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마가복음 11장 1절에서 6절 말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미리 제자들을 보내어 나귀새끼를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한마디에 나귀주인은 나귀를 내놓습니다. 미리 그렇게 하기로 예약을 해 놓았던 것인지, 주인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냥 신적인 권위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나귀를 내놓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쓰시겠다고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재물, 시간, 재능.. 사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주신 것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이 필요할 때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물로 받은 것들도 일단 우리 수중에 들어오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내놓기를 어려워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막상 그것을 쓰시겠다고 하실 때는 한 발 물러섭니다. 그리고는 더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쓰임받는 기쁨입니다. 나의 무지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테레사 수녀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손에 쥐신 작은 연필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연필로 큰 사랑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연필들은 쓰임 받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써도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