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89
12월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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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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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hGa8328xMk (이규용 유스티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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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피조물인 한 인간이 자신의 두 눈으로 탄생하신 메시아, 거룩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직접 뵙는 영광이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직접 뵈옵는 천국의 행복한 상태, 한 신앙인으로서 지복직관처럼 더 큰 은총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강조합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지복직관의 은총이 다가올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코린토 1서 13장 12절)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은혜로운 지복직관의 선물이 살아생전 주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몇 명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나자렛의 이웃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의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시메온이 그랬습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시메온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뵌 타이밍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얼마나 경건하고 충실한 신앙인이었던지 성령께서 항상 그의 머리 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시메온이 성령의 은총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던 중 그토록 염원하던 지복직관의 은총을 입습니다.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온 것을 시메온이 발견한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메시아 하느님,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평생소원이었던 지복직관을 만끽한 시메온은 이제 더 이상 소원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크신 주님 은총에 시메온의 입이 열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에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29~30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메온이 누렸던 ‘살아생전 지복직관’이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아닙니다. 부당한 죄인인 우리에게 ‘살아생전 지복직관’ 그게 가당하기나 하겠냐는 의문이 들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가 영하는 빵과 포도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매일의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좀 더 잘 준비하고, 좀 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한 후,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할 때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룩한 영성체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좁디좁은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죄로 얼룩지고 때로 비참한 우리 몸이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 내 육신이 예수님께서 머무시고 사시는 지성소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우리 인생이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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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NdzW50FaE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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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어떤 사람을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되시고 이때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시메온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결국,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관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는 소리기도와 묵상기도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소리기도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고 묵상기도에서 정신적으로도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마음의 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오늘 시메온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인생에서 오직 그분을 만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또 그분께서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믿음을 성장시킨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포스베리의 역발상’이란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 육상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배가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바를 넘습니다. 이른바 ‘배면뛰기’ 자세입니다. 하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한 선수가 이 자세를 처음 선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바를 앞 또는 옆으로 장대를 넘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당시 21살의 미국 선수 딕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했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배면뛰기는 현재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포스베리 플롭은 지금도 스포츠사에서 역발상의 백미로 꼽히고 있고, 스포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배면뛰기를 하기 전까지는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박한 실력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분명히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뜀틀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뒤로 뛰기를 연습합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뛰어야 가장 좋은지의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기록이 향상되었고 올림픽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현재 수영 자유형과 배영에서 발로 턴을 하는 동작인 ‘플립 턴’의 발견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돌프 키예프 선수는 100야드(91.44m) 배영 경기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마의 1분 벽을 깨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물속에서 회전하여 발로 터치를 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1935년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59.8초로 마의 1분 벽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배형 100m에서 기록한 1분 05초 9는 이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고 믿으면 분명히 만나게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반드시 만나는 해답이 있는데, 그리스도도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양 날개로 사랑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는 완전한 ‘희망’과 또 그렇게 희망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분은 만나주신다는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에게 그런 희망과 믿음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누구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는 진정으로 ‘원하고’ 어떤 이는 원하는 척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해야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천사와 별로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빛깔’(The color of Paradise)입니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에게 손가락의 감각으로 세상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해주는 아저씨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모두 내게서 도망가요.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맹인학교에 다녀야 해요. 내가 원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우리 선생님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근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저는 그분을 느낄 수 있대요. 저의 손가락의 감각을 통해서요. 그래서 저는 손을 여기저기 뻗는 거예요. 하느님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마음속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손의 감촉으로 나무의 질감을 느껴서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일거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손을 뻗다 보면 주님을 만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무하마드는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나뭇잎들을 손으로 뒤집니다. 자칫 새끼가 다칠 수 있으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고양이가 다가옵니다. 그는 새끼 새를 고양이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솔방울을 들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노리는 새들을 쫓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무하마드는 새끼 새를 자신의 윗도리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기어오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힘겹게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만을 만나려는 바램과 그분을 반드시 만날 수 있기에 나의 더듬거리는 손짓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희망만이 결국엔 우리를 한 완전한 실체인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끕니다. 관상에서의 그분과 만남은 한 인간이나 혹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한 온전한 사랑의 실체와의 만남입니다.
이 한 번의 만남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한 번의 만남이 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분과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사탄이 만든 것을 본 것뿐입니다. 이는 마치 애벌레의 시선이 나비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목마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김하종 신부가 한 냄새나는 가난한 아저씨를 안았을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로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처럼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만을 원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명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이 희망과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엔 주님께서 당신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행복한 존재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관상가의 삶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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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22-35 :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을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여 “일년 생 어린양”도 아니고 “작은 집짐승 하나도 마련할 힘이 없는”(레위 5,7) 처지였기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물은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이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낸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진닌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일생 동안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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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산모가 정결례를 거행하는 것과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자체는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실천하는 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경우에는 특별한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셨기 때문에 정결례를 거행할 필요가 없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결례를 거행하고, 예수님을 봉헌한 것은율법 준수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것도,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없는데도 바치신 것도(마태 17,24-27)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정결례 제물은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입니다.(레위 12,6)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는 사람은, 즉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됩니다.(레위 12,8) 성모님이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나 딸을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그 일이 누구에게나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일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들이나 딸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기뻐하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 아들이나 딸을 봉헌하는 것은 ‘빼앗기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부족한 것이고, 봉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28-35)”
예수님에 대한 시메온의 예언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했던 말을(루카 1,32-33) 다시 확인해 준 ‘증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과 시메온의 예언은, 뜻은 같은데 표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보면 ‘모든 민족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즉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원은 국적, 민족, 남녀, 신분, 인종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구원’입니다. (아마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예수님을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라는 시메온의 말을 듣고 놀라게 됩니다.)
시메온이 성모님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또 성모님이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수는 적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해졌습니다.’라는 말은, 그렇게 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또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여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의 범죄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문에 성모님이 겪게 될 극심한 고통을 예언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라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이 구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언’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확정된 미래를 미리 말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일입니다. 확정된 미래도 없고,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없습니다. 미래도, 운명도 다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 갑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멸망 예언들, 또 묵시록에 나오는 재앙 예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심판, 재앙, 멸망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니네베에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예언했습니다.(요나 3,4)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고(요나 3,5-9),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고(요나 3,10), 그래서 니네베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요나는 거짓 예언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변덕스러운 분이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텐데, 요나가 자기 마음대로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생략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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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림 특강으로 버지니아의 성 정 바오로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에 버지니아에 있는 마리아 성지와 성 요한바오로 2세 기념관엘 들렀습니다. 대림 특강은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성지순례는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제게는 좋은 피정이었습니다. 마리아 성지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많았습니다. 천장의 돔에는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삼위일체, 성령강림, 예수님의 재림을 주제로 한 모자이크가 있었습니다. 대성당에는 작은 경당들이 있었고, 그 경당은 각 나라에서 봉헌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봉헌한 성모님과 예수님은 흑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경당은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타고 왔던 배의 모습으로 되었습니다. 경당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왔던 흑인들의 역사가 담담하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 성지에서 5분 거리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기념관도 좋았습니다. 버지니아에 가시면 마리아 성지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기념관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묵주기도의 신비와 그 신비에 연관된 구약의 사건에 대한 모자이크였습니다. 환희의 신비 1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함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모세가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듯이, 모세는 ‘나는 있는 바로 그분’이라는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환희의 신비 2단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계약의 궤를 들고 가는 사제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듯이, 마리아의 태중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바로 그분을 알아보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환희의 신비 3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왕에게 예언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동정녀가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환의의 신비 4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 드림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환희의 신비 5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음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장면에서는 다니엘이 위험에 빠진 수산나를 늙은 노인들의 함정에서 구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날라 커지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를 구약의 사건들과 함께 묵상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 한분인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청년시절, 덕망 높은 노인과 가을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때 무수한 별똥이 떨어져내려 두려워했더니 노인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 무수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데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게나.” 죽음은 언젠가는 꼭 오고 맙니다. 세상 종말도 언젠가는 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그 위에 있는 구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시메온의 평생 희망은 메시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희망이야말로 행복한 죽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망의 힘으로 살았고 그 희망의 성취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세상 모든 영예를 얻었던 솔로몬은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1-3)
세상 것들을 희망하면 결국 절망과 허무만 남지만 시메온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희망을 두면 세상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줍니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교육, 피정이면 언제나 일찍 오셔서 자리를 지켜 주시는 어르신들, 새벽미사에 참례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르신들을 기억하시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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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첫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출산한 여인은 사십 일 동안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요 주님을 섬겨야 하기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배를 치실 때 자기의 맏배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첫아들을 사제로 봉헌하여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맏아들을 봉헌하는 대신에 다섯 세켈(20데나리온)의 돈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열정,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이렇게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봉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들어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 쉽다면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매달립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바치고서 홀로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마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엎드려 통곡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내드릴 터이니 제 아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씨름한 뒤에야 비로소 애착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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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운동 바오로 신부님]
<마음의 문을 하느님께로 열자>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두 예언자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과 내일 복음에 나오는 한나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반드시 만나 뵈올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이 두 예언자가 가진 공통점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삶에서 오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고, 고통을 참아 견딜 수 있었고, 구세주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는 영광을 그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간 시메온은 정결 예식을 바치기 위해 성전에 들어온 아기 예수님을 뵙고는 구세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편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기쁨에 넘쳐 시메온은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시메온과 같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알아차리고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을 통하여, 그리고 늘 성령께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마음의 문을 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서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로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하느님께로 여는 오늘 하루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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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두 팔에 받아 안고>
성탄의 축복을 거듭 전합니다. 생각하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던 어릴 적 성탄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귀한 기다림의 자세이며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손꼽아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께 무엇을 얻으셨는지 여쭙겠습니다. 어떤 선물을 받으셨나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평생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던 사람, 시메온을 만납니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특별한 대림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무조건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기다려야 했던 시메온의 평생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해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초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약속,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예언은 자꾸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연로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 더 깊고 멀게 여겨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직 믿고 기다리는 자세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드렸던 시메온을 통해서 진지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배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의로움은 끝없이 기다리는 자세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르시는 독실함이란 흔들림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새깁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시메온에게 머무르시며 힘을 돋워 주신 이유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이 갖고 오신 평화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기다림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할 까닭입니다. 우리 품에 안긴 그분이 곧 구원이시니 그분을 안은 두 팔에 힘을 돋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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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32)
<봉헌의 의미!>
맏배, 곧 첫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봉헌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이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루카2,29-3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노래하면서,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시메온의 이 예언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이유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인 죽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2,3-4.6)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주님의 성탄'입니다. .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합시다! 서로가 나의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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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
루카 2,22-35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과 시메온>
사랑이 보여지시니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본다네
희망이 보여지시니
희망하는 사람이
희망을 본다네
위로가 보여지시니
위로받는 사람이
위로를 본다네
의가 보여지시니
의로운 사람이
의를 본다네
길이 보여지시니
길을 걷는 사람이
길을 본다네
빛이 보여지시니
빛을 품는 사람이
빛을 본다네
영광이 보여지시니
영광스러운 사람이
영광을 본다네
구원이 보여지시니
구원받는 사람이
구원을 본다네
십자가가 보여지시니
십자가를 진 사람이
십자가를 본다네
그리스도가 보여지시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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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동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히 요즘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는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 한 분은 지금이라도 빨리 사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분은 이제 오를 만큼 올라서 곧 폭락할 것이라며 절대 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 다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과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부동산으로 이득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경험은 모두 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세상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중에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 특히 사람들이 존경했던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맞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 의지하며 판단해야 해야 합니다. 오류를 줄이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열심한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언자’로 알려진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세주를 기다렸고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그 부모를 보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흘러서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오래전에 자녀를 시장에서 잃어버린 어떤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딱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시더군요. 시메온은 4천 년 동안 기다렸던 구세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갓난아기의 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우리 먼저 그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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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진다.>
한 그룹은 중병을 앓는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편지를 쓰게 했고, 다른 그룹은 라틴어 문장이 가득한 페이지에 철자 ‘이(e)’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과제를 마친 뒤에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으며, 풍요로운(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남에게 자기 시간을 내어주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풍요로움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결코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사용하고 의미 있게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내 시간만을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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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빛을 알아보는 은혜를 청해야>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기다림이 컸으니 그를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품에 안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녀야겠습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 보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9-11)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빛이신 주님은 이웃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빛을 알아보는 은혜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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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
-한결같은 삶-
며칠전 사랑하는 도반, “빛(Lumen)” 수녀로부터 뜻밖의 친필 성탄 카드 받고 기뻤습니다.
-“공경하옵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오심을 축하드려요. 강생의 신비가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나의 공덕과 관계없이 사랑이며 자비인 것을!! 근래 저는 분도 계간지 겨울호에 나온 신부님 글을 읽었습니다. 한결같으신 우리 신부님! 신부님이 계셔서 하느님도 흐뭇해 하실 것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노수도자의 삶, 잘 즐기시길 빌며. Sr Lumen”-
제 가장 선호하고 소망하는 삶이 한결같은 정주의 삶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 감염병 시대가 더욱 관상의 깊이,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정주의 영성을 찾게 합니다.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입니다. 한결같은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정주의 시메온 예언자를 묵상하며 저와 연관되어 즉시 떠오른 강론 제목입니다.
나이 70을 훌쩍 넘었지만 노老수도자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습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익어가는 것이지요. 하루하루가 영원이요, 정신은 열정은 여전히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이란 생각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밖으로는 산, 안으로은 강을 살아가는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산山과 강江의 영성이 바로 정주의 영성이요 다음 제 좌우명시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환대歡待하며 살았습니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바로 여기 수도원에서 33년동안 ‘산과 강’의 정주의 영성을 살아가는 제가 그러하고, 오늘 복음의 정주의 예언자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이 그러합니다. 다음 시메온에 대한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주님께 대한 신망애信望愛의 결정체가 정주 영성입니다. 정주의 축복을 상징하는 듯, 성령께서 늘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어 한결같은 기쁨의 정주입니다. 마침내 오매불망 기다리던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말 그대로 정주 축복의 절정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은 장구한 세월 하루하루를 마치며 끝기도 말미에 시메온과 함께 이 아름다운 찬미가를 바친후 복된 죽음과도 같은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영광의 빛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정주의 축복을 능가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이 지나 때가 되자 성령의 은총으로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아기 예수님을 만나 가슴에 안고 환대하며 기뻐하는 시메온입니다. 흡사 인동초忍冬草와 같은 정주의 삶을 살았던 시메온이요, 더불어 생각나는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내용은 순전히 시메온에 대한 주석처럼 생각됩니다. 사랑의 계명 준수를 역설하는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그대로 정주의 사랑과 직결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이 지나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빛,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러니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빛 속에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제 삶의 자리에서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내적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계명은 단 하나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주님은 우리 모두 한결같은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으로 당신을 닮아 사랑의 대가大家, 사랑의 달인達人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 영성의 궁극 목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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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k3PAoJYO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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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 30)
산고(産苦)의
고통 뒤에
찾아오는
구원의 빛이다.
구원의 빛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구원을 본 사람은
구원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이다.
공허한
일상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빛이 된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라는 무게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일상은 구원을
향해 있듯
구원은
일상이 되어
이미 일상 안에
들어와 있다.
일상을
반죽하면
감사와 기쁨으로
변한다.
일상의 관계를
구원의 빛 앞에
내려놓는다.
내려놓기에
열리게 되는
일상의 신비이다.
내어놓기 싫은
일상도 이제
내어놓는다.
구원이란
우리의
일상을
내어놓는
내어놓음의
빛이다.
내어놓는
우리 일상의
그 자리에
성탄이 있다.
일상이 있기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기에
우리들
일상이 있다.
일상의
고통 뒤에
만나게 되는
구원의 빛이다.
일상으로
드러나는
구원을 본다.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일상의 빛이며
일상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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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갈등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사랑했던 많은 이들의 믿음에서 놀라움과 기쁨을 만납니다. 작은 아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시메온의 겸손에서 또한 진정한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감사의 선물입니다. 감사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을 일깨워 주는 가장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선물은 성탄의 선물입니다. 성탄을 통해 새 마음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마음에서 태어나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가까운 이들은 성탄에 가까이 있는 이들입니다. 성탄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메온의 믿음을 변함없이 붙잡아 주신성탄의 진실한 사랑이 하느님과 보다 더 가까워지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성탄의 신비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우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는 구원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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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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