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 거부권의 득과 실
중앙일보
입력 2023.06.16 01:00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토론과 비판 틀어막은 입법 폭주
여당 표심 걷어내려는 야당 전략
거부권 당위성 차분한 설명 필요
내년 총선 과연 어떤 결과 나올까
양곡관리법과 간호법, 의료법, 방송법에 뒤이어 노란봉투법까지, 민주당이 본회의 직회부를 통한 법률안 개정을 5번째 강행하고 있다. 사실상 법률안 의결권을 독점하고 있는 민주당이 다수의 힘으로 법 개정을 밀어붙인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국민은 거대 의석의 쓰나미 같은 입법 공세를 적잖게 경험했고, 세간에는 다수결의 횡포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는 공론이 많았다.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 본회의 통과 시 대통령 거부권을 건의한다는 입장이고, 민주당은 삼권분립에 반하는 입법권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대통령은 부담이 클듯하다.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하자니 농민, 간호사에 이어 노동자의 표심을 잃을지 모르고, 그대로 놓아두자니 저성장 구조에 갇혀있는 한국 경제에 미칠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그야말로 딜레마다.
이미 거부권을 행사하긴 했지만,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은 본회의 과속 통과로 우리 사회에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초래했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도 논란과 파장이 엄청나긴 마찬가지다. 사용자의 범위를 “근로 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로 확대하여 파업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 쟁의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여 기업의 방어권을 축소했다. 전 정부도 엄두를 못 낸 법안이다.
확실히 민주당은 대통령 거부권을 통해 여당의 표심을 걷어내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다. 거부권을 유도하는 무더기 입법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입법 공세에 대응하는 대통령 거부권은 야당 전략처럼 당장 눈앞의 이익만 보고 득실을 따질 수는 없다.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조목조목 당위성을 설명해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다만, 입법권과 거부권 중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논하기 전에 합의제 의사결정기구인 대한민국 국회의 입법과정에 관해 두 가지 짚어볼 게 있다.
첫째, 내부 토론을 묵살해 버리는 위계적 상명하복이 자리 잡아 간다는 점이다. 민주당 안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국회의원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별 국회의원을 거수기로만 여기는지 결론부터 내놓고 걸핏하면 당론으로 밀어붙인다. 강성 지지층을 앞세운 반대자 공격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이는 헌법과 국회법이 보장하는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행위다. 실질적 토론에 기초한 표결의 보장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이고, 대화와 토론을 통한 의견의 변경 가능성은 국회입법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개별 국회의원이 어떠한 법률안을 찬성할지 반대할지 숙고하는 행위의 목표는 ‘공공의 이익’이지 당파적 이익이 아니다.
둘째, 외부 비판을 틀어막으려는 절차적 편법이 판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이 말하는 다수결의 원칙은 반대의견을 밝힐 기회를 보장하고, 상호 토론과 설득의 과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국민이 법률을 준수하는 이유도 국회의원들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 끝에 꼭 필요한 법률을 제정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반대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한 방법을 공공연하게 자행해 왔다. 밀실 정치의 독선과 오만이 민주적 통제를 위한 헌법과 국회법의 제도적 장치를 무력화한 지 오래다. ‘회기 쪼개기를 통한 무제한 토론 봉쇄’, ‘위장 탈당까지 동원한 안건조정제도 무력화’, ‘원안의 취지 및 내용과 직접 관련성이 없는 수정안의 제안, 상정 및 의결’ 등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다수 세력의 일방적 입법을 저지할 수 있는 헌법과 국회법 규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다수당과 소수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특히 검수완박법으로 불리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헌법재판소의 각하 결정을 받은 후, 국회 입법과정의 하자에 대한 추상적 규범통제가 가능한 유일한 제도는 대통령 거부권밖에 없다는 주장까지 등장하고 있다. 거부권이 무소불위의 국회 권한에 대한 유일한 방어 무기인 셈이다.
가장 큰 걱정은 대통령과 민주당의 충돌이 내년 총선까지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과 시민단체 보조금 지원법 등 지지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법안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그러나, 특정 계층군과 특정 직업군의 이해득실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여 극심한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막대한 재정 투입은 아랑곳없이 득표 계산에만 골몰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결국 당 안팎의 토론과 비판을 모두 틀어막은 ‘입막음, 귀막음 입법’을 저지할 방법은 대통령 거부권 외에 마땅한 것도 없어 보인다. 아!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바로 국민의 심판이다. 거대 야당의 폭풍 질주에 제동을 거는 건 내년 총선 결과에 달렸다. 여당 표심 걷어내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야당의 총선 전략이 과연 뜻대로 성공할지, 외려 역풍을 맞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