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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애론
환경 감수성의 시적 사유, ‘with-ness(함께-있기)’의 시학
-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을 중심으로
권대근
문학박사, 명예철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늦은 시간이 최선의 시간이다. 다스림부산의 월례회를 통해 생산된 문학적 물음들을 여러 문학동지들과 공유하는 것은 우리 문학발전을 위한 좋은 기호기가 될 것이다. 본고는 우리 다스림부산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평자가 써내는 비평적 해설이 먼지의 먹이가 되기보다 훌륭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우리 다스림부산 여러분의 필로우노트가 되었으면 한다. 또 이것이 자기 점검의 기회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바슐라르는 “시란 사물의 내부에서 태어나는 상상력의 불꽃”이라고 말했다.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려면, 시인은 진보적이어야 한다. 장정애의 두 시, <비닐봉지와 바람>과 <이사하는 나무>는 바로 그 불꽃이 사물과 자연의 깊은 내부에서 피어오른 사례로 진보적 시각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무생물’로 바라보는 대상들을 감각적 주체로 호명하며, 그 존재의 이동과 흔들림 속에서 발생하는 정동과 상처를 들려준다. 시는 사물과 자연이 결코 침묵한 객체가 아니라, 세계의 사건적 흐름에 참여하는 동료 존재라는 것이다. 장정애 시인은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작가로 현대사회가 처한 반생태적 성향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인간의 반성을 촉구하는 데 있어서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진동”이라 말했다. 이 관점을 통해 두 시를 함께 바라보면, 비닐봉지와 나무는 각각 바람, 도로, 물길, 트럭, 별빛과 같은 외부 힘과 관계 맺으며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이들은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진실, 상처, 두려움, 고독, 새로움을 드러낸다. 장정애는 이 사건적 진동을 언어의 표면 위에 섬세하게 떠올려 생태적 감수성과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독특한 시적 장치로 구현한다.
생태계의 현 상황을 불러일으킨 원을 문제 삼거나 기술과 사회 발전에 분명한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더라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반판적으로 조명한다면 생태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을 진정으로 보호하려면 먼저 자연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장정애의 시는 바로 그 ‘느낌의 복권’을 수행한다. 두 시는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차원에서 장정애 시인은 당대의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의 의식 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작가라 하겠다. 우리는 인간의 편의와 개발 중심의 세계가 밀어낸 존재들, 버려진 비닐봉지와 옮겨지는 나무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배경’이라 여겨온 것들이 사실은 감각과 기억을 가진 생명적 주체임을 이 시를 통해 마주하게 된다. 두 시는 자연과 사물을 다시 느끼고, 다시 듣고, 다시 보게 만드는 감각의 윤리를 서론에서부터 예고하며, 생태적, 철학적 독해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열어젖힌다.
Ⅱ.
문학은 언제나 ‘사건’을 통해 세계를 드러낸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사건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힘들의 교차점이며, 그 지점에서 존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갱신한다. 장정애의 두 시 <비닐봉지와 바람>과 <이사하는 나무>는 각각 인간이 만든 물질과 자연적 생명체가 경험하는 비가시적 사건들, 떠남, 이동, 흔들림, 소거, 재정착의 미세한 진동을 포착한다. 한쪽에서는 플라스틱이라는 인공적 몸이 자유의 환상을 겪으며 생태적 고통의 장면을 관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대적 개발 논리가 밀어낸 나무가 뿌리의 재서사를 쓰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받아들인다. 이 시적 사건들은 단순한 소재적 움직임이 아니라 근대문명과 생태계, 인간과 사물, 기억과 환경 사이의 균열을 가시화하는 사유의 틈이다. 한국에서 생태문학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이후 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생태시라는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 환경시, 환경생태시, 생명시 등 다양하게 불렸다. 바슐라르가 “시란 존재가 스스로의 깊이를 인식하는 순간에 태어난다”고 말했듯이, 이 두 시는 각기 다른 대상에게 생겨난 미세한 균열과 통증의 순간을 통해, 오늘의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따라서 두 시는 작가의 생태학적 관심을 추적할 수 있는 사례다.
비닐봉지가 좋아하는 것은 바람이다
텅 빈 가슴을 부풀려
바람의 손길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돈다
너의 손을 떠난 뒤
나는 자유라고 믿었지만
그 길 끝에는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지는 아픔이
물길에 휩쓸려 몸을 적시는 슬픔이 있었다
나는 얇은 날개 펴고 날고 싶었지만
새가 아닌 쓰레기였고
구름을 닮고 싶었지만 하늘에게는
상처를 남겼다
바람은 나를 밀어냈고
자연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야 알았다
완벽한 자유는
그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 <비닐봉지와 바람> 전문
권대근은 오래 전부터 문학가의 다섯 가지 지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생명, 생태, 인권, 자유, 평화의식이다. 김지하, 홍용희 등 일부 지식인은 생태문학 대신 생명문학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생태문학(ecological literature)과 생명문학(bio-literature)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핵심 초점과 사유의 지점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다. 생태문학은 인간, 동물, 식물, 환경 전체가 맺는 관계망과 상호성에 주목한다. 즉 ‘세계가 어떻게 얽혀 있는가’가 중심이다. 생명문학은 개별 존재가 가진 생명 그 자체의 가치, 존엄, 고유한 생명성에 더 초점을 둔다. 생태문학은 생태계, 환경적 위기, 종 간의 상호작용 등 시스템적 관점에서 사유한다. 생명문학은 생명의 탄생 죽음 회복 고통 등 존재의 근원적 감각과 생명의 신비를 다룬다. 생태가 ‘환경의 논리’라면, 생명은 ‘존재의 호흡’에 가깝다.
생태문학은 기후위기, 생태 파괴, 공존의 윤리 등 환경 중심의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생명문학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생명 자체의 고통, 탄생, 소멸을 다루며 존재의 내적 윤리를 탐색한다. 생태문학은 풍경과 관계를 묘사하는 데서 힘이 나오고, 생명문학은 생명의 떨림 촉각 체온 심장 같은 감각적 생명성을 포착하는 데서 힘이 나온다. 릴케는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더 오래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정애의 <비닐봉지와 바람>은 바로 그 ‘사물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생태시다. 이 작품에서 비닐봉지는 단순한 폐기물이나 환경 오염의 표지가 아니라, 외부와 접촉하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사건의 장(場)이다. 들뢰즈가 말한 사건의 존재론, 존재란 본질이 아니라 ‘발생하는 힘들의 교차’라는 관점을 따른다면, 비닐봉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바람, 손길, 나뭇가지, 물길 같은 힘들과의 충돌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사건적 존재’이다. 시 속 비닐봉지의 부풀고, 흔들리고, 찢기고, 휩쓸리는 변화들은 하나의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고, “발생하는 변화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다.
생태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마가렛 애트우드의 말처럼 “자연은 인간의 거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명제를 시적 감각으로 구체화한다. 시적 화자는 인간의 손을 떠난 순간을 자유로 착각하지만, 그 자유는 자연에게 상처를 남기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나뭇가지에 찢기고, 물길에 젖고, 바람에 떠도는 경험은 단순한 물리적 파편화가 아니라,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만든 사물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어떤 고통의 궤적을 남기는가를 보여주는 생태적 증언이다. 비닐봉지가 자신의 상처를 진술하는 이 방식은 생태문학이 지향하는 ‘비인간 존재의 정동적 감각화’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인간 중심적 시선의 균열을 낸다.
신유물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시는 제인 베넷의 말, “사물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한다”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시 속 비닐봉지는 대상 object가 아니라 행위소 actant에 가깝다. 날고 싶어 하고, 구름을 닮고 싶어 하며, 상처를 인식하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낀다. 이는 인간이 부여한 기능적 의미를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경험하는 비인간 주체의 탄생이다. 특히 “새가 아닌 쓰레기였고 / 하늘에게는 상처를 남겼다”는 고백은 사물이 자기 존재론을 반성하는 장면으로, 신유물론이 말하는 ‘비인간적 감정성’과 ‘비인간 행위자의 윤리성’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장정애는 사물의 내면을 인간과 동일한 윤리적 지평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인간 비인간 세계가 연결된 하나의 공존체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가 지닌 더 깊은 지점은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는 우리를 자유롭게 했지만, 동시에 더 깊은 속박 속에 가두었다”고 말했다. 권대근은 지식인의 제일 사유가 근대적 성찰이라고 했지 않은가. 비닐봉지가 인간의 손을 떠난 순간 ‘자유’로 느꼈던 감각은 사실 근대 문명이 만들어낸 환상적 자유의 전형이다. 인간의 사용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된 비닐봉지는 손을 떠나는 순간 더 광범위한 자연의 위험과 소외로 던져진다. ‘자유의 순간’은 실은 책임의 부재와 통제의 상실이 만들어낸 허망한 상태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힘의 배치가 바뀌며 발생하는 단속적 사건일 뿐이며, 비닐봉지가 처한 생태적 상황은 근대적 자유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장면이 된다.
시는 파울 첼란의 말처럼 “진정한 깨달음은 상처를 돌아보는 순간에 온다”를 마지막 연에서 구현하며 마무리된다. 비닐봉지는 자신이 누린 자유가 자연에게 고통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문학은 문제의 제기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그 가치가 확인된다. 문학의 가치는 종종 사회적, 윤리적 문제제기에 있다고 말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학은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에 가깝다. 문제제기는 이미 판단과 입장을 포함하지만, 질문은 판단 이전의 열린 틈을 만든다. 문학은 바로 그 틈을 통해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고, 독자가 당연시하던 감정, 사고, 가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문학의 힘은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사유의 방향을 찾도록 이끄는 사유의 장(場)을 여는 데 있다. 문학은 완결된 진술이 아니라 끝없이 되묻는 감각, 즉 “이것은 정말 이렇게만 보아도 되는가?”라는 근원적 의심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질문의 예술이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사물의 자기 반성이 아니라, 독자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이 자연 속에서는 어떤 고통의 사건으로 이어지는가? 우리의 자유가 타 존재에게는 어떤 상처로 기록되는가? 장정애의 시는 그 질문을 사물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존재한 오랜 비대칭을 균열내고, 생태적 감수성의 새로운 지점을 열어젖힌다.
새가 날아가면서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파란하늘로
도로가 나무를 밀어냈다
당신의 뿌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트럭 위에 실린 채
가지들은 흔들리고
잎사귀는 불안처럼 떨렸다
누군가는
“이식”이라 말했지만
나무는 그것을
“이사”라고 받아들였다
익숙한 바람의 방향도,
어린 새들이 머물던 시간도
모두 두고 왔다
새로운 땅은
환영보다는 절차에 가까웠고
삽이 파고든 흙은
아직 당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밤이 오자, 나무는 잎을 조용히 열며
먼 별빛 아래에서
뿌리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 <이사하는 나무> 전문
릴케는 “모든 존재는 자기 자리를 잃을 때 가장 깊은 목소리를 낸다”고 말했다. 장정애의 <이사하는 나무>는 바로 그 ‘자리를 잃는 존재’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포착한 시다.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서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변화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들이다. 시 속 나무가 원래 자리를 떠나 트럭 위로 옮겨지고, 흔들리고, 낯선 흙 앞에서 머뭇거리는 과정은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나무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의 연속이다. “이식을 ‘이사’로 받아들였다”는 대목은 사물의 관점을 인간의 관점과 대등한 자리로 끌어올린 뛰어난 시적 전환이다. 생태적 사건을 의학적, 기술적 용어로 환원하지 않고, 나무의 감각과 삶의 서사를 존중하는 언어로 다시 세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한 줄은 존재를 대하는 태도의 격을 바꾸는 문장, 즉 대상에게 ‘처리’가 아닌 ‘이동’과 ‘삶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윤리적 상상력의 증거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나무는 뿌리가 뽑힌 순간 실체가 아니라 변화의 장으로 존재하며, 그 변화를 감각하는 존재로 다시 등장한다. 시는 이러한 사건적 존재의 모습을 섬세하게 시각화하며 들뢰즈적 사유를 자연스럽게 구현한다.
이 시는 그런 생태문학적 시선에서 볼 때, 인간이 구축한 도로와 개발의 논리가 자연 생명체를 어떻게 이동시키고 흔들어 놓는지를 드러낸다. ‘도로가 나무를 밀어냈다’는 표현은 인간 문명의 힘이 생태적 리듬을 교란하는 순간을 압축한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자연은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을 기억한다”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새들이 쉬어가던 가지, 익숙한 바람의 방향, 오랜 토양의 감촉까지 나무가 잃고 떠나야 하는 것들은 생태계라는 관계망 속에서 축적된 시간의 기억이다. 그 기억이 강제적으로 지워지는 순간 생태적 균열이 발생한다. 시는 이 균열을 감성적 내레이션으로 보여줌으로써, 생태문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비인간 존재의 체험적 감각화’를 수행한다.
이 시에서 나무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적 감각을 가진 행위자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이식”이라 말하지만, 나무는 그것을 “이사”라 받아들인다.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나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가지가 떨리고 잎이 흔들리는 모습 역시 두려움이라는 정동을 가진 존재의 표현이다. 이는 신유물론이 말하는 ‘비인간 행위자의 정동적 존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유물론자 제인 베넷은 “사물은 세계의 침묵한 동료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적극적 행위자”라고 말한 바와 같이, 나무는 단순히 옮겨지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환경과 관계를 맺기 위해 스스로를 재조직하는 주체적 존재다. 시인은 이 정동적 순간을 깊은 연민과 경청의 태도로 포착한다.
한편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는 속도를 숭배하면서 뿌리를 가볍게 했다”고 비판했다. 시 속 장면은 그 비판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개발과 효율의 논리는 나무의 뿌리를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나무의 이사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끊임없이 재배치하는 근대성의 구조를 상징한다. 새로운 터전은 “환영보다는 절차에 가까웠다”는 구절은, 자연이 인간 문명의 행정, 절차적 논리 아래 편입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자연의 재배치는 생태적 고려가 아닌 도시계획의 절차로 처리되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의 존재론적 시간은 배제된다. 이 시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사이의 근본적 균열을 조용히 고발한다.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는 밤하늘 아래서 ‘뿌리를 새로 쓰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히 적응을 넘어, 새로운 존재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창조의 행위다. 이 지점에서 파울 첼란의 “상처는 새로운 언어의 시작”이라는 말을 상기한다. 들뢰즈적 의미에서 이는 사건이 새로운 주체성을 생성하는 순간이며, 생태문학적으로는 생명체가 자기 회복과 재탄생의 서사를 스스로 구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중점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나무의 시선으로 세계의 변화가 서술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연을 대상화하거나 장식적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고, 자연의 내부에서 스스로 말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정애 시인은 생태적 윤리와 현대적 감각을 동시에 갖춘 작가의 의식을 드러낸다.
<이사하는 나무>는 한 그루의 이동을 통해 생태계의 흔들림, 근대성의 폭력, 비인간 존재의 감각적 주체성, 그리고 사건적 생성의 사유를 동시에 불러내는 밀도 높은 시다. 그것은 단순한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뿌리가 흔들릴 때 세계 전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우는 생태적 시학의 성취라 하겠다. 나무의 ‘이사’라는 표현은 근대적 개발 논리가 은폐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존재가 스스로의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느린 시간의 윤리를 호출한다. 트럭 위에서 흔들리는 가지와 밤하늘 아래 펼쳐지는 잎의 개벽은, 생명이란 늘 낯선 자리에서 새롭게 적응하고, 다시 뿌리내리고, 세계와 관계를 재구성하는 생성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시는 결국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넘어, 자연의 감각과 존재의 서사를 읽어내려는 한편의 사유적 선언에 가깝다. 그것은 단순한 장면의 묘사가 아니라, 뿌리가 흔들릴 때 세계 전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우는 생태적 시학의 성취라 하겠다.
Ⅲ.
두 시가 보여주는 비닐봉지와 나무의 목소리는 바로 그 ‘타자에게서 발견되는 결과’다. 우리가 가볍게 버린 것, 우리가 쉽게 옮겨버린 것 속에 자연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장 폴 사르는 “책임이란 선택의 결과를 타자에게서 발견하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했다. 시는 그 상처를 감각화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편의가 비인간 존재에게 어떤 고통의 사건으로 번역되는지를 다시 묻는다. 이는 생태윤리의 출발점이며, 장정애 시가 지닌 사회적, 철학적 울림이다.
<비닐봉지와 바람>의 고통스러운 자유, <이사하는 나무>의 떨리는 이동은 모두 자연의 ‘새로운 시작’이자 재탄생의 순간을 담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바람에 밀려 떠돌다 결국 자연에게 상처를 남긴 비닐봉지의 깨달음, 낯선 흙 위에서 다시 뿌리를 쓰기 시작하는 나무의 결의는 ‘생성의 철학’을 윤리적으로 확장한다. 들뢰즈의 사건적 존재론이 바로 이러한 생성의 여정을 문학적 감각으로 확인하게 한다. 장정애는 자연의 그 작은 몸짓과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여기는 작가라 하겠다.
로렌스는 “진정한 시는 세계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이라고 했다. 장정애 시인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기도하는 작가가 분명해 보인다. 장정애의 두 시는 잊힌 존재, 버려진 존재, 밀려난 존재의 삶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교정하고, 사물과 자연의 정동적 목소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우리가 만드는 사건의 파동은 어디까지 닿는가? 이 질문을 남긴 채 두 시는 조용히 세계의 감각을 되돌린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독자 안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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