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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사랑산악회] ☆… 함양의 삼봉산, 지리산 연봉의 장관을 조망하며…(3)
* [함양]→ (인월 방향 24번 국도-1023번 지방도로)→ 오도령(悟道嶺 773m, 智異山第一門)→ 산신각→ 오도산 능선길(지리산의 장관, 27km 연봉의 파노라마)→ 오도산(1,035m)→ 9부 능선(헬기장, 점심)→ 삼봉산(1,186.7m)→ (하산길)→ 삼봉산 능선→ 등구재→ 지리산 둘레길→ 창원생태마을→ 동구(승차)→ 함양(함양집 별미 ‘어탕국수’)→ (귀경, 함양 저녁 8:30 출발)→ 서울 군자역 도착(밤 11:50)
☆… 드디어 등구재에 이르렀다. 등구재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창말)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에 걸쳐 있고, 옛날 함양에서 제안재와 오도재, 등구재를 넘어 남원의 산내와 운봉으로 왕래하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길목이다. 고갯마루에 따로 해설판이 있는데 거기에 시적인 분위기로 등구재의 사연을 전한다. 자연과 인간이 아름답게 조화된 서정시 같은 글이다.
거북등을 닮아 이름 붙여진 등구재
서쪽 지리산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법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이다.
경남 창원 마을과 전북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 가는 길,
새 색시가 꽃가마 타고 넘던 길이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이가 드물지만
되살아난 고갯길이 마을과 마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것이다.
☆… 그래서 지금의 등구재는 지리산 둘레길의 주요 길목이다. 선두그룹에 이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간 대원까지 거의 등구재에서 도착했다. 10여 분이 지난 후 우복대장이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선두의 길을 안내하고, 부상 대원을 태워가기 위하여 불러 놓은 이곳의 택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두는 대원들을 모시고 아침 버스 안에서 안내한 대로 백운산-금대산의 능선을 타지 않고 창말(창원마을)의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하산하는 노정을 잡았다.
▶ 우리가 하산하고자 하는 창원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둘레길은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과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을 잇는 19km의 길목을 말한다. 지리산 둘레길의 시범 구간으로 조성된 이 길은 지리산 북부 지역인 남원시 산내면 상황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 잇는 옛 고갯길인 등구재(삼봉산-금대산의 안부)를 중심으로 다랭이논과 산촌마을을 지나 임천강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삼봉산-금대산의 등구재를 중심으로 장대한 지리산 영봉이 이마 위로 건너다보이는 산언저리를 돌아가는 길인데, 전라도의 장항마을에서 시작하여 서진암을 거쳐, 상황마을에서 도계(道界)인 등구재를 넘는다. 경상도의 첫마을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과 의중마을 지나 모전마을 용유담에 이르는 둘레길을 말한다.
☆… 우리는 등구재에서 산간도로를 따라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창원마을로 내려왔다. 산길의 주위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산 위에는 아직 생명의 기색이 보이지 않고 있는데, 산 아래의 밭두렁에는 쑥과 냉이를 비롯한 봄나물이 파릇파릇 자라나고 그 주위에 버드나뭇가지에는 연두빛 움이 노릇노릇 살아나오고 그 뒤의 산록에는 짙푸른 전나무 군락지와 검푸른 장대한 소나무 숲 등이 층을 이루며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산행이 지체되어 넉넉한 마음으로 감상할 여유는 없지만 순간이나마 이렇듯 자연의 싱그러운 생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 그런데 우선 최선두의 행방이 묘연했다. 잠깐 사이에 대열이 끊어진 것이다. 아직도 산에는 부상자를 포함한 후미군이 있고 부상자를 관광버스까지 수송하기 위해 택시를 부른 상태인지라 서둘러 마을길로 내려 왔다. 길은 이정표의 둘레길이 아니라 옛날부터 등구재를 넘어 전라도-경상도 사람들이 오고가든 창원마을로 직접 통하는 길이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오다가 예기치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다랭이밭에서 제초기를 메고 일을 하던 중년의 농부 한 사람이 아주 불쾌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왜 이 길로 내려오느냐? 여기는 지리산 둘레길이 아니다. 저 위에 둘레길 표지판이 있는데, 뭘 보고 다니냐? 눈도 없냐? 이 길은 개인의 사유지인지라 통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순간 참 당혹스럽고 황당했다. ‘아니 어디든 나 있는 길을 가는데, 개인 땅이니 가면 안 된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초행이라 잘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질타와 훈계조의 사설이 멈추지 않았다. ‘리더가 누구냐? 제 길도 못 찾아 다니냐?’ 그래서 또 ‘죄송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불쾌한 고성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기분을 수습하고 나서 좀 따져들까도 했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이런 경우가 없다. 세상에! 나 있는 길을, 그것도 분명 아주 오래된 옛길이다. 그리고 야박한 인심에 아주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위로 올라갔다. 농부의 마음도 좀 이해가 가기는 한다. 자기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외지인들이 유락하는 모습이 심히 눈에 거슬리고 아니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좀 떨어진 밭두렁 아래에서 나물을 뜯던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해 가며 그냥 내려가라고 했다. 시골 할머니의 인정과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성가시게 다투기가 싫어 그냥 올라왔다.
☆… 그래서 우리 일행은 다시 위로 올라가 ‘지리산 둘레길’의 표지를 따라 삼봉산 아래의 언저리를 깎아서 만든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서 걸었다. 시범지구로 지정되어 급조한 둘레길이었다. 팍팍한 시멘트길이다. 산을 깎아내어 토사가 그대로 노출된 산길은 호젓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신선한 자연의 정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농부의 언사 때문에 받은 불쾌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산록은 음식점이나 휴게소를 만들기 위해 장대한 소나무를 다 베어내고 광범위하게 산비탈을 깎아서 택지를 조성해 놓았다. 둘레길을 중심으로 한 상혼이 무자비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꼭 이렇게 해서 길을 내어야만 하는가.
☆… 삭막한 둘레길을 걸으며 우뚝 솟은 삼봉산의 봉우리가 아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그리고 길 주위에는 장대하게 자란, 싱싱한 소나무 군락이 허기진 나그네의 안복을 넉넉하게 채워 주었다. 산을 넘어가는 저녁 햇덩이를 등에 지고 그렇게 딱딱한 시멘트 길을 돌아 돌아 걸었다. 그렇게 아주 멀리 돌아서 창원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이 둘레길도 어차피 창원마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좀 전의 농부가 막았던 길로 와도 이 마을이다. 야박한 농부의 마음이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길로 돌아오면서 누리는 행복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둘레길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바라보이는 맞은 편 지리산 연봉의 거대하고 장엄한 모습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을 고스란히 받은 하봉-중봉-천왕봉-제석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웅봉들이 오늘 하루의 마지막 장관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 창원(昌元)마을에 들어섰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이다. 조선시대 마천면에서 세금으로 거둔 차와 약초 곡식을 이 마을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오도재를 넘어 지게로 함양까지 져 날랐다고 한다. ‘아래등구’라 하였으나 남원시 산내면 중창리로 넘어가는 ‘등구재’가 있고 백 씨, 양 씨가 살았다는 ‘백양골’이 있다. 마을 입구에 조선 중기 강개암 선생께서 수동 효리에서 들어와 시를 읊으며 놀았다는 ‘독무정’(구송정)이 있고 후신 양성을 위해 글을 가르치는 성당 ‘양진재’가 있다. 강개암 선생의 관이 지금도 김해 김 씨 집에 보관되어 있으며 열녀 김종윤의 처 완산 최 씨의 지려가 있다. 조선 시대 선조 때 고성 이 씨가, 인조 때 김해 김 씨와 거창 유 씨가, 경종 때에는 곡부 공 씨가, 영조 때는 보성 오 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다.
☆… 마을의 위쪽에는 <창원산촌생태마을>이라 하여 최신식 시설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어린이나 학생 등의 탐방객을 위하여 강의실과 체험활동을 위하여 프로그램 교실, 휴게실 그리고 숙소동이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골 깊은 삼봉산 아래 천하의 깊은 산골에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지방자치단체가 투자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산촌마을’이라는 입간판이 함양군의 이름으로 내걸려 있다. 산골마을의 골목도 구석구석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한 집 건너마다 민박집을 개설해 놓고 작은 간판을 내걸었다. 어느 집의 골목길 앞 돌담에 아주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든 입간판이 걸려 있다.
이렇듯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모든 관민이 마음을 모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아까 농부가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마을로 들어가는 우리들을 박대하듯 길을 막았다. 물론 개인의 비좁은 소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 해가 백운산-금대산 산너울을 넘어갔다. 저녁 6시 40분, 창원마을의 동구에서 집결한 산우들이 부상자를 싣고 오는 버스에 올랐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출발 예정시간보다 거의 3시간 가까이 지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산행의 출발지였던 오도재를 넘어 함양읍으로 들어갔다. 오늘 삼봉산 오는 길에, 함양이 친정인 회장의 부인께서 이곳의 별미 ‘어탕국수’를 내겠다고 미리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함양읍내 중앙시장 안쪽에 위치한 어탕전문 <함양집>, 얼큰하고 구수한 어탕국수는 참으로 별미였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으니 모두들 허기진 상태였다. 어탕국수는 온몸을 훈훈하게 채워오는 행복이었다. 우리 산우들을 위하여 고향의 별미를 맛보게 해주신 부인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 함양에서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출발한 것이 저녁 8시 30분이었다. 아주 많이 늦었다. 경부고속도로의 버스전용차로제도 저녁 9시 이후에 해제 되었으므로, 우리의 관광버스도 도로를 메운 수많은 차량의 물결 속에 들어가 지체에 지체를 거듭했다. 서울 군자역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 무렵이었다. 먼 곳에 집이 있는 대원들은 무척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예정 시간보다 거의 3시간이 늦어버린 것이다. 산에서의 부상 사고와 산행 중 대열이 끊어지고 후미의 지체로 인해 벌어진 결과였다. 사고를 당한 산우의 부상이 걱정이 된다. 쾌유를 빈다!
[에필로그] 함양의 주산, 삼봉산과 오도재의 여운…
☆… 참으로 먼 길을 다녀왔다. 시간이 지체되어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백두대간 남단으로 거대한 산군을 이루고 있는 지리산의 장엄한 위용을 바라보며, 지형적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인 칠선계곡과 천왕봉으로 들어가는 오도재 관문에서 시인묵객들의 문향을 접할 수 있었으며, 문화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함양의 곳곳에 얽힌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비록 오가는 길이 멀고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천하의 명승과 선현의 발자취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고단한 만큼 보람도 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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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리산 둘레길은 옛정취를 살려 흙길이었음 하는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잘보고 갑니다. 선배님 다음 산행 때 뵙겠습니다
설레설레따라만다니다..고문님에후기을읽으며..아!감탄하며 다시산행하는기분을느낌니다..예쁘게찍어주신사진도 감사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