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백리의 표상 송흠의 <관수정(觀水亭)> -
오늘 글은 호남의 명유(名儒) 최부(崔溥)와 송흠(宋欽)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최부는 나주 출신이고 송흠은 영광(지금의 장성군 삼계면) 출신이다.
최부가 다섯 살 위였는데 대과 합격은 10년 먼저 했다. 송흠은 최부를 따랐고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홍문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 함께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의 집은 십오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송흠이 최부를 찾아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최부가 송흠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가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역말을 타고 왔습니다.”
그러자 최부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한양에서 그대의 집에 갈 때까지가 그 역할이고,
그대의 집에서 나의 집으로 오는 것은 사사로운 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탄다는 말인가.
” 송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최부는 이 일을 조정에 아뢰었고 송흠은 파면되었다.
송흠은 최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집에 찾아가 하직 인사를 했다.
최부가 말했다. “막 벼슬을 시작한 이로서 이후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네.
” 송흠이 막 벼슬길에 들어선 1494년 무렵의 일이다.
그로부터 40년이 다 된 1532년(중종27)이었다. 당시 임금인 중종은 조정에 명을 내렸다. 신하 가운데 청렴과 절개가 뛰어나 늙도록 변하지 않을 이를 뽑아 아뢰라는 것이었다. 송흠은 참찬 조원기(趙元紀)와 함께 추천되어 가선대부에 올랐다. 젊은 시절 최부의 따끔한 일침(一針)을 마음에 새기며 관직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주 외직(外職)을 청했는데 모친 봉양을 위해서였다. 고을을 오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렀다. 수령이 고을에 부임할 때 신영(新迎, 수령을 맞이함)을 하는데 당시에 많은 말을 동원하곤 했다. 송흠은 관아의 소비와 수고를 생각하여 말을 세 마리로 제한했다. 수령의 직을 수행하면서도 항상 검소하게 지냈다. 모친 봉양을 위한 살림 이외에 처자와 종들은 기한(飢寒)을 면할 뿐이었고, 체임되어 돌아가는 날에는 한 섬의 쌀도 없을 정도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송흠은 늘 고향을 생각했다. 연산군 말에는 영광으로 돌아와 경서(經書)를 강론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1519년 기묘사화 일어나고 조광조,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젊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머무를 곳을 안다’는 의미의 ‘지지당(知止堂)’이라 한다. 이 때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관수정(觀水亭)’이라 쓴 편액을 건다.
시냇가의 높은 정자 여름에도 서늘하니
늙은이 난간에 기대지 않는 날 없네
이미 곡구의 두 갈래 계곡물에 마음 쏟으니
어찌 용문의 암초 많은 팔절탄을 부러워하랴
해 기울 때 고요한 그림자 참으로 즐길 만 하고
비 개인 날의 맑은 빛 가장 볼 만 하네
천태만상 아름다운 모습 눈 어지럽게 하지만
요컨대 맑은 물결 보며 내 마음 씻어야 하리
危構臨流夏亦寒 老夫無日不憑欄 旣專谷口雙溪水 奚羨龍門八節灘
靜影沈光眞可樂 晴粧雨抹最堪觀 千姿萬態渾迷眼 要取淸瀾洗我肝 『知止堂遺稿』第1
‘관수(觀水)’라는 말은 『맹자』 「진심(盡心)」 상(上)의 “물을 보는 데에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에서 온 것이다. 물이 거세게 흐르는 여울을 보면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은 고대 동아시아 철학에서 중요한 ‘뿌리은유’ 역할을 한다. 고대인들은 동일한 원리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를 관통하므로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 행위의 원리를 알 수 있다고 여겼다. 대표적인 자연물의 예가 바로 물이다. 아래로 흐르는 속성, 흐름의 과정에서 낮은 곳을 채워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 침전(沈澱)을 통해 스스로 정화가 가능하다는 점 등 많은 특성들이 철학적 관념의 원천적 이미지를 제공했다. 우리가 잘 아는 공자, 맹자, 순자, 장자, 노자가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데에 물의 속성을 끌어다 썼다.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 , 18세기 초 간행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이 시는 조정에 대한 기억과 한적한 시골 삶을 대비하고 있다. 팔절탄(八節灘)은 중국 하남성 용문담(龍門潭) 남쪽에 있는 여울이다.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데 배가 이곳을 지나다 난파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곡구(谷口)는 서한(西漢) 말엽의 고상한 선비 정자진(鄭子眞)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곳이다. 3,4구는 각각 유유자적할 수 있는 고향과 위험이 도사린 벼슬길을 비유한다. 송흠은 정자진과 같은 삶을 희망했다. 정자진과 같은 삶이란 은자적(隱者的) 생활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뚜렷한 자기관점을 가진 삶을 뜻한다. ‘관수’라는 이름은 그것을 응축한 것이다.
이 시의 앞에는 <관수정기(觀水亭記)>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송흠은 자신이 물을 보는[觀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여울의 거센 흐름을 보며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觀其瀾而知其水之有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의 맑음을 보면서 마음의 혼탁함을 씻을 수 있다[觀其淸而洗其心之邪穢]는 것이다. 흐르는 물을 보며 현상 너머의 본질을 직시하고 나날의 긴장 속에서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자(亭子) 위에 설 때, 눈에 들어오는 사철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흐르는 물줄기를 통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문(自問)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 , 18세기 초 간행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관수정(觀水亭)> 시는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세상을 떠난 지 160년 뒤에 간행된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를 보면, 많은 이들의 차운시가 덧붙여 있다. 소세양, 홍언필, 유부(柳溥), 김안국, 성세창, 신광한, 김인후, 임억령, 이문건(李文楗), 박우(朴祐), 나세찬, 정사룡, 오겸(吳謙), 강종수(姜終壽), 정희홍(鄭希弘), 김익수(金益修), 노극창(盧克昌), 유사(柳泗), 정순붕 등의 명사만이 아니라 문인(門人) 양팽손(梁彭孫), 안처성(安處誠), 송순 그리고 아들 송익경(宋益憬)이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송흠의 용퇴를 찬미하면서 무욕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제자 양팽손이 차운한 것이다.
<次宋知止堂先生觀水亭韻>
푸른 절벽 돌고 돌아 거울같은 물 차가운데
시냇가 정자의 난간은 시원하기도 하네
고운 물결 위에 바람 부니 물고기 떼를 이루고
맑은 파도 오리 발길에 여울에는 눈이 날리는 듯
희디 흰 산 위의 구름, 그윽하니 더욱 반갑고
쌍쌍이 돌아오는 새들, 저물녘에 아울러 보네
산수(山水) 자연을 공께서 진실로 좋아하시니
명예에 취함이야 모두 보잘 것 없는 것이리
翠壁盤回水鏡寒 當流亭子爽雕欄 風吹細浪魚成隊 鷗蹴淸波雪漾灘
白白山雲幽更悅 雙雙歸鳥暮兼觀 仁居智樂公能了 昏醉榮名摠鼠肝 『學圃先生文集』卷1
송흠은 낙향 시기에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문하에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이가 이 시의 작자 양팽손이다. 양팽손은 흥겨운 리듬으로 관수정에서의 생활을 노래한다. 관수정 주변의 풍경을 제시하고 자잘한 물상들을 하나하나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송흠이 누리는 일상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인다. 스승의 생활에서 공자가 말한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의 그것을 보고 있다.
이 시기 이후 송흠은 몇 차례 내직과 외직을 맡는다. 전주부윤, 나주목사를 거쳐 승정원도승지로 있다가 담양부사, 남원부사 등을 지낸다. 77세이던 1534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는데, 그때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99세였다. 그는 모친 봉양을 위해 집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허락을 받아 돌아와서는 지극한 효심으로 봉양했고 어머니는 101세로 세상을 떠난다. 삼년상이 끝날 무렵, 조정에서는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맡기려 한다. 몇 차례 상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는데 1541년 임금은 특별히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하며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고 한다. 고령임에도 그는 한양에 가서 감사의 마음을 표한 뒤 사양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때 아닌 봄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난다.
한양에 도착한 그는 글을 올려 은퇴를 호소한다. 그런데 중종은 청덕(淸德)을 칭찬하고 사양을 만류하며 경회루(慶會樓) 남문에 술까지 내린다. 이후 한동안 머무르며 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은퇴의 허락을 받는다. 도성을 떠나던 날, 중종은 남다른 대우를 한다. 원래 정부(政府)의 당상(堂上)들은 임금의 명이 아니면 성(城) 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런데 이날 많은 관료들이 남대문 밖에 나왔다. 임금의 예외적인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모인 이들은 찬성(贊成) 김안국, 참찬(參贊) 권벌(權橃), 형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사인 송인수(宋麟壽) 등이었고 많은 명사들도 함께 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로서 한강 가에서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그는 남녘의 고향을 향한다. 한양에 가서 숙사(肅謝)를 하고 돌아온 여정과 전후 사정에 관한 기록이 문집 제2 <기행록(記行錄 )>에 상세히 실려 있다.
은퇴한 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후학 송인수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는 송흠의 집을 방문하여 인사드리고 정자(亭子) 하나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영정(耆英亭)’이라 한다. 기영정이 완성되자 이웃 10개 읍 수령들이 모여 잔치를 열어 축하한다. 한적한 삶을 즐기던 송흠은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임금은 예조정랑 이영을 보내 치제(致祭)하는데, 제문은 송흠의 일생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본래 온순하고
행실은 독실하며 간결하였네
처신함에는 굽힘이 없었고
학술로써 매사에 여유로웠네
맡은 직임을 잘 수행하니
아름다운 소문이 매우 많았네
정성을 다해 정사에 힘 보태고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임했네
어버이 염려하는 마음 간절하여
여러 차례 남쪽 고을 원했었지
어버이의 뜻 봉양함을 즐거워하여
하얀 머리에도 색동옷을 입었지
마침내 먼 들에 물러나 살면서
정신을 함양하며 한적함을 보전하였네
惟卿性本溫醇 行篤簡潔 處己無枉 裕以學術 所履職擧 美聞弘多 罄悃補闕 儀肅鵷列
愛日心長 屢乞南符 樂在養志 皓髮斑衣 竟遯荒野 頤神保閑
1684년 윤증(尹拯)은 송흠의 7세손 송명현(宋命賢)의 부탁을 받아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썼다. 윤증은 이 글에서 네 가지 미덕을 칭송한다. 네 가지는 ‘효도’와 ‘청백리의 생활’, ‘용퇴의 결단력’, ‘은퇴 후의 여유로운 교제’를 말한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데, 송흠의 일생은 넷을 모두 갖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개인의 영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한 국가의 아름다움이라 말하고 있다.
벼슬길 초년의 일화를 다시 떠올려 본다. 당시 최부의 냉엄한 꾸짖음이 없었다면 관리 송흠의 삶은 어땠을까. 온화하며 꼿꼿한 성품을 지녔기에 관리의 길을 가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합리화로 흐르기 쉬운 관료의 길에서 선배의 일침이 각성의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사소한 것도 돌아보고 본분에 유념하는 한편 부화(浮華)한 명성보다는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가치를 두었기에, 그는 한 시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리라. 흐르는 물을 보며 고전(古典)의 가르침을 되새긴 이들은 많다. <관수정> 시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내용 속의 통찰과 자기다짐이 그의 삶과 유리(遊離)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