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씨 씹던 날을 기억하며

[감나무]

	수박씨 씹던 날을 기억하여
	사이버서당

 옛날 유(柳)씨 성을 가진 진사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조석을 제대로 끓이지 못하였다. 게다가 또 흉년까지 만나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다. 때는 기나긴 여름이었는데 닷새 동안 줄곧 끼니를 거르게 되자 너무도 배가 고파서 바깥 사랑에 퍼져 누워 있었다. 안채에서도 고요하고 오랫동안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진사는 이상히 여기고 일어나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갈 기운이 없었다. 억지로 기어서 안에 들어가 보니 아내는 막 무엇을 입에 넣고 씹다가 남편이 들어오는 걸 보더니 황급히 숨기고 얼굴을 붉혔다. 유진사는 의심쩍어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찌 혼자 무엇을 먹다가 나를 보고 숨기는 것이오?”

 그러자 그 아내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만약 먹을 만한 물건이 있었다면 제가 어찌 혼자 먹겠어요? 아까 현기증이 나 쓰러졌을 때 수박씨가 벽에 말라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떼어다가 쪼개 씹었는데 껍질이어서 막 한탄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당신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내 손 안에서 말라 비뚤어진 수박씨를 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한숨을 쉬었다.
 조금 후에 문 밖에서 여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문에 와서 여비를 부르는 것일까요? 어서 나가 보세요.”

 유진사가 기어서 나가 보았더니 한 하인이 문 앞에 서 있다가 유진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넙죽 절을 한 뒤에 물었다.

 “이댁이 바로 유진사댁입니까?”

 “그렇다.”

 “진사님의 이름자가 아무 자 아무 자이십니까?”

 “그렇다.”

“진사님이 아무 능의 참봉에 수망(首望)으로 낙점이 되었기에 망통(望筒)을 가지고 간신히 찾아왔습니다.”

 그 하인은 곧 소매 속에서 망통을 꺼내 보였는데 과연 자기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본래 전가(銓家 : 銓曹)가 누구인 줄도 모르는데 이제 수망으로 낙점이 되었으니 실로 뜻밖의 일이라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오랫동안 의심하였다.

“이는 필시 나와 성명이 같은 사람일 것인데 네가 잘못 찾아온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서 자세히 물어보거라. 나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세상과 서로 끊고 살았기에 온 성안을 돌아보아도 한 사람도 나의 이름을 알 자가 없는데 어떻게 전조에서 수망으로 올릴 리가 있겠느냐?”

 유진사가 이렇게 말하고 도로 안으로 들어오자 아내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까?”

 유진사가 그 사람이 온 이유를 이야기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연명하며 살 수 있겠군요.”

 그러나 유진사는 고개를 저었다.

“백방으로 생각해도 그럴 리가 만무하오. 진사가 처음 벼슬길에 나가려면 반드시 먼저 공론이 있은 후에야 물망에 오를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어찌 나를 위하여 말해주는 자가 있겠소?”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며 반신반의하는 중에, 그 하인이 다시 와서 여비를 부르는 것이었다. 유진사가 또 나가서 보았다.

“소인이 이조(吏曹)에 가서 자세히 알아보니 분명 진사님이셨습니다. 선대의 직명과 진사가 된 연조를 역력히 확인할 수 있으니 조금도 의심할 게 없습니다.”

 유진사는 비로소 믿으며 말했다.

“내 비록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지금 끼니를 거른 지 여러 날이라 기동할 수가 없으니 장차 어떻게 사은숙배를 하겠느냐?”

 그 하인이 곧 시장에 가서 쌀과 반찬과 땔나무를 사 가지고 와서 먼저 미음을 쑤어 마른 뱃속을 부드럽게 하도록 한 후에 잇따라 많은 쌀과 한 바리의 땔나무와 약간의 반찬거리를 사 왔다. 유진사는 연달아 미음을 먹고 비로소 기운이 생겨 걸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또 그 하인에게 말했다.

“네가 도와준 힘을 입어 다행히 살 길을 얻었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쓰고 입고 신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나가서 사은숙배하겠느냐?”

 그러자 그 하인은 즉시 옷가게에 가서 착용할 의관을 모두 빌려왔다. 유진사는 그 하인으로 하여금 친지의 집에 서신을 부쳐 관복을 빌려오게 하였다. 치하하는 사람들이 차츰 찾아오고 심부름꾼을 시켜 하례하는 자가 문앞에 줄을 서니 전일에 썰렁한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유진사가 사은숙배를 한 뒤에 직소로 나가자 곧 돈과 쌀이 지급되었다. 경서원(京書員)이 바치는 숫자는 쌀 열 말과 땔나무를 한 바리씩이나 집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다.

 이조판서를 탐문하였더니 바로 이공(李公) 아무개였다. 당색이 다를 뿐만 아니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다. 마침 유진사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이조판서와 절친하였다. 그 친구는 유진사가 굶어서 거의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힘껏 전조에 소개하였다. 그러자 전조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측은하게 여기어 여러 사람을 제치고 수망으로 올렸던 것이다.

 그 몇 년 후에 유진사도 크게 드러나 여러 좋은 벼슬을 거쳐 드디어 인물을 전형하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마침 간성군수(杆城郡守)가 결원이 되었다. 간성군은 풍요로운 고을이라 위로 재상에서부터 아래로 친척에 이르기까지 간성군수를 구하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취사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내일 인선을 하여야 되므로 매우 고민이었다. 부인이 그 안색을 보고 괴상히 여겨 물으니 유판서는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부인은 말했다.

“대감께서 참봉이 될 당시의 이조판서였던 집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이조판서는 이미 죽고 그 아들 몇 사람이 모두 조적(朝籍)에 올랐고 또한 음사(蔭仕)로 군수에 적합한 자가 있지만 집이 몹시 가난하다 하오.”

“대감께서 만일 그 사람을 간성군수로 삼지 않으신다면 배은망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탁한 사람이 비록 많더라도 주저하지 마시고 결단코 그 사람을 수망으로 올린 뒤에야 옛날 벼슬을 얻은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어찌 수박씨 씹던 일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유판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옳은 말씀이오.”

 그리고 이튿날 인선에서 이 아무를 수망으로 간성군수에 추천하여 임금의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청구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