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구속사 강해
새롭게 태어난 야곱
1. 가나안 입성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에서 20여 년을 보내는 동안 야곱은 이삭의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친히 체험할 수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28:3-4)는 이삭의 축복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재확인해 주심으로서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3-14)는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하여 완성하게 될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의 경험은 전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야곱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고 약속해 주심으로서 야곱의 인생은 단순히 한 인생의 행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우주적인 경영과 늘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평생동안 이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루어 나가는 힘을 얻었던 것이다.
야곱은 라반 밑에서 20여 년을 봉사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산이나 이권을 가지고 다툴 이유가 없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워나가시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일을 진행시켜 나가셨다. 야곱에게 11명의 아들이 태어나고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계획하신 일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야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하여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경영해 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야곱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야곱이 12명의 자녀를 비롯하여 많은 식솔과 재산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입성하는 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야곱의 여정을 언뜻 보기엔 갑부가 된 일가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야곱의 가나안 입성은 혈혈단신으로 가나안을 떠나온 야곱이 이삭의 축복과 하나님의 약속이 결실된 역사적인 증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야곱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을 역사 안에서 이루어 나가는 사건이 바로 야곱의 가나안 입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 야곱의 가나안 입성을 보호하셨다(창 32:1-2).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기 전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나안의 새 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2.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난 야곱
그런데 야곱에게는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20년 전 야곱이 집을 떠나 올 때 형 에서와 사이에서 있었던 불편한 감정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에돔 땅에 있는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어 안부를 전하고 에서와 화친하고자 하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에서는 400여명의 사람들을 동반하고 야곱을 맞이하러 나왔다.
에서로부터 돌아 온 사자에게서 에서가 400여명의 사람을 동반하여 야곱에게 향하여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야곱은 혹 에서가 자기와 식구들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걱정이 들었다. 야곱은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 만일의 경우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라도 도망가고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청했다(창 32:9-12).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마음을 돌려줌으로서 자신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한 것은 아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야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에서가 과거의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야곱을 대적한다는 것은 야곱에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한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만일 에서가 역사상에서 야곱의 위치와 역할을 방해하는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고 따라서 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야곱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야곱에 대한 에서의 원한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도록 놓아둘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은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지금의 위급한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고상한 믿음의 자태이다.
야곱의 당시 시대는 전 세계가 어둠의 세력 가운데 빠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그것들의 힘을 빌어 살지 아니하면 도저히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우매함과 두려움에 빠져 살던 때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삶은 당연히 주술적이고 운명적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경영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지 신들을 노엽지 않게 하여 신들의 화(禍)로부터 벗어나고 신들을 즐겁게 하여 복을 누릴 것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민감할 뿐이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우리들의 일상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개화되고 물리적으로 깨우침을 받아서 미신적이고 터부시되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매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주술적인 방법과 귀신의 힘을 빌어 자기가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한 때에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자신이 마땅히 이 세상에 존재하여야 할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도한 신지식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야곱은 하나님과 가깝게 알고 지냈던 것이다. 야곱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통해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시겠다는 거룩한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위기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믿음이란 충분히 상호 신뢰할 수 있을만한 근거 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이치를 무시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을 만한 구체적인 증거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얍복강에서의 야곱의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이스라엘의 뜻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이기었음이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해 주심으로서 야곱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합당한 인물임을 재확인 해 주셨다. 가나안을 떠나올 때의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으로 입성하고 있는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을 매우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을 떠나 올 때의 야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새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입성하고 있는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올 때의 야곱이 아니라 이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인물임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통해 야곱이 전혀 새로운 인물임을 재확인 해 주신 것이다. 야곱은 얍복강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인물로 탄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