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다만 마음이 어리석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모름지기 대선지식의 지시(指示)와 가르침에 의지해야만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홍인(弘忍) 화상이 계신 곳에서 한 번 법문을 듣고서 문득 깨달아 즉각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교법(敎法)을 전해 주어 도를 배우는 자로 하여금 문득 깨닫게 하여 자신의 본성을 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최상승법을 바로 알고 바른 법을 곧장 보여주는 대선지식을 찾아가야 합니다. 선지식에게는 교화하여 본성을 보도록 해 주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 있으니, 모든 선법(善法)이 선지식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자성, 불성,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 다만 마음이 분별에 뒤덮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이미 갖추고 있는 반야지혜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이 분별로 만들어 놓은 환영 같은 세계를 진짜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래부터 갖추고 있던 반야지혜를 깨달아 견성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바로 대선지식의 지시(指示)와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의 길이다. 방법 아닌 방법이며, 길 아닌 길이다. 이것이 바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길이다.
위대한 선지식은 곧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보여 줌으로써 자성을 보아 성불하도록 이끈다. 이것이 선(禪)이다.
선에 대선지식, 스승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스스로 견성하고, 원만하게 보임을 이룬 대선지식을 만나, 직지인심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선지식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수행하라’는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매 순간, 법을 설할 때마다, 일상생활의 한 가운데에서, 언제나 곧바로 마음, 불성, 본래면목을 가리켜 보인다.
제자가 스승에게 “도가 무엇입니까?”, 혹은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때, 어떤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임으로써,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마음을, 불성을 가리켜 보여준다. 이것이 곧 직지인심이다.
또 어떤 스님은 “할!”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한 대 때리기도 하고, 혹은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막대기”를 말하거나, 혹은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마음을 곧장 확인시켜 준다. 이런 방편이 모두 불성을 지시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중생들은 그런 행위나 말을 듣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거나, 그 행위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분별이다. 그렇게 해서는 영겁이 다하도록 노력하더라도 자성의 티끌 하나도 보지 못한다.
스승이 곧장 불성을 지시해 가리켜 보여 줄 때, 제자는 그저 모를 뿐이다. 왜 모를까? 스승은 분명히 명명백백하게 자성을 보고 자신이 보고 있는 자성을 가리킬 뿐이지만, 제자에게는 여전히 자성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분별된 대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수행법에 있어서는 스승이 지시를 하여 법을 보여줄 때, 제자의 자세가 중요하다.
제자는 스승의 지시를 받자마자 습관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모르고 답답해야 한다. 그저 갑갑할 뿐이다. 털끝만큼이라도 헤아리거나, 알 것 같다거나, 경전의 가르침을 끌어와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틀렸다. 그것은 공부의 길이 아니라, 분별의 길이다.
스승은 법을 지시해 보인다.
“마른 똥 막대기야”, “뜰 앞의 잣나무야”, “오늘 날씨가 좋구나”, “악!”, “차나 한 잔 하거라”
혹은 한 대 때리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스승이 온 존재로 보여주는 자성(自性)이며 불성이다. 스승의 직지인심이다.
‘저게 무슨 직지인심이야?’, ‘저 말이 내 불성을 가리키는 거라고?’ 하면서 중생의 분별은 끊임없이 올라올 것이다. 마른 똥막대기를 이리 저리 살피면서, 내 눈에는 똥막대기만 보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저 똥막대기에서 갑자기 불성이 보이리라는 생각을 가진다. 끊임없이 온갖 의지와 생각과 노력을 일으켜서 분별하고 생각하고 체계를 세우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다 해 보라. 결국에 그 노력 끝에, ‘도저히 알 수 없구나’, ‘해도 안 되는 구나’ 하는 절망감이 들 것이다. 바로 그 절망감이 공부다. 내 의지가 꽉 막혀야 한다. 유위법(有爲法)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눈 뜨고, 저절로 무위(無爲)가 되어, 그저 진리에 완전히 내맡기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진짜 공부다.
그래서 선의 스승들은 법문을 들을 때, 머리로 듣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 아니 해도 해도 자꾸만 머리가 작동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그저 선지식의 법문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대선지식의 법문을 듣다보면 저절로 머리가 쉬어진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이끌어 주는 분이 바로 선지식이고, 그 힘이 곧 선지식의 방편력(方便力)이요 보살의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이기 때문이다. 선지식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법문을 듣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분별이 조금씩 사라지고, 도무지 알 수 없고, 해도 안 되고, 무기력해 지지만 결코 물러설 수 없으니, 계속해서 법 앞에서 버티고 또 버티게 된다. 이것이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이다.
포기하지 않고 이 답답하고 망막한 ‘모를 뿐’의 법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꽉 막힌 의식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불성이 저절로 제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이 몰록 단박에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언하대오의 소식이다.
이처럼 견성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직지법문에 귀기울이다보면 저절로 무위(無爲)로 일어난다. 내가 애써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가장 좋은 길은 참된 대선지식을 찾는 것이고, 그 선지식 앞에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 공부는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참으로 쉽다. 선지식이라는 바른 스승만 만나면 한없이 쉽고, 삿된 스승이나, 여전히 방편에 사로잡힌 스승을 만난다면 어렵고도 어려워지고,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가며 시간을 버리기 일쑤다.
바른 스승을 찾으라. 그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 그 선지식의 회상에, 그 공부의 승가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라. 꾸준히 법회에 참석하여 법문을 들으라. 나를 완전히 스승에게 내맡기고 할 일 없는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이 참된 공부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