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남을 설득(rhetoric)하려고 할까? 물론 먹고 살기 위해 한다. 그렇다면 그 설득 하는 방법에는 파토스(pathos)의 방법, 로고스의 방법(logos)의 방법 그리고 윤리의 방법(ethos)의 방법이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는 윤리가 앞선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는 파토스, 즉 열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게 좌파들이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파들은 로고스에 방점을 둔다. 그 방법은 지혜를 얻는 방법이다. 상황적 종합판단, 즉 균형감각을 가지는 것이다. 그건 역사에서 지혜를 얻고, 그게 공통감각을 갖게 하는, 즉 윤리의식을 갖게 한다. 좌파는 위기를 폭력과 테러로 돌파구를 찾지만, 우파는 지혜로 위기를 넘기고, 좌파를 포용한다.
SkyeDaily 양준규 기자(2022.10.25.), 〈전쟁 풍파에도..팔도∙오리온 ‘꿋꿋’〉, “팔도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을 때도 러시아에서 철수하지 않고 판매를 계속했고 이에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의리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팔도는 러시아 라면 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하는 ‘국민 라면’으로 거듭났다.”
마르크스는 개종한 유태인이다. 그는 ‘물적 토대’ 온 정성을 쏟았다. 중앙일보 서경호 논설위원(102.5), 〈『공산당 선언』『자본』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이었네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자본론』을 지혜서로 읽는 사람들은 우파이고, 『공산당 선언』을 읽는 사람들은 좌파이다. 그들은 폭력과 테러만큼 급격한 사회변동에 효과적인 것이 없다고 믿는다. 특히 불황이 다가오고, 겨울이 다가올수록 급격한 사회변동을 꿈꾼다. 올해는 기후변동이 심하다. 봉사활동을 가니, 대추가 예년에 비해 1/10이 달렸다고 한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폭력과 테러의 전형이다. 파토스가 심하다. 유럽의 먹고 사는 문제에 위기가 온 것을 안 푸틴은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지혜를 사용했다. 7년 가뭄으로 인한 흉년이 왔다. 야곱은 식솔들과 가축을 몰고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간다. 야곱의 아들은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넘겼다. 요셉이 온 이집트 나일강은 비옥한 토지를 가졌다. 정책만 잘 펴면 먹고 사는 것에 지장이 없는 곳이다.
창세기 46장 31절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 식구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올라가 파라오께 이렇게 아뢰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제 형제들과 아버지의 집안 식구들이 저에게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본디 가축을 치던 목자들이어서 양 떼와 소 떼, 그리고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파라오께서 여러분을 불러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거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임금님의 이 종들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가축을 쳐 온 사람들입니다. 저희도 그러하고 저의 조상들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고센 지방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모두 역겨워하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로 봐서 비옥한 땅에 가축을 기르면 고기와 가죽을 얻을 수 있고, 야곱의 식솔들은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윈윈 게임이다. 요셉의 지혜는 형제들을 구할 수 있었다.
공산권은 폭력과 테러의 본성을 드러낸다. 동아일보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문병기 워싱턴 특파원(10.25), 〈中 새지도부 24명 중 경제통 1명 뿐..선전선동-안보통 대거 포진〉, 중앙일보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10.25), 〈중화권 언론 ‘시진핑 3기는 전시내각, 대만과 일전 있을 것’〉, 폭력과 테러를 통한 종족적 민족주의가 발동한다.
동아일보 이진영 논설위원(10.25), 〈[횡설수설/이진영]후진타오의 퇴장〉, 폭력과 테러로 약탈적 행위가 계속될 전망이다. “▷시 주석에 대한 공개 발언을 자제한 덕분인지 후(진타오) 전 주석은 당대회에 초대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수모만 당한 셈이 됐다. 개혁 개방의 실용주의자였던 그의 퇴장은 시 주석의 중국이 정반대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이를 견제할 세력은 모두 제거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틀 후’로 불렸던 최측근 후춘화 부총리는 정치국 위원 24명에도 들지 못했다.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도 중앙위원 205명을 뽑는 선거에서 탈락했다. ▷시 주석의 측근 그룹인 ‘시자쥔(習家軍)’이 이번에 상무위원 서열 2∼7위를 싹쓸이하면서 집단지도체제를 1인 독재체제로 바꿔놓았다. 모두 10대 시절 문화혁명을 겪으며 홍위병에 ‘가스라이팅’ 당해 뼛속까지 공산당원인 사람들이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혁 같은 광신적 정책이 되풀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내고 전면에 나선 만큼 실패의 책임도 더 크게 돌아올 것이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10.25), 〈北, 5년 만에 NLL(북방한계선)까지 침범했다.〉, 폭력과 테러를 쓰고 싶은 것이다. 파토스가 적용된다. 물론 로고스는 잃은지 오래된 북한이다. 국민 먹고 살기에 위기가 온 것이다. 대한민국도 그렇게 만들었으니...문재인 청와대는 지난 5년간 술만 펐다. 물적 토대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폭력과 테러를 쓰도록 길을 열어줬다. 국내는 지혜를 잃어버렸다. 중앙일보 정종훈 기자(10.25), 〈한전 적자가 부른 23조 채권발행..지금 시장 ‘블랙홀’ 됐다.〉, 한국경제신문 김익환 기자(10.25), 〈급한 불 껐지만 … 기업 '단기차입금 폭탄' 532兆〉, “국내 기업이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 규모가 사상 최대인 53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3일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긴급 공급하기로 했지만 자금시장을 둘러싼 불안 요인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봉규 부경대 정치학과 교수(10.24), 〈한국발 지적혁명의 필요성〉, 로고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보고서 읽다가 탄핵을 당한 꼴이 되었다. 산업현장에 갈 때는 보고서를 숙지하고, 그 자리에서 즉석연설을 시도했다. 그게 FTA로 각국과 교역을 늘리면서고, 먹고사는 문제의 해법이었다. 그들은 기업인들에게 목이 터지도록 계몽을 한 것들이다. 독서광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지금 박정희∙박근혜의 전통이 무너진 것이다. “전후 한반도의 운명도 한편으로 지식의 격차였다. 무지한 김일성(장군)에 비해 이승만(박사)은 선각자이자 최고의 지성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을 승계한 박정희대통령은 일상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민족교사를 자처한 박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의 국민교육을 기술과 산업으로 결합시켰다. 조국근대화가 세계역사에서 기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지식(교육)과 산업, 기술과 조직이 결합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더더욱 공부 벌레이었다. 그 지혜가 지금 민주공화국 운영하고 있고, 로고스의 힘이다. 그게 획득한 자유와 독립정신...프린스턴대 정치학과 출신 이승만, 그 학과 교수 윌슨이었다. 윌슨은 1912년 11월에 대선에 당선되고, 8년 간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윌슨 대통령’은 19019년 1월부터 ‘민족자결주의’를 강변했다. 그 논리에 따르면 민족국가는 개인의 자유∙정의∙평등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위로 묶여지는 결속체였다.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다른 국가와의 적자생존 경쟁을 염원했다. 즉 개인의 주체성, 그리고 세계 속의 주체성을 지닌 민족국가의 건설은 당시 개인적∙국가적 과제였다. 여기서 민족적 자주 의식과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주의가 정신적 지주로 등장했다.
기미독립운동(1919. 3. 1.)이 벌어졌고, 노령임시정부(3.12)에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4∙13) 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 피선(6∙14) 되었다. 사실 국무총리에게 국무회의를 주도하고 있어, 임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명칭도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였다. 그러나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Korean Republic) 명칭으로 美英佛伊에 정부수립을 정식 통고하고, 그 때부터 한국 국제명칭(Republic of Korea)을 공식 발표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중앙총회장, 안창호)는 1919년 2월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명의로 작성한 위임 통치 청원서를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하였다. 그 내용 세가지로 ①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며, ②열강은 장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며, ③한국을 일정 기간 국제연맹의 통치에 둘 것 등을 청원서에 담았다. 당시 ’신채호는 ‘이승만은 나라를 되찾기도 전에 나라를 팔았다’고 성토하였고, 이동휘 국무총리는 총리를 사임하면서 ‘위임통치청원을 외교적 대실패’라며 비판하였다.
임시의정원은 결국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탄핵 이유로 ①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거의 머물지도 않았고, ②소극적태도로 직에 임하였으며, ③국고 수입 방해, ④헌법질서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등의 상해 임시정부 헌법에 근거하여 탄핵을 시켰다(박찬승, 2014).
물론 국내나 상해에서 실질 파워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일본인으로 볼 때 이승만 자신의 명성과 미국의 교계, 미국 정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계몽의 정도와 생각의 깊이 그리고 미국 언론을 동원시킬 수 있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李 대통령은 1919년부터 1943년까지 꾸준히,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며 효과적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과 국무장관들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하는 문서 외교를 전개했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잡지와 단행본, 팸플릿 등을 영문으로 출판, 배포했으며, 워싱턴회와 제네바 국제연행 총회에 임정의 대표로 참가해 각국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지시켰다.(이승만, 2012).
李 대통령의 외교력으로 그의 집정관총재 당시 국내 언론 자유도는 가장 높았다. 1920년 창간한 동아, 조선, 시사신문, 개벽은 1925년까지 현저한 자유도를 누리게 했다. 그 후 언론 자유는 소멸했다. 그의 탄핵은 곧 바로 위협으로 돌아온 것이다.
계몽의 중요성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헌법 정신의 계몽으로 위기 탈출 필요한 시점이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3차에 걸쳐 무자비한 공산당 색출이 이뤄졌다. 일제는 아라사와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공포의 대항으로 삼는 상대는 미국, 영국 정도였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4월 12일 치안유지법을 발동시켰다. 이 법 골자는 사유재산 체제를 거부하는 인사를 일망타진했다. 그게 1차 공산당 사건으로 1925년 11월 박헌영, 김재봉, 강달영 등 공산주의 계열의 9766명을 검거하고, 일제는 신의주 등으로부터 29명의 당 간부를 서울로 압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