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는 기체 ⑥ F-111 카다피를 살해한 굵직한 폭격기
The F-111 Was a Muscular Bomber That Nearly Killed Gaddafi
Aardvarks flew combat missions in Vietnam, Libya and Ir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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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 공격기 제너럴 다이내믹스 F-111 Aardvark는 다른 사양을 상정하고 있던 공군과 해군에 당시 국방 장관이 억지로 떠넘겨 탄생한 기체이다. 개발 중에 문제가 있었지만 고성능 하이테크 야간 폭격기로 수십년에 걸쳐 공용되며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특징적이었다. 미 공군은 1960년대 초반에는 고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는 저속에서 SA-2 레이더 유도 지대공 미사일에서 도망 칠 수 없다고 주의한다. 그래서 소형 장거리 초음속 폭격기가 지상을 아슬 아슬 날아 레이더 탐지를 피하는 새로운 구상이 태어났다. 미 해군도 항공모함 방어를 위한 고속 장거리 요격기에 공대공 미사일로 소련 폭격기를 먼 곳에서 제거시키는 구상의 검토에 들어가 있었다.
신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공통 기자재의 경우 양군의 요구을 만족시키면서 개발 비용을 크게 절약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공군과 해군은 사양면에서 타협이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TFX 사업으로 협력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962년 국방부는 제너럴 다이내믹스와 계약을 한다. 기체는 공군이 원했던 전략 폭격기보다 작기 때문에 해군이 사용하는 '공격기'의 약어를 피하고 전투기 'F'가 붙었다.
혁신적인 디자인
F-111은 강력하고 연료 소비가 뛰어난 TF30 터보팬(애프터 포함) 쌍발기로 기체 내부에 폭탄을 31,000 파운드와 작전 반경 2,500마일 분의 연료를 탑재하고 외부 탱크를 붙이면 1,000 마일을 연장 할 수 있었다. 공허 중량은 20톤의 대형기로 완전 장착하면 두배가 되었다. F-111 디자인 팀은 하나 과제가 있었다. 비행은 초고속에서도 이착륙은 단거리에서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날개를 작게 하면 항력이 줄어들어 속도는 높아지지만 양력이 작아 이륙 속도를 빠르게 해야해서 긴 활주로가 필요하다. 당시 초음속 전폭기 F-105 선더치프도 날개가 작고 이륙시 1마일의 활주로가 필요해서 운용 기지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F-111는 새로운 기술의 가변구조 또는 스윙날개를 채용하었다. 이륙시는 날개를 펼쳐 최대한 양력을 얻고 비행시 날개를 감싸 고속을 얻는다. 이전에도 시도는 있었지만 실용화는 F-111이 처음했다. 승무원 두명은 조종석 창으로 서로 이웃에 앉는다. 탈출시는 로켓 분사로 포드를 사출하고 우주 캡슐처럼 지상에 낙하산으로 낙하시켰다.
관건이었던 혁신은 지형 추종 레이더로 기체 전면의 지형을 파악하여 충돌을 방지할 비행 경로를 자동 형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F-111은 지상 200피트를 야간이나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고속 비행 가능했다. 어둠을 아랑곳 하지 않고 긴 기수를 지상에서 트렉킹 비행하기 때문에 땅 돼지의 애칭이 생겼다. 초기형은 예상대로 저공을 마하 1.2로 고고도에서 마하 2.5를 내면서 착륙 활주로 길이는 불과 2,000피트로 충분했다. 또한 전술기 최초로 미 대륙에서 유럽까지 무급유로 횡단 비행 할 수 있었다. 하지만 F-111의 기본 설계는 공군의 요구 사항을 중시하고 있었다. 항모 탑재 요격 모델 F-111B의 시운전 결과는 참담한 지경으로 마하 1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 정도였다. 고액의 지출 끝에 타협의 결과 해군형은 폐기됐다. 그러나 일부장치는 F-14 톰캣에 인계됐다.
FB-111s. US Air Force photo
아시아의 전개
공군의 F-111 전투 데뷔는 경사스럽지 못했다. F-111A 파견대가 베트남에 배치된 것은 1968년으로 3대가 겨우 55회 출격으로 추락 상실한 것은 주익 안정기구의 결함 때문이었다. 공군은 F-111 전기를 비행 중지하고 해결에 1억달러를 지출했다. 1972년 라인배커 공습이 시작될 때까지 실력 발휘의 장소가 아니었다. 북베트남의 레이더망을 뚫고 F-111은 야간 공습으로 비행장과 대공 진지를 분쇄하고 후속 B-52 용으로 방공 체제를 약화했다. Aardvark는 호위 전투기, 전자 지원, 공중 급유기가 불필요하고 악천후에서도 작동 가능했다. 베트남전에서 총 4천번 미션을 했지만 전투중 손실은 불과 6대로 당시의 전기종에서 최저 수준이었다. F-111의 동남아 마지막 실전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가 컨테이너선 S.S. 마야게즈를 나포한 1975년 5월이었다. Aardvark 2대가 훈련 비행중 이 배를 발견하고 이 중 한 대가 크메르 루즈 초계정을 격침했다.
리비아 공습을 준비하는 F-111F 1986년 4월 U.S. Air Force photo
파생형 각종
F-111은 각 유형 따라 563대가 생산되어 A형에 이어 D형 E형은 전자 장비가 충실하고 엔진의 공기 흡입구의 변화와 추력이 증가했다. FB-111 전략 폭격기의 엔진 성능을 끌어 올려 길이를 2피트 연장하고 연료를 추가 탑재했다. 75기가 전략 항공 군단으로 가동했다. F-111C는 호주 전용으로 미국이 매각한 것으로 FB-111과 F-111E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었다. 결정판은 F-111F 추력이 35% 증가한 엔진 성능 향상형 레이더 페이브트랙 적외선 목표 보충 포드에서 지상 목표물을 포착하고 정밀 유도 탄약 공격이 가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42대의 F-111A가 무무장의 EF-111A 레이븐 전자 방해기에 15억 달러로 개조되었다. EF-111의 핵심 장비는 ALQ-99E 재밍 포드에서 레이더를 방사선으로 방해하고 아군기의 발견을 불가능하게 했다. 방해 전류는 기내에 누출되어 승무원의 모발이 설 정도였다. 이 때문에 레이븐은 “Spark Vark” 라는 별명이 붙었다. EF-111은 꼬리의 수신 포드에서 식별이 가능하다.
F-111F 이 Mark 82 폭탄을 훈련 투하하고 있다. 1986년 U.S. Air Force photo
엘도라도 캐년 급습 작전
F-111이 세계사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86년 리비아 공작원이 베를린의 라벨 나이트 클럽을 폭파하여 미군 2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직후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거주지를 트리폴리 교외에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작전명은 엘도라도 캐년 작전으로 명명하고 국가 원수를 공습으로 최초로 암살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트리폴리는 SAM의 25진지로 지켜지고 있었다. F-111F 한개 비행대 18대가 공격의 중심이 되어 4대의 EF-111 레이븐이 방공 레이더를 방해했다. 별도로 해군이 벵가지 부근을 공습했다. 유럽 각국이 상공 통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Aardvark 각기는 영국을 이륙후 스페인을 우회하여 비행은 13시간 및 공중 급유를 왕복으로 6회 실시했다. 전투기의 최대 미션 기록되었다.
공습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는 해도 F-111 전략 효과와 작전 내용에 불만족이 남았다. F-111 1대를 상실했다. 아마 SAM에 의한 것으로 탑승자는 사망했다. 4기는 에비오닉스 고장으로 무장을 투하하지 못하고 1기는 엔진 과열로 스페인에 비상 착륙을 강요했다. 7기에선 목표를 벗어난 폭탄 여러발이 일반인 거주지에 떨어지고 하마터면 프랑스 대사관에 명중할 뻔했다. 카다피는 공습 직전 이탈리아 총리의 경보를 받고 괴롭게도 도망친다. 자녀 8명과 아내가 부상하고 양자인 아기 한나가 죽었다고 한다. (한나의 출생에 대한 의문이 있으며 실제로 살아 있다는 논란도 있다) 카다피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 후에도 테러 공격을 계속하고 특히 팬암 73편 납치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팬암 103편 폭파로 잘 알려져 있다.
사막의 방패 작전에서 F-111F US Air Force photo
이라크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 개전 밤에 Aardvark는 사막을 저고도로 굽이 굽이 날아가 이라크 방공 주요 군사 시설을 레이저 유도 폭탄으로 공격했다. 한편 EF-111 레이븐은 연합군 부대에 동행하여 이라크 국내 깊이에 침입하고 이라크 방공 레이더를 재머로 방해했다. 1991년 이라크전에 투입한 것은 F-111F가 66기와 F-111E의 18기로 미션은 5000회에 달했다. 소문과 달리 개전 첫날 이라크 공군은 무력하지 않았다. F-111의 2기가 MiG-23의 적외선 유도식 R-23 미사일에 의해 피탄했다. MiG-29도 다른 Aardvark를 R-60 미사일로 피탄시키고 있다. 하지만 튼튼한 Aardvark는 선명한 모습으로 그 3기가 기지로 귀환하고 있다.
2월에는 EF-111에서 운이 없는 사례가 나왔다. 적기를 탐지후 회피 기동중 지상에 충돌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그러나 제임스 덴튼이 조종하는 레이븐은 심상치 않은 승리를 거머 쥐었다. 사막의 폭풍 첫날 덴튼의 EF-111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 고도 400피트에서 비행하여 F-15E 전폭기 편대를 호위하는 F-15C 전투기 편대를 선도하고 있었다. 비행장의 H3를 통과하면서 이라크의 미라지 F1 전투기 한대가 뒤에서 다가왔다. 덴튼은 기민하게 왼쪽으로 회전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채프를 방출하고 열 추적 미사일을 회피했다. 이라크 조종사는 레이븐이 회피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간 식별을 잃고 지상에 충돌했다. 무무장의 레이븐이 공중전 승리를 거둔 F-111 "전투기"가 되었다. 이라크 방공망이 약화하면서 Aardvark는 지상 공격으로 중심을 옮겼다. F-111F의 Pave Tack 장비는 "tank plinking" 즉 적외선 센서에 의한 장갑차 식별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레이저 유도 폭탄를 머리에서 투하했다. F-111은 이라크 차량 1,500량을 확인했다.
다른 표적에 사담 후세인이 방해 공작을 한 유전 연결관이 페르시아만을 오염된 원유 유입을 방지했다. 사막의 폭풍은 Aardvark의 마지막 현역 활약의 장소가 되어 F-111은 1998 년 미 공군에서 퇴역했다. Aardvark 효과는 높지만 유지보수 비용이 높고 공군의 단거리 공격 임무는 F-15E 스트라이크 이글로 장거리 공격 임무은 B-1 폭격기가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공군에 EF-111 교체 기종이 없고 재밍 임무는 해군 해병대의 EA-6B 프라울러와 EA-18G 그라울러가 지금도 실시하고 있다.
호주의 골드 코스트에서 "dump and burn"을 하는 F-111, 2008년. Simon Morris/Flickr photo
호주
호주의 F-111은 2010 년까지 가동되어 호주에서 사랑하고 있는 "돼지"라고 했다.
1973년 수령한 F-111C 24기 이외에 FB-111을 15기 F-111A 4기를 호주는 운용했다. 전투 투입은 한 번도 없었지만 호주는 F-111에서 무력 투사 능력을 확립하고 외교상의 강점이 되었다. 돼지는 호주 에어쇼의 주력으로 연료를 방출한 곳에 애프터 버너로 점화하는 “dump & burn”은 유명했다. 호주는 대함 미사일 운용을 개조 외에도 4대를 정찰용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운항 비용이 높아 F-18F 슈퍼호넷 24대로 교체시켰다. 이렇게 F-111은 모두 퇴역했지만 유사 기종이 아직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수호이 Su-24 펜서는 F-111의 직후에 기획된 놀라운 외관과 임무가 유사하며 가변 날개의 첨부이기도 하다. Aardvark의 항속력, 속력, 무장 탑재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Su-24의 생산수는 3배로 오늘날에도 300기 가까이가 가동중이다. 터키 공군의 F-16이 2015년 시리아 상공에서 격추한 기체도 러시아 공군의 Su-24로 외교면에서 큰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