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천년고찰 삼사순례 여행
(대원사-율곡사-정취암)
대원사 계곡길
15개의 지능선과 계곡을 품고 있는 국립공원 1호 지리산. 뱀사골, 백무동, 칠선, 달궁, 한신 등 이름난 계곡들 중에서도 대원사계곡(일명 유평계곡)은 탐방객들의 손을 덜 타 ‘명수(名水)’로 꼽는데 이의가 없습니다. 특히 이곳의 용소(龍沼)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짙은 녹색을 띠는 맑은 물로 탐방객의 발길을 붙들어 매는 곳입니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기암괴석을 따라 흘러내리는 옥류(玉流)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면 2km를 언제 왔느냐 싶게 아름드리 노송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는 대원사에 이릅니다. 대원사 앞에는 전국 국립공원 탐방로에서 가장 긴 58m의 구름다리가 들어섰습니다.
대원사 앞에서 500여m 올라가면 용소가 있습니다. 중봉에서 발원해 갖가지 크기와 모양의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듯 흐르던 옥수(玉水)가 한 바퀴 휘몰아 하얀 물보라를 내며 쉬어가는 곳입니다. 거대한 하나의 암반으로 바닥이 이뤄진 이 일대는 귀를 쟁쟁 울리는 물소리와 계곡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이 어우러져 신비감마저 자아냅니다. 7-8명은 족히 누울 수 있는, 인공으로 깎아 놓은 듯한 정사각형의 너럭바위를 왼쪽으로 하고 군데군데 집채만한 둥근 바위가 오른쪽에 버티고 서 있는 3-4평 남짓한 용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기까지 합니다. 이름처럼 이곳에는 용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숫용 두 마리와 암용 한 마리가 살았는데 숫용들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해 착한 암용은 매일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숫용 한 마리가 암용을 데리고 무지개를 타고 승천하려 하자 이를 시샘한 다른 숫용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 두 마리 숫용은 천벌을 받아 죽게 되었고, 암용은 하늘나라 장군과 결혼해 옥동자를 낳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같은 전설 때문에 용소에서 불공을 드리면 좋은 아들을 얻는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용소에서 1.5km쯤 더 올라가면 유평마을이 나오고, 가을 운동장의 낙엽 속에서 정겹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어느 신문기자가 ‘가랑잎초등학교’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던 옛 유평국민학교를 만나게 됩니다. 한때 학생 수가 100명을 넘었던 적도 있지만 1994년 폐교된 후, 지금은 다른 시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대원사 계곡길은 유평마을까지이지만 더 올라가면 몸과 마음을 씻고 천왕봉(天王峯)에 오르라는 세신탕(洗身湯)과 세심탕(洗心湯)이 있고 삼거리, 중땀, 새재 등 마을이 나옵니다. 세신탕은 2m 높이의 폭포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옥색의 탕으로 빨려드는 곳으로 유평리에서 삼거리 쪽으로 5백m가량 따라가면 됩니다. 여기서 20m를 더 올라가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지키고 있는 탕 속으로 2개의 폭포가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곳이 세심탕으로, 이곳 주민들 사이에는 세신탕과 세심탕에서 몸과 마음을 씻어야 산속에서 호환(虎患)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 왔다고 합니다.
대원사계곡은 지정문화재(경남도지정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사계절 언제나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맑기로 유명하며 한국 제일의 탁족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산사의 유수한 풍취를 배경으로 발만 담가도 더위가 뒷전으로 물러난다는 곳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쳤다면 이곳에서 심신을 보듬어 볼 일입니다. 무리지어 노니는 버들치와 집채만한 기암괴석이 눈을 즐겁게 하고, 세파의 번잡함은 쏴- 하고 쏟아지는 물소리에 파묻힙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생각으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길도 있습니다. 계곡 입구에서 대원사를 거쳐 유평마을에 이르는 총3.5km, 왕복 3시간가량 소요되는 생태탐방로가 지난해 11월 15일 개통되었습니다.
대원사까지만 걷고 내려와도 좋습니다. 구태여 챙이 긴 모자를 쓰지 않아도 울창하게 우거진 수목이 그늘이 되어 줍니다. 등산보다는 산책과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딱 좋은 길, 탐방로의 전체적인 경사도가 매우 완만해 노약자도 큰 불편 없이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명품탐방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피난처나 은거지로 삼아 목숨을 부지했던 흔적과 스토리가 이 길의 끝인 유평마을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이 길을 더 오르면 남명 조식 선생 등 조선시대 선비들이 천왕봉을 오르던 유람길이 있고, 더 먼 옛날에 가야국의 마지막 왕(양왕)이 피난을 가면서 지나갔던 왕등재의 초입이기도 합니다.
방장산 대원사(方丈山 大源寺)
신라 진흥왕 9년(546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됐습니다. 임진왜란 때부터 소실과 복원을 거듭하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만 빼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1955년 비구니 법일 스님이 비구니 선원을 개설한 데 이어 성우 스님과 현 주지 묘명 스님에 이르러 오늘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비구니 3대 사찰인 대원사는 사계절 아름다운 꽃을 가꾸는 절로 유명합니다. 장독대에서 산왕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절 뒤쪽의 차밭까지의 산책로는 아기자기함을 더해 비구니 사찰의 정서가 듬뿍 묻어납니다. 대웅전의 문살도 섬섬옥수로 수놓은 듯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대원사 인근은 오래전부터 세상이 혼란해지면 찾는 은신처로 유명합니다.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사람들의 왕래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학혁명에 실패한 교도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들어와 대원사 인근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수많은 애국지사가 숨어들었습니다. 6·25전쟁 때는 낮에는 국군이, 밤이 되면 빨치산이 준동하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이 잡힌 곳도 이곳 인근입니다. 지금은 사시사철 특히 휴가철인 여름과 오색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전국에서 많은 탐방객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습니다.
정수산 율곡사(淨水山 栗谷寺)
651년(진덕여왕 5)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930년(경순왕 4)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중창한 뒤 여러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대웅전, 관심당(觀心堂), 칠성각, 요사채로 이루어진 아담한 절입니다. 여간해서 찾기가 어려운 깊은 산에 있는 외롭고 작은 절이지만, 불가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진주 등지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7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다포집계 불전입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작고 한적한 절이지만 대웅전만큼은 능숙한 대목의 솜씨가 잘 드러난 건물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웅전에는 대목의 솜씨와 관련된 전설 하나가 전해옵니다.
법당을 중창할 때에 어떤 목수가 찾아와 절 짓는 일을 맡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석 달 동안 오로지 목침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를 답답하게 여긴 스님이 목수를 시험하기 위해 목침 하나를 몰래 숨겼습니다. 목침을 다 만들었다고 생각한 목수가 수를 세어보았더니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안색이 변한 목수는 “내 정성이 부족하니 귀중한 법당을 지을 수가 없다”며 연장을 챙겨 절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스님이 숨긴 목침을 내놓으면서 사죄하니, 목수는 마음을 돌리고 목침을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못 하나 쓰지 않으면서 목침만으로 건물을 짜 올리는데, 그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습니다. 전설처럼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절을 지어 일명 ‘목침절’ 또는 ‘몽침절’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대웅전 왼쪽의 삼성각에서 바라보면 앞으로는 멀리 잦아지는 산자락 아래 마을들이 모여 있고, 절 오른쪽으로 암봉 셋이 보입니다. 그중 가운데 봉우리가 새신바위[鳥神巖]입니다.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 올라가서 지금의 절터를 잡았다고 하며, 또한 절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합니다. 대웅전을 단청할 때 단청하는 이가 이레 동안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스님이 결국 이레째 되는 날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습니다. 대웅전 안에서는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면서 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끼자 후루룩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 새가 자취를 감춘 곳이 새신바위입니다.
대성산 정취암(大聖山 淨趣庵)
상서로운 기운이 금강산에 비견된다 하여 예부터 소금강이라 불리던 대성산(둔철산) 중턱(해발 450m) 기암절벽에 기대어 둥지를 튼 암자로, 선재가 만난 29번째 선지식인 정취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성지입니다. 그래서 정취암의 주 전각은 정취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 곳은 정취암이 유일합니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6년(686) 동해에서 부처가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 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다른 한 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습니다. 이때 의상대사가 두 줄기 서광을 좇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면 단아한 관음보살좌상이 반깁니다. 크기가 50cm 남짓 하니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위압적이지도 않습니다. 얼굴은 네모난 형태에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입술 양끝에 양감을 줘 미소를 머금게 하는 모습입니다.(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4호) 앙련의 연화 대좌 위에 가부좌한 이 불상은 불신(佛身)과 앙련상의 낮은 연화대좌를 포함하여 일목재(一木材)로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고려 공민왕 3년(1354), 화경거사와 경신거사가 정취암을 중수한 후 궁궐에 있던 정취관음보살상을 이곳으로 모셔왔습니다. 이후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으면서 보살상도 소실되어 조선 효종 5년(1654)에 새로 조성하였습니다.
산청엔 산이 많습니다. 단순히 많은 게 아닙니다. 높습니다. 지리산을 제외하고라도 웅석봉, 황매산, 구곡산, 왕산 모두 해발 1,000m 내외의 산들입니다. 당연히 산청의 전경을 보는 방법은 이런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이 오르지 않아도 산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봉화산(금서면 특리 활공장)과 정취암이 그곳입니다. 정취암은 봉화산에서 볼 수 없는 풍경, 산청의 동쪽을 둔철산(811m) 허리에서 조망합니다. 산이 많은 만큼 절이 많은 이곳 산청에서 정취암은 바라보거나 바라보이는 경치가 빼어난 곳 중 하나입니다. 길을 오르며 바라보이는 정취암은 암봉 아래 절묘하게 매달려 있고 정취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탁 트인 전망으로 아찔합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가 주석한 바 있습니다.
전망대 바위 끝에 서면 천장 만장 높은 곳에서 하계를 내려다보는 시원함과 함께 적막과 고요 속에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듭니다. 원통보전 뒤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왼편에 응진전, 오른편에 산신각이 나옵니다. 응진전 옆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하면 정취암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바위에 닿습니다. 편평하고 너른 바위에 서면 정취암의 지붕이 보이고 그 뒤로 산청의 산과 들이 펼쳐집니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도로도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임진왜란 때 왜구들도 활을 쏘려다가 활을 내려놓았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속세와 인연을 끊고 기암절벽에 위치해 ‘절벽 위에 핀 연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청 9경 중 제8경에 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