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이 가고 있습니다. 긴 장마로 반을 보내고 나니 이게 8월인지 7월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듯했습니다. 아무튼 후진이 없는 세월이라 가기는 갑니다. 며칠 후에 우리는 9월을 맞습니다. 더위는 이제 막 시작한 모양새인데 아마도 조금은 더 덥겠지요. 그래도 달력을 떼면서 9월을 느낍니다. 어쩌겠습니까? 시간보다 먼저 가는 것이 마음인 것을! 장마에 태풍 그리고 계속되는 코로나19 사태,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더 힘든 거지요. 제대 일을 알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이건 너무 막연하다는 말입니다. 언제 끝날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조속한 시일 안에’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돌아가는 상황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서로 도와서 헤치고 나가도 힘들 텐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아우성치는 꼴입니다. 다 늦게 더위 들을 먹었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불쾌지수가 그리 낮지는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사람들의 짜증지수가 높아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바이러스에 더 취약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일단 이 공공의 적부터 퇴치시키고 문제들을 꺼내면 좋겠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나가면 이 나라 사회가 제대로 세워지겠습니까? 아 9월!! 명절도 잡아먹을 이 바이러스부터 물리치고 봅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지경입니다.
예, 마음이라도 먼저 희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9월, 구태를 버리고 맞이하기를 기대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싸움으로 서민들 목조이지 말고 목숨 하나 버틸 수 있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며 9월을 맞기 바랍니다. ^&^
2020년 8월 29일 김종우 목사 드림
첨부 : 20-08-23주일설교(성경 속의 동물들)
<69세>
이런 유머가 있었습니다. 여성을 나이대별로 비유했는데 공으로 하였습니다.
10대는 럭비 볼 - 어디로 튈지 모른다.
20대는 축구공 - 많이도 따라다닌다. 한 팀이 11명이니 양 팀으로 하면 22명이나 된다.
30대는 농구공 - 이제 반 이상 줄어든다.
40대는 탁구공 - 겨우 둘이서 주고받는다. 너나 가지라고.
50대는 야구공 - 혼자서 때리고 도망간다. 아주 멀리 때리면 남이 주워가도 뭐라 안 그런다.
60대는 골프공 - 어디 떨어졌는지 모르면 찾지도 않는다.
누가 만든 유머일까요? 잘은 모르지만 분명 여성이 만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에게 인기 있는 여성을 나이대별로 풍자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볼 것은, 나이 든 여성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말인가요?
흔히 성폭력은 어린이로부터 젊은이 정도까지 상대로 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이든 여성에게 또는 드물게 남성을 상대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습니다. 남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은 특수한 상황에서가 아니고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주로 상대는 여성인데 어리거나 젊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나이든 노인 또한 성폭력의 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앞의 유머에서도 보았듯이 누가 찾겠느냐 하는 의식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딴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성폭력이라기보다 오히려 봉사해주었다는 식이지요.
어느 날 ‘효정’은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다가 담당 간호조무사에게 성폭력을 당합니다. 29세의 남자에게, 아들보다도 어린 젊은 녀석에게 당합니다. 아마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간호사이니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얼떨결에 당한 셈이지요. 병원이고 간호사입니다. 그리고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살이 닿고 접촉이 생깁니다. 본업을 잊고 갑자기 흑심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더구나 연세가 있는 어른입니다. 남자는 그것도 계산하였을 수 있습니다. 이미 밖에서 눈에 익은 사람이기도 하니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계산 말입니다. 그리고 노인입니다. 이 젊은 사람이 서비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동안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어쩌면 수치심에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잊을 수 없고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잠도 편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인생의 남은 시간이 까맣게 칠해질 것만 같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결심합니다. 일단 혼자서 처리하기는 너무 힘들어 동거하고 있는 선배이며 선생 같은 ‘동인’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함께 경찰서를 찾아가서 성폭력 사건으로 고소를 합니다. 고소장을 접하는 형사부터 태도가 시무룩합니다. 사건 같지도 않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옆에 있는 남자가 항의하니 다소 나아집니다. 아무튼 사건 접수는 되었는데 진행은 더디기만 합니다.
형사가 피고소인을 불러 심문합니다. 의례히 나오는 가해자의 태도를 보입니다. ‘합의’ 하에 이루어진 섹스지 폭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합의? 기막힐 일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합의? 폭력? 저항이 있었습니까? 저항의 흔적이 없으면 합의입니까? 저항한 흔적은 어떻게 증명하지요? 혹시 있다 한들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기 쉽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성 피해자의 심리작용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갑작스런 일에 당황합니다. 말문이 막힙니다. 몸이 굳어집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갑작스런 공포를 마주했을 때처럼 말이지요.
정신을 가다듬고 나면 이미 상황 끝입니다. 엎어진 물입니다. 어떻게 주워 담지요? 다시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증거물이라고 해봐야 그가 사정한 정액이 다입니다. 그거라도 일단 보관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합의냐 폭력이냐, 그것입니다. 법원에서조차 구속영장을 기각합니다.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고요. 그 나이 차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는 말인가요? 왜 그렇지요? 아무튼 효정의 편이 없습니다. 동인이 포기하지 말라고 고무해줍니다. 혼자서라도 이 문제를 이기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이와 관계없이 나 자신이 살아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회도 법도 효정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홀로 처리하기로 합니다. 사건을 하나하나 되짚어봅니다. 누구나 자신의 환경이 있고 거기에는 약점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해자가 맞고소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적 의식이 많이 성숙해졌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채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더구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아직 사회적 의식에 못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투쟁입니다. 영화 ‘69세’(An Old Lady)를 보았습니다.
<죠스>
피서지의 특징 중 하나는 여름철 장사로 근 한해를 버틴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다른 길들을 찾아서 하는 경우도 많겠지요. 그러나 많은 부분 그 한철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막말로 그 한 철에 목숨 거는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피서객들과 관광객들을 맞습니다.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도 할 것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하니까요. 다른 어느 곳보다 나은 점이 많고 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것은 비단 지역주민만의 행사도 이익도 아닙니다. 그 지역 행정기관의 재정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기관이 앞장서서 나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민과 지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노력합니다. 일단은 사람이 많이 모여주어야 합니다.
이익인가 안전인가 하는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담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면 저울로 재봐야 합니다. 어느 쪽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고민하게 만듭니다. 사실 그 이익이 생활경제를 이끌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지방기관의 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에 쉽사리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히 관공서는 주민의 안전을 우선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잘 살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살아 있어야 그 다음 잘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익에 눈이 먼 조처를 취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방기관의 이익을 앞세운 자기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서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전조치를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앞장서서 반대하였습니다. 게다가 한철 장사를 꿈꾸는 상인들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해변 접근 금지’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반대에 부딪쳐 한발 물러섭니다. 안전요원들을 많이 배치하면서 경계를 강화하며 개장하자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사의 지시이고 주민들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결과는 사고를 부릅니다. 한 아이가 생명을 잃습니다. 물론 그 전에 이미 사고가 있었기에 해변 폐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례를 치르며 유족 가운데 그 엄마가 경찰서장을 공개석상에서 뺨을 때립니다. 당신 때문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요. 개장을 극구 주장했던 시장도 가까이서 그 광경을 봅니다. 사실 시장이 맞아야 했던 경우입니다.
본격적으로 상어 사냥에 나섭니다. 상어 사냥 전문인이라는 사람과 상어를 연구한 해양학자입니다. 현장 경험자 ‘퀸트’는 학자인 ‘후퍼’박사를 좀 무시합니다. 어쩌면 경험이 우선인가 지식이 우선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잘 조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서로 준비하는 장비들도 다릅니다. 바다에 나가 부딪치니 그 모두가 다 요긴함을 알게 됩니다. 지식이 중요하지만 현장 경험도 산 지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여 얻은 지식은 날로 새로워지고 발전합니다. 그것이 현장에서 확인되면 확실하게 살아있는 지식이 될 것입니다. 너무 경험만 우기면 자칫 진화하는 상대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맞닥뜨린 상어는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상대입니다. 크기나 행동이 전혀 다릅니다. 물론 그 힘도 상상보다 훨씬 대단합니다. 퀸트의 배에 3 사람이 타고 바다로 나가 찾습니다. 두 사람은 상어 전문가이고 한 사람은 주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경찰서장입니다. 바다와는 별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는 서장 ‘브로디’는 한 마디로 책임감 때문에 동승한 것입니다. 이론에 정통한 자와 실제 경험이 많은 자와 주민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포식자 사냥에 나섰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위험을 맞서서 싸우는 동안 인간적인 정도 생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무시무시한 대적을 물리쳐야 하는 일입니다. 여태 경험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대입니다.
처음 영화가 나왔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기억이 삼삼합니다. 바다로 피서 갈 생각이 싹 사라지고 공포가 밀려들었습니다. 상어가 무서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이빨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당시 사람을 통째로 삼키며 조각내는 그런 장면이 묘사되는 것은 처음 경험하였습니다.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 그 느낌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이야기에, 충격 그 자체인 영상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다소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 동안 너무나 익숙하고 무척이나 진화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이야기도 영상도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비슷한 류의 영화도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상어 자체도 엄청난 진화를 하였습니다. 그 예로 ‘메가로돈’이 나왔지요. 덩치도 힘도 지혜도 뛰어났습니다. 그 정도 되어도 크게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단한 것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확대 변경되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사건은 대부분 ‘인간의 욕심’으로 발단된다는 사실입니다. 변함없는 이야기의 소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죠스’(Jaws)를 보았습니다. 1975년 작이네요.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에 개봉하였습니다.
성경 요엘 1 : 2 - 7 2020년 08월 23일
설교 : 성경 속의 동물들 김종우 목사
여러분 혹시 ‘선지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즘은 보기 힘듭니다. 저희 동네 재래시장 다녀도 찾을 수 없더군요. 하기야 요즘 얼마나 먹을 것들이 많은데 이런 것까지 먹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세대만 해도 종종 먹었습니다. 영양도 맛도 괜찮은 음식이지요. 추억이 깃든 음식입니다. 글쎄 혹 시골 재래시장에 가면 아직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성경을 읽고서 놀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선지국’입니다. 이 재료가 무엇이지요? 피입니다. 바로 소의 피를 국으로 끓여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창 9 : 3 - 4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동물의 피는 먹지 말라 하십니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기도 음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 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레 17 :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피를 먹으면 어찌 하시겠답니까? 끊어버리시겠답니다. 제가 교회 처음 나간 것이 대학 1년 때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처음 읽은 것이 군에 다녀오고 대학 3년 때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먹었는데 그게 모두 죄 짓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기야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무튼 그 후로는 찝찝해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뿐입니까? 율법에 보면 하나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이 있고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이 있습니다. 예를 봅니다. 신 14 :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돼지고기 먹으래요 먹지 말래요? 먹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태 잘 먹고 있습니다. 어쩌지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예,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 말씀을 처음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연습을 하는 시대였습니다. 장차 새로운 시대가 오면 그 참 실체를 보고 행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히 9 :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육체의 예법으로 족합니다. 보다 깊은 그리고 하나님의 참뜻을 알고 신앙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을 ‘개혁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뭐하려 오셨답니까? 마 5 :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는 지금 육체의 예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뜻을 배워 살펴 알고 신앙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 지난 시간에 이어 동물, 좀 축소하여 짐승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짐승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짐승이 과연 짐승인가 생각해보았지요. 짐승도 여러 가지인데 날짐승과 들짐승으로 구분합니다. 우선 날짐승을 보지요. 성경에 나오는 새 중에 가장 마음에 떠오르는 새는 비둘기입니다. 마 3 :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물로 사용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친근한 새가 되었습니다. 반면 새라고 하였는데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계 18 :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귀신의 처소라고 했으니 좋은 곳은 아닙니다. 그곳은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가 모이는 곳이랍니다. 새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알 수는 없지만 가증한 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선인과 악인이 있듯이 새들도 그렇게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대로 말한다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사단 마귀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다음으로 들짐승도 우리가 집에서 사육할 수 있는 가축과 진짜 들짐승으로 구분하지요. 즉 집안에 있는 짐승과 집 밖에 있는 짐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집안에 있는 짐승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 집 밖에 있는 짐승을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지요. 우선 집안에 있는 짐승, 그 대표적인 육축을 보겠습니다. 소 양 말 닭 개, 돼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친숙한 동물은 양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비유되어 있고 하나님 백성이 양으로 비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시 79 :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시 100 :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아멘! 이렇게 양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이미지로 나옵니다.
그런데 육축이라도 좋지 못하게 상징되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집에 있다가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들짐승이 되겠지요. 개가 집을 나가면 들개가 됩니다. 때문에 성경에서는 개를 그다지 좋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빌 3 :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여기서는 개들을 행악하는 자들과 같이 취급합니다. 계 22 :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기서도 개를 다른 악행을 하는 자들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요. 성안에 있다가 쫓겨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편에 있었는데 배역하여 밖으로 나간 것이지요. 마지막 때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살후 2 :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마지막 때의 사건을 말씀하시는데 먼저 있을 것은 바로 배도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있던 자가 사단에게로 넘어가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개와 마찬가지로 돼지 또한 좋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마 7 :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가 연결되어 있고 개와 돼지가 연결되어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진주는 마 13장에서 비유하신 그 값진 진주와 상통합니다. 마 13 : 45 - 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좋은 진주, 값진 진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개나 돼지도 뭔가 비유한 것이지요. 거룩한 것, 진주 곧 하나님 말씀을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이 개가 개입니까? 이 돼지가 돼지일까요? 세상에 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보물을 개나 돼지에게 던져줄 사람이 있습니까? 그 개나 돼지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엽다면 차라리 먹을 것을 주지 알지도 못하는 진주를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는 개나 돼지를 빙자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는 짐승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 49 :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멘!
다시 한 곳을 봅니다. 벧후 2 : 20 - 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여기에도 개와 돼지가 나옵니다. 분명히 비유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비유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더러운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변절했다는 말이지요. 믿음을 저버린 신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던 것이 나을 뻔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앞에서 살후 2 : 3절에서 본 배도자들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다가 마귀 사단에게로 돌아간 자들이지요. 사실 그들이 더욱 악해지고 더 독해진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자기가 있었던 곳을 안답시고 더 떠들고 다닙니다. 이곳저곳 간증도 다닙니다. 그래서 경계하십니다. 마 7 :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개나 돼지가 거룩한 것 진주를 가지면 무슨 짓을 합니까? 진주를 발로 밟고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경험했듯이 침략한 일본보다 더 미운 자들이 바로 동족 가운데 있던 배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더 악랄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니까 얼마나 잘 이용했겠습니까? 동족을 팔아먹던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참으로 악한 자로 나오는 짐승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뱀입니다. 창 3 : 1 - 4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앞서 말했듯이 여기 뱀이 과연 땅에 기어 다니는 뱀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와서 거짓말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말에 혹하여 넘어가지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등지고 떠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이 뱀은 성경 마지막 책에 가서는 ‘용’으로 등장합니다. 계 20 :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사단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함께 망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마귀가 이렇게 뱀으로 또는 용으로 등장합니다.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 27 :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우리는 그 뱀, 그 용이 마지막 때 잡혀서 멸망할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지 그리고 어떻게 견디고 이겨야 할지를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처음 사람처럼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겔 32 : 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여기 애굽 왕을 ‘악어’로 비유합니다. 잘 아는 대로 애굽 왕 바로는 옛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붙잡고 괴롭히던 자였습니다. 하나님 백성 위에 권세를 부리던 자였단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를(엡 2 : 2)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던 초림 때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당시 유대 백성을 붙잡고 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백성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백성은 그들에게 밉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해도 두려워했습니다. 요 12 :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에게 밉게 보이면 그 사회, 그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삶의 터전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권세 아래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가운데 모세가 등장한 것처럼 서기관 바리새인들 권세 아래 종살이하던 백성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지요. 그리고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 백성을 달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들에게서 자기 백성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생명이고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야 그 길이 열립니다. 백성을 구원하려 오신 주님은 그래서 백성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왜 뱀이요 독사의 자식들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한 마디로 마귀 사단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달라시는데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줄 수가 없지요.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내주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값싼 노동력을 어디서 얻겠습니까? 그야말로 돈입니다. 호락호락 내줄 일이 아니지요. 서기관 바리새인들 나아가 제사장들 모두가 백성을 미끼로 사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내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더구나 그들은 백성보다 훨씬 하나님을 잘 알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무지몽매한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는 책임을 자기네가 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아버지는 당연히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마디로 그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아무튼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렇게도 경계하신 거짓 선지자가 도대체 누구이겠습니까?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양의 탈을 쓴 이리입니다. 누구입니까? 요 10 :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백성을 도적질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12절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양에게 해로운 존재가 둘 나옵니다. 물론 직접 해치는 이리가 무섭지요. 멸망자입니다. 그러나 양을 지켜주어야 하는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삯군 목자입니다. 양을 팔아넘기고 자기 갈 길 가는 자들이지요. 배도자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던 당시에도 그런 두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마 24 : 24 - 25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이것은 당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장차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 때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까?
육축과 달리 처음부터 집 밖에 있는 들짐승이 있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뱀, 용, 악어, 이리, 여우, 사자, 표범, 들개, 곰, 황충 등등입니다. 집 밖에 있으니 처음부터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욜 1 : 3 - 4 “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여기 팟종이나 메뚜기 그리고 늣이나 황충은 다 비슷한 곤충입니다. 그들이 밭이나 들을 깡그리 뜯어먹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비유한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튼 대표적으로 황충을 이야기한다면 이 황충은 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계 9 : 2 - 3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와 전갈의 권세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 황충이 정말 황충이겠습니까? 잘 아는 대로 계시록은 장래 일어날 사건을 예언해주신 말씀입니다. 기록되고 벌써 2천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아니면 곧 일어날 일입니다. 문제는 황충이 말 그대로 황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이 사단을 비유하고 있듯이 황충도 어떤 대상을 비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저갱 곧 지옥에서 나왔으니 좋은 일을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좀 더 말씀을 봅니다. 계 9 : 7 - 8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그 뒤에도 설명이 이어지지만 생략합니다. 그런데 상상해보십시오. 말 같고, 사람 같고, 사자 같은 이런 황충, 이런 메뚜기를 그림으로라도 그려낼 수 있습니까? 이게 과연 메뚜기를 말씀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다시 계 13 : 1절을 봅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바다에서 나온 짐승, 이 짐승이 과연 짐승인가 하는 말입니다. 6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무슨 짐승이 감히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짐승을 비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성경이 보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소경이고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언의 말씀이 비유로 기록되었음을 압니다. 그것은 때가 오기까지는 봉해져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합 2 : 3) 그래서 오래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마귀에게는 숨겨진 비밀입니다. 천국에 마귀와 그 세력이 침입해서는 안 되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비밀을 알아서 그 문을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믿기만 하면 저절로 됩니까? 무식과 무지는 망하는 길입니다. 배우고 깨닫는 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