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바랐던 우리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때 태몽도 아들이었단다. 그래서 그당시 구하기도
힘들었다던 어른 팔뚝만한 잉어도 나 덕분에 아버지께서 구해오셔 고아서 드셨다고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아들로 기대했던 우리 엄마의 열달 동안의 꿈이 나의 출생과 더불어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너무도 서운했었을 우리 엄마는 그대신 나를 남장을 시키고 머리도
남자아이들 같이 짧게 만들었다. 내가 계집아이같이 머리 스타일을 만든것은 겨우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난 힘도 셋고 (잉어덕분?) 집에서 남자아이 노릇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아들에 대한 대리만족 이었던것같다.
취학전 나의 동네 친구들은 여자보다 오히려 남자들이 많았고 난 그들을 따라 산에 토끼 잡으러 가기도하고 이른봄에 서악사 꼭데기에 참꽃을 따러가기도 했다.
흑응산 우리 초등학교가 잘 내려다보이는곳에 난 내 비밀 참호도 하나 만들었는데 그곳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든해까지 보존이 되었었다.
어린 마음에서도 난 여자 친구들은 약하기 때문에 싸우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여사도 정도로 착각했었다.
내가 유일하게 싸운 여자친구는 내 기억에 단 한사람인데 그녀는 우리집 맞은편에 살았던
권순이였다.우리 카페에도 가끔 참여하는.
순이네는 정미소를 하는데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이었던것같다.하루는 그녀가 우리 엄마는
쌀을 찧어가도 돈을 안준다는 것이다. 나는 챙피해서 엄마에게 왜 돈을 안주냐구 물었드니
외상을 한다는 것이었다.난 도둑 취급을 하는 듯한 순이를 용서 할수없어 그길로 뛰어가서
순이를 두들겨 팼는데 가까이 사시던 박범수 선생님 부인이 여기 사람 죽인다고 동네에 구원을 요청했을정도였다. 그뒤로 우리 둘 사이는 서먹해져서 대화가 없어졌는데 지난번 예천에서의 총동창회때 수십년 만에 본 그녀의 변신은 정말 너무 놀라웠다. 오늘 이 지면을 빌려
사과를 정식으로하고 그땐 우린 너무 철이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그리고 초등학교때 두번 남자아이와 싸움를 했는데 다 일방적인 나의 KO승이었다.
시장에서 대영상회라고 포목점을 했던 장봉구네가 우리집 뒷쪽에 살았는데 아마 내가 일학년이거나 그보다 더 어렸던것같다. 왜 싸웠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를 업어치기를 했는데
땅바닥에 나보다 더큰 덩치가 나가떨어졌다. 그리곤 난 우리집으로 달아났는데 나중에 봉구가 양손에 돌 두개를 들고 울며 씩씩거리며 우리집에 찾아와 나를 때리겠다고 밖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뚫어진 문구멍으로 그를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이글을 쓰면서 웃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싸움은 내가 3학년때. 우리 여자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노는데( 지금도
그때의 그의 얼굴은 기억하는데 이름은 모름) 한 남자 아이가 공을 가로채어 달아 났다.
감히
내 앞에서.나는 달리기를 잘했다. 그를 곧 뒤따라가 공만 뺏어 온것이 아니라 나의 기술을 또 보여줬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배우지도 않은 유도의 기술을 썼던것같다.
커서 서울 YMCA에서 2년간 유도를 미용체조 삼아 배웠다. 불쌍한 남자 동기 역시 운동장 바닥에 넉다운이 되었는데 그때 우리학교엔 강남구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호미를 들고 매일 다니셨다. 그 광경을 목격하시고 조회 시간때 하신말씀, 여학생이 남학생을 패대기첬다고.
여자가 맞았으면 혼찌검을 하셨을텐데...
장한덕씨가 앨범을 보여 줄테니 그 동기 얼굴을 찾아 달란다.
내 아명이 무던이듯이 천성이 무던했던(자아자찬) 내게 (불의를 보면 못참지만)그이후엔 어떤 불상사도 생기지않았다.
첫댓글 취학전에 서악사뒷산에 참꽃을 꺽고 토기를 잡으러 갔다면 참으로 대단한 기질이었구먼
영주 넌 어린시절에도 씩씩했단다 아주 용감하고 남성미가 비슷하게 있다고나 할까 옛날에는 남자를 원했지 키워서 아들에 대한 보상 심리의 한국 여성의 본곤적인 사상일게야 너의 엄마도 마음속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서운함에서 아들대리 로 남성복을 시켰다고나 할까
흥미진진한 김영주군의 유년시절의 이야기가 영화 '친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네. 나는 왜 이런 씩씩하고 용감한 기억이 없을까?
영주야 너는 대단했지 나는 잘알지 나역시 골목대장 했거든 누구든 내앞에선 꼼짝을 못했찌 철없던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는다
고수(?)끼리는 안 싸우지요.그동네 피해 다니면 되고.서로의 나와바리를 침범하지 않고 살았어요.서부(학교)의 김두한(영주)이지요.그 때만해도 사심이 없었고,낭만과 의리의주먹 김 영 주!! 장봉규도 우리반인데 코풀래기였죠.권오현이보다 한 수 높았을걸..그런데 왜 서본동은 코풀래기가 많았지?
그때는 사심이 없었고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같네.봉규는 그때 귀가 잘안들렸었지 무척 고집이세고 길안든 황소같았는데 막상 엎어치기를 해놓고나니 겁이 났지 그래서 집으로 도망왔었지,봉규네 집엔 큰 김나무가 있었는데 많이 따먹었고 그집뒤 공동우물에서 사람들이 빨래도 했는데,정규는 알겠네.
또 오해하시고...당시 조폭계의 일반적인 이야기예요. 김두한시절이니까. 영주씨 그때나 지금이나 사심 없는 건 누가 모를까? 모르는사람 나와 보라 그래, 업어치기로 그냥...
권오현이에게 코플래기 하고 불렸지 권오현이왈 씨바 내가 어른인데 도 코플래기야 지금은 코않흘려 죄발 코플래는 잊어주라고 하더라
영주야, 재미있다. 너의 좋은 성격은 네 어머니 교육의 결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