 乃曰 今日爲君屈膝 松巢權公宇謙巖柳公雲龍 又有從君質疑祛惑之語 其爲先輩所推重如是”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동료들간에 그가 학문적으로 推重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간재와 학문적으로 많이 교유한 사람은 조목과 권우인 데, 그의 문집에는 이들 동문과 주고받은 자료들이 실려 있다. 간재가 죽자, 조목은 “斯文은 이제 끝났도다. 머리를 돌려보니 눈물만 흐르네.”라는 만사를 지어 간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Ⅳ. 艮齋의 學問과 思想
1. 性理學에의 傾倒
먼저 성리학에의 경도에서는 그의 문집 중 詩·書는 물론 특히 雜著를 중심으로 그의 성리학 세계를 心性論, 修養論, 爲學論 및 易學에의 沈潛으로 나누어 간략히 더듬었다. 간재의 성리설은 심성론에 집중하고 있다. 간재는 퇴계의 성리학을 그대로 전수하였으면서도 나아가 심성론에 대해 음양의 역학적 논리를 관통시키는 독자적 면모를 구축하였다. 간재는 33세 때 조목과 未發已發의 문제를 변론하였고, 權宇와의 토론에서 性과 道의 체용관계를 분석하면서 性體道用說을 전제하고, 이를 솔개에 비유하여 해명하였다. 간재는 36세 때 조목을 중심으로 여강서원에서 명 진청란의 ꡔ학부통변ꡕ의 강론에 참여하였다가, 이 책에 수록된 心圖를 분석하여 비판한 「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을 지었다. 간재는 변해의 마무리에서 진청란은 性情·體用, 未發·已發이라는 성리학에서의 기본구조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다. 즉 진청란은 性을 道心으로서 이해하고 未發의 性을 已發로 오해하고 道心인 惻隱·羞惡를 性으로 착각하는 터무니없는 과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陳淸瀾은 결과적으로 朱子를 찬양한다는 것이 도리어 朱子에 누를 끼치고 있다고 하였다.이상의 「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李完裁, 「艮齋의 性理學 世界 -辨을 중심으로-」, ꡔ韓國의 哲學ꡕ 제26호, 25~31면 참조.
간재가 성리학의 근본문제에 있어 진청란의 오류를 명쾌하게 辨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간재의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었나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재는 퇴계의 학문적 핵심문제였던 修養論의 문제를 계승하여 광범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敬, 涵養, 整齊嚴肅은 모두 주자에게서 퇴계를 거쳐 그가 계승하였던 居敬 수양론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知·行의 개념을 知의 內·外, 淺·深과 行의 動·靜, 先·後로 분석함으로써 수양론의 정신적 구조를 해명하고 있다.
간재가 ꡔ소학ꡕ에서 학문적 계기를 발견하였고, ꡔ대학ꡕ에서 학문의 체계와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시에서 엿볼 수 있고, ꡔ대학ꡕ에 대표적 쟁점으로서 ‘八條目’과 ‘絜矩’의 개념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간재는 퇴계문하에서 강의를 들었던 ꡔ주역ꡕ과 ꡔ역학계몽ꡕ에 대해 정밀하게 질의하여 ꡔ주역질의ꡕ를 이루면서 역학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간재는 河圖의 틀에 의거하여 「부부유별도」를 창안하기도 했거니와 賦나 詩를 통해 易理를 吟詠하였으며, 書나 辨·說·圖 등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학문세계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이란 한 편의 글은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를 雄辯하는 것이지마는 나아가 당시 우리나라의 성리학적 학문수준이 중국을 凌駕하는 높은 수준의 것이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與趙月川士敬辨未發已發」은 다 같은 퇴계 문하의 동문간에 있었던 학문적 교류이다. 조월천은 퇴계 문하의 고제이며 간재보다는 17년 연상의 선배이다. 그러한 월천이 艮齋에게 性理에 대한 문의를 했다는 것은 당시 동문간에 있어서도 이미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李堂揆가 찬한 간재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南賁趾가 公과 역의 復卦에 관하여 논하다가 ‘내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는 구절이 있다.” ꡔ艮齋集ꡕ 上, 547면, 「墓碣銘」, “南賁趾與公論復卦 而有屈膝又屈膝之句”
고 하였다. 南賁趾는 퇴계 문하에서 易에 밝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 南賁趾가 무릎을 거듭 꿇는다고 하였으니 간재의 역에 대한 조예를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역시 「묘갈명」에서 “權松巢는 편지에서 ‘의리에 밝지 못한 곳이 있어 月川에게 질의하여 보았는데 그 가르침이 분명하지 못하여 그대에게 가르침을 바랍니다.’고 했고, 柳謙菴은 ‘스승을 잃은 후 비록 의문이 나고 알지 못하는 바가 있어도 문의하여 바로잡을 곳이 없으니, 청하건대 ꡔ계몽ꡕ에 관하여 물어 보고자 합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당시 同僚諸友 사이에서 얼마나 받들렸던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ꡔ艮齋集ꡕ 上, 547면, 같은 글, “權松巢書曰 義理有未明處 質之月川 未見明敎 幸高明裁敎 柳謙菴書曰 一失先師 雖有疑晦 無所控正 請質啓蒙云 此可見一時儕友之所推重者也”
권송소는 간재보다 11년이나 年下인 후배이나 유겸암은 2년 年上의 선배이다. 이들이 모두 학문상 의문이 있을 때 간재에게 질의해 왔던 것이니 이당규의 표현대로 당시 同僚諸友들 사이에 있어서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가 널리 인정되고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학문내용이 거의 성리학에 관한 것이었으니, 여기서 간재의 성리학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었던가를 알 수 있다.李完裁, 「艮齋의 性理學 世界 -辨을 중심으로-」, ꡔ韓國의 哲學ꡕ 제26호, 36면.

2. 註釋書의 集大成
간재는 급문하여 퇴계의 역책할 때까지 12년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책을 가지고 항상 시측하여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질의하고 질의해서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하였으므로 퇴계문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주석서를 남길 수 있었다. (퇴계 강학자료의 최대 집성자)
현재 ꡔ간재집ꡕ에는 상당한 분량의 주석서들이 실려 있다. 즉 ꡔ간재집ꡕ 상에는 목판본인 ꡔ사서질의ꡕ, ꡔ주역질의ꡕ, ꡔ심경질의ꡕ(이함형과의 합록), ꡔ고문질의ꡕ, ꡔ가례주해ꡕ가 실려 있고, ꡔ간재집ꡕ 하에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인 ꡔ사서질의ꡕ, ꡔ주역질의ꡕ, ꡔ주서절요강록ꡕ, ꡔ주서절요기의ꡕ, ꡔ심경강록ꡕ, ꡔ심경표제ꡕ가 실려 있다. 필사본들은 독립된 저작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목판본보다는 분량도 많고, 요약되어 있지 않으며, 주가 더욱 상세하고, 간혹 토와 한글 번역들이 있어서 고어연구에 도움이 된다. 간재의 ꡔ사서질의ꡕ는 스승에게서 질의하여 교시받은 내용을 노트한 것으로, 이황의 ꡔ四書釋義ꡕ 手藁本이 임란의 병화로 소실되자 그것을 간행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고, ꡔ주역질의ꡕ는 간재의 역학에 대한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독창적인 내용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ꡔ고문질의ꡕ는 당시의 ꡔ고문진보ꡕ 주석 상황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이고, ꡔ가례주해ꡕ는 퇴계학파에서 처음으로 저술된 가례주석서로서, 이어서 등장하는 가례주석서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ꡔ주서절요ꡕ에 관련된 주석서로는 ꡔ주서절요강록ꡕ과 ꡔ주서절요기의ꡕ가 있다. 특히 전자는 주자 서찰 이해의 필수참고서로서, 주자학을 공부하던 당시의 학자들이 다투어 필사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ꡔ심경ꡕ과 관련된 주석서로는 ꡔ심경질의ꡕ, ꡔ심경강록ꡕ, ꡔ심경표제ꡕ의 3종이 있다. 특히 ꡔ심경질의ꡕ는 그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ꡔ心經質疑ꡕ는 ꡔ심경ꡕ에 관해 이황이 강의한 것퇴계는 특히 벼슬살이에서 물러난 50대 중반 이후부터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많은 제자들과 함께 ꡔ心經ꡕ에 대하여 자주 강론을 벌이면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ꡔ퇴계집ꡕ의 서간 중 ꡔ心經ꡕ에 대하여 논란을 벌인 제자는 조목, 황준량, 이정, 김부필, 김부륜, 유운룡, 권호문, 이덕홍, 이함형, 조호익, 이이 등 수십 명이 되고, 그 중에 조목, 김부륜, 이덕홍, 이함형, 정구, 조호익 등 6명은 단행본 저술을 남겼다.
을 ꡔ심경부주ꡕ의 편차에 맞추어 정리한 것으로, ꡔ간재속집ꡕ에 수록되어 있다. 간재와 천산재 이함형공의 합록으로 스승 퇴계의 교정을 거친 것이라 한다. 그 내용은 주로 ꡔ心經ꡕ의 要句와 人名을 해설한 것으로, 李咸亨이 이덕홍의 기록을 함께 참고하여 정리한 ꡔ心經講錄」과 대부분 일치한다. 책머리에 序·贊·心學圖 등이 있고, 제1편에는人心道心章 등 13장, 제2편에는 誠意章 등 8장, 제3편에는 牛山之木章 등 7장, 제4편에는 鷄鳴而起章 등 9장 및 後論說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ꡔ心經質疑ꡕ는 간재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서, 그 뛰어난 해설과 정연한 논지로 후인들이 다투어 필사하기도 하였다. 그 자체만으로 권3 전체를 내용과 분량에서 다른 질의서를 압도하고 있으며, 孝宗 년간에 조정의 경연에서 이 책을 참고 교재로 활용하였고, 다시 肅宗 년간에 국왕의 명으로 송시열 등이 보완하여 ꡔ心經附註釋疑ꡕ로 간행하는 등, 조선후기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내용은 ꡔ心經附註ꡕ에 나오는 인물들과 일부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고 있으며, 군데군데 이황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견해가 첨가되어 있다. 그 후에도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정정 내지 보완하여 저술된 책도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145곳의 오류 申龜鉉, 「芝山 曺好益의 哲學思想」, ꡔ韓國의 哲學ꡕ 제26호, 1998, 15면의 도표 참조.
를 바로 잡은 曺好益의 ꡔ心經質疑考誤ꡕ, 이 책에서 누락된 부분과 해석하기 어려운 자구를 뽑아 주석을 붙인 李象靖의 ꡔ心經講錄刊補ꡕ 등이 대표적이다. ꡔ심경질의ꡕ를 비롯한 간재유고의 편찬·정리에 특히 힘쓴 이는 간재의 외증손인 金萬烋였다.
3. 至極한 스승 尊慕
간재는 스승의 사후 「만장」, 「제문」, 「묘지서」, 「묘지명」 및 ꡔ계산기선록ꡕ을 짓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ꡔ계산기선록ꡕ이다. 이 책의 목판본과 필사본은 모두 ꡔ간재집ꡕ에 실려 있는 데, 전체적으로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木版本과 筆寫本은 체제와 條數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목판본은 16절 140조와 1571년에 저자가 쓴 「기선총록」을 수록한 뒤, 권말에 1665년에 쓴 김응조의 「발문」을 붙였다. 필사본은 권두에 1571년에 저자가 쓴 「서문」(「기선총록」과 내용 같음)에 이어 16절 115조를 수록한 뒤, 권말에 1665년에 쓴 김응조와 1666년에 쓴 김만휴의 「발문」을 붙였다. 이 책은 퇴계의 학문이나 인품, 생활 태도 등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많이 실려 있어 퇴계연구의 기초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며, 뒤에 편찬된 ‘퇴계언행록’에서도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간재가 스승인 퇴계를 얼마나 존모하였는지는 그가 남긴 많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간재는 퇴계의 생전에 書에서 이미 ‘夫子’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퇴계는 이에 대해 ‘부자’ 두 글자를 지우고서 답서에서 비웃음을 당할 것이니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夫子’는 존칭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中國文化大學, ꡔ中文大辭典ꡕ 二, 1587~1588면, 夫子條.
, 공자의 제자들이 오로지 공자만을 ‘부자’로 이른 뒤로는 후세에 ‘스승’의 칭호로만 쓰이게 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보통 ‘先生’의 의미보다는 다소 격이 높은 말이기에 퇴계는 자신을 일컫는 말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퇴계의 생각은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한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간재는 존경하는 스승께 이 말을 쓰는 것이 부당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제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부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월천과의 대화에서는 스승 퇴계를 참된 ‘聖賢’으로 표현했다. 
趙月川이 덕홍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聖賢의 모습(軀殼)이 있다.”하기에, 덕홍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平實하고 白直한 道理와 虛明하고 洞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어찌 단지 모습뿐이겠습니까?”하였다.ꡔ艮齋集ꡕ 上, 352면, ꡔ溪山記善錄ꡕ 上, “趙月川言於德弘曰 先生有聖賢軀殼 德弘曰 先生有平實白直底道理 有虛明洞徹底心事 豈特軀殼哉”

이 대화는 구체적으로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화 내용으로 추측해 보면 위의 편지를 받은 뒤로 생각된다. 월천은 단지 겉으로 보아 ‘聖賢의 모습(軀殼)’이 있다고 한 것에 비하여, 간재는 겉으로 성현의 모습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속으로도 성현의 마음까지 지녔다고 말한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權五鳳은 ꡔ언행통록ꡕ에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김학봉의 成德君子論, 조월천의 體道成德論, 이간재의 의 聖賢樣子論으로 정리하였다. ‘이간재의 聖賢樣子論’은 명백히 원문의 해석을 잘못한 데서 나온 그릇된 견해이다.
이는 퇴계에게 남 못지 않은 친자를 받은 두 고제가 퇴계를 평한 말로 묘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간재는 월천보다도 더 스승 퇴계를 존모하였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유가에서 쓰는 최상의 용어인 ‘聖賢’을 쓴 자체로도 그가 스승인 퇴계를 얼마나 마음으로 열복하였는지를 알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墓誌敍」에서는

아! 학문이 끊어진 뒤에 나셔서 전해지지 아니한 실마리를 얻어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며 道를 행하거나 숨음에 시종 법도에 맞은 분을 考亭(朱子)의 뒤에서 찾는다면 오직 선생 한 사람일 뿐이다. (중략) 중국 文士들이 「聖學十圖」를 읽고 종일 완미하면서 말하기를, “동쪽 나라(朝鮮)에도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있는가? 그의 學文은 程子나 朱子의 학문과 다름이 없다.”라 하였다. 使臣 洪天民이 南京에서 듣고 온 말이다. ꡔ艮齋集ꡕ 上, 482면, 「退溪先生墓誌敍」. 
라고 하였다.
간재는 여기서 더 구체적이고 自尊에 찬 평가를 내렸다. 곧 학문이 끊어진 뒤에 나셔서 전해지지 아니한 실마리를 얻어 시종 법도에 맞은 분을 朱子의 뒤에서 찾는다면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찾더라도 오직 퇴계 한 사람일 뿐으로 주희 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는 퇴계라는 道統說을 세우고, 중국 文士들이 평가한 말을 인용하여 퇴계의 학문 수준사실 퇴계학의 수준은 그가 재세할 무렵에 벌써 세계적 정상 수준이었다. 주희가 몰한 후 3백년 동안, 중국 학술계의 연구 성과는 퇴계와 같은 제 1류의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경지였으며, 당시의 사상계를 풍미하던 양명학의 학적 체계 역시 醇正 철학과는 거리가 먼 선험적이고 고유한 봉건 도덕이념에 지나지 않았음을 볼 때 간재의 이러한 평가는 매우 온당한 것이라 생각된다.
을 중국의 程子나 朱子와 같은 수준이라고 당당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간재는 퇴계가 그의 스승이라서 맹목적으로 찬양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퇴계의 학문수준을 근거로 객관적 입장에서 위와 같은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간재의 이러한 평가는 다른 여느 문인들보다도 구체적 증거까지 들어 퇴계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서 간재가 퇴계를 얼마나 경앙했는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려니와, 주자이후 제 1인자라고 하여 조선의 퇴계가 아닌 ‘세계의 퇴계’라고 자존에 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는 점에 그 의의는 대단히 크다 하겠다. 간재 이후 퇴계에 대한 그 어떤 사람의 평가도 간재의 평가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퇴계를 ‘東邦의 朱子’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정순목은 ꡔ간재집ꡕ에 나와 위의 기록에 대해 “洪天民홍천민(1526~1574)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達可, 호는 栗亭. 본관은 南陽. 우계 성혼(成渾)에게서 공부했으며, 1553(명종 8)년에 급제하여 벼슬은 도승지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駱峯 申光漢이 그를 시험한 시를 보고 경탄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은 牛溪의 문인으로 언제 중국에 다녀왔는지는 상고할 수 없으나 「十圖」를 가지고 가서 江南士類와 교류하였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퇴계가 「십도」를 완성한 직후의 무렵이라고 짐작된다. 丁淳穆, 「臺灣·中國에서의 退溪學 硏究」, 같은 책, 19면.
”고 하였다. 또 ꡔ廣瀨本 退溪先生 年譜補遺ꡕ(李野淳 찬)에서는 ꡔ간재집ꡕ에 실려 있는 홍천민이 南京에서 듣고 온 말이 1568(무진)년 條의 말미에 聖學十圖 및 箚子를 올린 사실 다음에 실려 있는 것 정순목, ꡔ退溪正傳ꡕ, 지식산업사, 1992, 528면.
으로 보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한편 權五鳳은 퇴계가 역책하기 한 해 전인 1569년 10월에 聖節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던 西厓 柳成龍에 의해서 퇴계의 「성학십도」가 비로소 중국에 알려졌다고 하면서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ꡔ간재집ꡕ에 있는 이 기록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 學問的 成果의 現實에의 適用(實用性의 重視 - 科學者的 面貌)
간재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兵略·算學·曆法에도 정통하였다. 역법에 있어서는 선기옥형의 제조와 「육십갑자음양변」·「연월일시운세설」 등이 있고, 산학에는 「산법도」가 있으며, 병략에는 「상왕세자서」와 「상행재소」에서 禦倭策을 진술한 것이 있다. 이는 모두 간재가 학문적 성과를 현실에 적용시키는데 중점을 둔 예로서 그가 얼마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간재가 스승의 명으로 만든 선기옥형선기옥형을 만든 연도가 庚午年(1570년)이라는 ꡔ간재연보ꡕ의 기록에는 다소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동문인 文緯世(號 楓菴)의 연보에 의하면 간재가 퇴계로부터 선기옥형 제작을 命받은 해는 기미년(1559년)이고, 퇴계의 편지에 의하면 간재가 만든 오래된 선기옥형과 혼천의를 제자인 金富儀(號 挹淸亭)에게 수리를 부탁한 해는 정묘년(1567년), 수리를 마쳐서 이를 돌려 받은 해는 무진년(1568년)이다. 퇴계가 김부의에게 부탁할 당시에 이미 만든 지가 오래되었다고 했으므로 정묘년에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기미년에 제조의 命을받아서 채씨(蔡沈)의 소주를 깊이 연구하여 정성껏 제작하려면 어느 정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수리하는 데 김부의도 해를 넘겼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 만드는 일이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를 넘겨 庚申年(1560년)에 비로소 완성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은 지금 도산서원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간재가 약관의 나이에 이와 같은 과학기구를 제작하였다는 것은 자연과학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간재는 「산법도」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작성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영춘현감에 부임한 계사년(1593) 4월 이후로 추정된다. 이 「산법도」는 간재의 산학에 대한 깊이를 알 수 있는 글로, 그가 목민관으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간재는 상소문에서 지상전을 위해서 왜군의 전술과 병기의 장단점을 정확히 분석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陣法을 고안하고 「陣械圖」를 작성하였으며, 이 진법에 따라 오늘날의 전차에 해당하는 龜甲車를 맨 앞에 세우게 하고, 적의 조총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활은 물론 鐵打와 稜杖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해상전을 위해서는 龜甲船을 제작하고 왜선의 정박을 막기 위해 沈水眞木箭을 설치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런데, 간재의 귀갑선 관련기록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李家源은 이미 태종 때에 이미 있었던 龜甲船을 간재가 임란을 당하여 사용할 것을 진언한 것으로 보아, 마치 태종 때에 있었던 龜船과 간재가 창안한 龜甲船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며, 권오봉 역시 간재가 임란을 당하여 옛날에 존재했던 귀선을 복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원’은 옛날에 존재하던 물건을 원래대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런데, 간재는 종래의 거북 모양의 배라는 의미인 ‘龜船’과는 다른 의미를 함축한 ‘龜甲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굳이 이해를 돕기 위해 상소문의 말미에 비록 간략하지만 거북선 그림으로는 최초인 「龜甲船圖」1999년 2월 13일(토) 오후 8~9시 사이에 KBS 1TV를 통해 방영된 「역사스페셜 -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라는 프로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간재의 상소문에 나오는 ‘頭設伏弩(뱃머리에 쇠뇌를 매복시키고)’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머리가 들락거렸다고 하였다.
를 첨부하였다는 점, 나아가 무엇보다도 간재 자신이 분명히 ‘앞의 것을 이어받은 바도 없고, 뒤에 시험한 바도 없습니다(前無所承 後無所試).’라 하여 직접 창안하였음을 밝힌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두 설은 다소 수긍하기 어렵다. 朴惠一은 간재의 귀갑선이 이순신의 창제귀선과는 구조상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고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순신의 창제귀선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두 거북선을 대비해 볼 수 없는 실정이라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특히 간재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이덕홍이 설계한 귀갑선도가 거북선의 원형여부는 학계의 인정을 못 받고 있지만 안동유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유림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덕홍이 제작한 거북선의 설계도는 柳成龍에게 넘어가 이순신에게 보내졌다는 설과 이황의 문인이며 이순신의 형인 李堯臣을 통해 이순신에게 전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덕홍의 귀갑선도와 이순신의 거북선의 상관관계를 확증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매일신문, 「嶺南學脈」 73회 (艮齋 李德弘 下)에서 부분발췌.
李有瑢도 ꡔ艮齋 李德弘의 學問과 思想ꡕ(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제14차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1997) 所載 「艮齋先生의 上疏文 2편에 對한 小考」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艮齋先生의 上疏文 2편에 對한 小考」의 말미에서 “어쨌든 간재선생의 귀갑선도는 그것이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한 문인관리에 의하여 그려진 우리 나라 고유의 一種特殊武裝船의 도안이고 아마도 현존하는 우리 나라 最古의 船圖라는 점에서 소중한 史料의 하나로 취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간재의 龜甲船圖는 그것이 비록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龜船圖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 설계나 구상은 상소문 이전에 같은 퇴계 문인이었던 李堯臣先生(忠武公兄)이나 西厓先生을 통해서 충무공에게 전달되어 거북선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推論할 수 있다.”라 하였다.

여하튼 당시 학자들이 대부분 성리학에만 전념하고 과학이나 기타 이용후생을 위한 기술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는 비교적 무관심했던 것에 비한다면 위의 간재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Ⅴ. 退溪門下에서의 位置
종전의 주요 논의에서 간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간재의 경우 나름대로의 학맥을 이어가지 못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 아닌데다가 퇴계 문인들에 대한 연구도 미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월천과 간재는 퇴계께 친자를 입고 심열·성복한 제자로 학풍과 삶의 자취상 스승에게 가장 근접했으므로조목과 이덕홍 두 사람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스승을 가까이서 모시고 독실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서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스승의 사후에는 心喪三年의 예를 다하였고, 나아가 문집의 교정이나 스승의 언행기록을 비롯한 추모사업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들의 일생에 있어서 스승 퇴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어느 제자들보다 컸던 관계로 이들의 저술에는 스승 퇴계와 관련된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인 지도 모른다. 월천과 간재는 퇴계께 親炙를 입고 心悅·誠服한 제자로 학풍과 삶의 자취상 스승에게 가장 근접했으므로, 마치 孔門의 顔子(月川)나 曾子(艮齋)와 같은 위치로 비유된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퇴계의 제자를 논하는 것은 後響에 치우친 견해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근자에 간재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여 퇴계 문하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금장태는 ꡔ退溪學派의 思想ꡕ Ⅰ(집문당, 1996)에서 퇴계학파의 비중 높은 인물로, 퇴계로부터 직접 훈도를 받은 제자들 가운데 趙穆·金誠一·李德弘·柳成龍·鄭逑·曺好益의 6명을 골라 다루었다. (*이 책은 계문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이미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 한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서는 ꡔ退溪門下 6哲의 삶과 사상ꡕ(예문서원, 1999)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 나오는 6명은 우연히도 금장태의 ꡔ退溪學派의 思想ꡕⅠ에 나오는 퇴계제자와 일치하지만, 철학·문학·교육·예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 검토한 내용을 실은 것이 특징이다.
위의 퇴계문하 6철 중에서 퇴계가 보낸 편지의 수, ꡔ퇴계집ꡕ 편찬시 관여도, ꡔ퇴계언행록ꡕ에 실린 기록 건수, 퇴계와 관련된 추모 기록, 사승 관계 기록 등 여러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간재는 퇴계문하에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Ⅵ. 結 論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단히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접근이므로 간재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저 어설픈 밑그림을 그린 정도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간재에 대해선 퇴계의 다른 고제에 비해 그리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간재에 대한 심학·경학·문학·역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밀도있는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간재의 형상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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