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나루 축제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은 이제 하굿둑을 불과 10여km 남기고 깊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형국이다. 하굿둑만 넘으면 같은 물이지만 강은 곧바로 남해 바다로 바뀐다. 이곳 구포나루는 조선시대 낙동강 유역 3대 나루에 속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지금은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부산엔 낙동강이 있다. 사시사철 바다처럼 넓은 강을 조망하면서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입지조건이라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었을 터이다. KTX열차가 서울을 오가는 철도역이 있고 국제공항도 가까운데다 동서로는 남해안 고속도로마저 물고 있다.
현실은 인구감소에 비상이 걸렸지만 아파트가 많은 덕천 만덕 화명 금곡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어 구포나루 축제는 대성황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15년 전 이곳 북구를 떠난 사람이지만 축제 시화전에 작품을 출품한 L문인이 詩 <금정산>과 <화명동>을 카톡으로 보내와 만사 제폐하고 행사장을 찾았다. 하지만 색소포니스트이기도한 그는 만날 수 없었고 지난날 북구문인협회를 함께 했던 친구를 조우했다.
한여름에 비해 해가 많이 짧아졌는지 서녘으로 태양이 기우는 시각도 빨라졌다. 열 번째 맞은 축제 행사를 카페에 포스팅하기 위해 현장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사진에 관한 한 나는 참 재주가 없다고 자인한다. 60년대 중반, 중고 리코 카메라로 시작했으니 벌써 60년 가까운 세월이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미1군단 크래프트숍에 최신형 인회기가 있어 시작한 일이었고 긴 세월 동안 피사체를 렌즈에 담으면서 얻은 에너지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구포나루 축제에 초대받은 씨름선수 B가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와 붙어서서 사진을 찍고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할매들 표정도 밝았다.
1960년대 말, 직장 사무실은 서면에 있었는데 가끔씩 회식을 하면 우리는 꼭 멀리 구포다리 밑을 찾았다. 바다가 있는 항구도시에서 민물고기를 선호하는 누군가가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모르지만 난 마뜩찮았다. 강변을 따라 들어선 식당들은 포장마차처럼 낡은 조립식 건물에다 식수로 사용하는 물도 수돗물이 아니어서 꺼림칙했었다. 아마도 김해평야의 수로나 낙동강에서 잡은 장어나 메기 같은 민물고기 요리가 멀리서도 손님이 이곳까지 찾아오게 만들었지 싶다.
1970년대 중반, 우리 부산진영업소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정부 감사원 직원들은 모두 현장을 안내하는 우리 직원들보다 젊었지만 머리가 명석했다. 감사반장인 K계장만 40대 초반이었다. 회사에 차량이 귀해서 감사자와 안내자 4명이 한 차에 타고 사상공단을 오갔고 안내자들은 굽신거렸다. 감사반장 억양이 나의 고향 말씨와 비슷하게 들려서 물었더니 울진이라고 했다. "아, 그러면 반장님은 진짜 출세한 거네요" 했더니 "이 친구가 뭐라카노, 그러면 당신은 어디요?" 라고 되물었다.
고향을 김천이라 밝히면서 "울진엔 작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했지요?" 김천엔 6.25 때도 전기가 있었다고 했더니 반장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는 게 딱했던지 "그래요?" 하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날 점심은 구포시장 인근 '골목집'에서 8명이 장어탕으로 했다. 이날 처음 안내에 합류한 H가 나와 한 조인 S감사관에게 먼저 추어탕을 올린다는 것이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의 허벅지 위에다 국그릇을 엎지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난 그날 오후부터 사흘간 밀린 업무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