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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속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시는
우리님들 우리는 좋은친구 맞죠?
불가리아는 부여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불가리아’라는 나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나라일 겨, 그치?
근디 이 불가리아가 우리 민족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나라라면 믿을 수 있겄어?
자다가 웬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 싶겄지?
헝가리의 ‘가리’가 몽골어로 ‘땅’이라고 야그혔지?
불가리아에도 ‘가리’가 들어가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화여대 교수 중에 신용하 교수님이라는 분이 있어.
재작년에 그 분께서 8편에 거쳐 [다시 보는 한국역사]라는 시리즈를
모 언론지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일곱 번째 연재물이었던
<부여족과 불가리아>라는 글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구.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
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
(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 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 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
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발견으로
인생은 '도'가 채워지게 자연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 그 무엇인에 계속 실수하며 흘려져서
채워지려는 지움으로 없앰으로 지각하고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곳 마음이라는 의식입니다.
안주하는 마음 에고의 시간을 쓰게 살면
그것으로 인생은 다 거짓이며 종교입니다.
우주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몸과 마음
그 파동과 진동 전자의 힘으로 광자대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감옥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감옥은 사회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옮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좋은 것과 니쁜 것,
건전과 불건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혼돈이 없는 영역이란 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인식한 믿음의 영역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평범하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놔듭니다.
하지만 일단 그 영역에서 한 발짝 나오면
그 땐 당신은 특이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철인이 한일은
전 인류를 교도소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범한 영역을 벗어나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밝아 버립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혼란이 없는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활 때
당신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하면 사람들이 워라할까?
안돼..!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은 친척이나 직장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말 할까?
그 철인들이 만들어 한 일은
서로에게 규범을 부과하는
절대적인 군인들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절망스러운 환경의 세상을
창조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고요상태 제로 지점에서
각각 나선형 물체계에 중앙에 노여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저 모든 사람이
토로스 에너지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고요함을 중심에두고
우리모두가 서로 살아있는 우주
무한한 의식속으로 영결되어야 합니다.
세상이란!
그 경험들로
진리를 맛보도록 내몸에 신성으로 와 있습니다.
몸은 죽임 뒤에도
영 "핵 원자"는 한결같이 살아 있습니다
태양에 의한 에너지로 만물이 빛의 수호자입니다.
지극히 한정된 생을 반복으로 격도록
그렇게 인성은 인격으로 지성체 입니다.
따라서 몸속 자기 부정적 경험을 통해
몸에 신성이 미리 나타나 있는 진화의 과정 입니다.
태양이 움직이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지구생명도 힘든 움직임을
좋와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파동에 숨쉬고 격는 성장이며
퇴화됨으로 유지하는 발견은
미리있는 과정에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움직임을 여임으로서
경조억겹의 통로에 자연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실재와 실체가 성장하여 어버이를 만듭니다.
인간이 천체 그 지성이 유지됨에 따라
인성에 채워지는 과정에 파동하는 몸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은 채우기 위해 베푸는 스승입니다.
신의 현원으로 몸이 격는
움직임에 긴장하도록 숨도 있는 것입니다.
실체 생명은 나선형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실체 핵원자는 영 존재로 순간이동 합니다.
태양이 반복하는 시간에
일백만년을 이천오백번 지나면서
움직임을 먹음는 빛의 찰나에 반복 했습니다.
자연이 펼처지는 일상에 움직이도록 도구로
실체는 지성체에 이르도록 영이 있습니다.
복사로 돌고있게 진동이
빈 공간 전자파동은 있습니다.
죽음 뒤에도 계속 윤회가 나타나는 핵원자
현미경으로도 잘 나타낼 수없는
00000000000000000000.1 핵에너지,
실재는 실체로 찰나에 반복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없습니다
백만년이 2500번을 지나며
항성과 행성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유의 관계
빛 까지도 다스리는 암흑 물질이 있고
번복하는 평창 에너지라는 것,
불랙홀이 또다른 우주를 복사히는 것 처럼이다.
나도 태양도 지구도 홀로그램 입니다.
그렇게 평창하기위해 복사되는 실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지만
또 다른 우주 어느 곳에나 또 다르게
미리 있는 순간이동에 실재라는 것입니다.
없어야 있는 능력 보도록 실재라는 것입니다.
진동과 파장에 맞춰진 그 광자대 우리에게는
힘든 날은 없습니다...고로 죽음도 없습니다.
다 그런 날이 있도록 반복하는
일이 있을 뿐 입니다.
"노동이 없는 돈이 정신을 궁핍하게한다"
끄러당김의 힘으로 부드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엄청난 기회는 그렇습니다.
다 마련으로 차려진 것입니다.
000000000000000000000000.1
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은
각기 다른 주장으로 여러 문재를 겪 습니다.
거듭하는 빈 공간의 개념.
사라짐을 반복하며 나타나는 힘
우리 몸 속에도 있고
지구에도 태양에도 우리 일상에도 있습니다.
빛이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따라서
신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체인 나 자신을 위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선량해 집니다.
한번 배우고 지워야 또 다시
재 지각을 반복 격도록 되는 지식입니다.
숨쉬는 것으로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만 살도록 반복하는 생명입니다.
몸은 배풀기가 있어 채워지는 영의 도구입니다.
- 홀로그램 인생-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해드디스크 입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려는
예와 지, 그 지식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나 존재를 어지럽고 못나게 만들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도'의 길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게으르지않게 일하며
움직임으로 오는 복 그 돈을
나를 없애는 데 씁니다.
나눔의 경험이 채워질 때 "도"가옵니다.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수치심도 이기고
또 이기면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결핍 덩어리였던 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어머니, 아버지, 가족 친지, 여러공동체,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여자,여자,여자,
결핍자아 바보의 성장 나에게
수치심을 견디고 참을 수 있도록 있었던 것은
모두다 공부가 되라는 과정이였습니다.
그토록 그렇게 고맙게
나를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도 전하게 됩니다.
이제 그동안의 인연 모든 분에게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워 가겠습니다.
노동이 없는 돈 때문에
정신은 파멸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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