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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이르러 무림은 거센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불신 풍조가 관습
인 양 만연해 있는가 하면 도처에서 살인 행각이 줄을 이어 갈수록 긴장과 공포를 더
해 갔다.
바야흐로 무림은 혈란(血亂)의 극을 치닫고 있었다.
사도무림을 대표하는 십방무림통사단과 정도무림의 태두인 천라대성부에서는 각기 영
을 발동한 지 오래로 대책 마련을 위해 내부적으로 연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뚜렷한 결말은 지어지지 않았고, 그들 양자는 좋든 싫든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정사(正邪)를 초월하여 가칭 십군대결사단(十軍大結社團)을 조직하고 힘을 하나로 모
으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거기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양자간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 보니 과연 십군대결사단을 누가 이끄는가를 놓고 그
들은 새로운 논쟁에 들어갔다.
이에 정사무림의 수뇌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논의를 거듭했으나 상황은 오히려 이전
보다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림 전역을 휩쓰는 혈풍은 그치기는커녕 일로 고조되어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일명 지옥의 척살자라 불리는 이백 명의 척살단(刺殺團)은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을 피
와 죽음의 수렁으로 몰고 갔다.
그들의 무차별 살인 행각은 당금 무림의 세력 판도를 뒤바꾸어 놓는 하나의 분기점이
라면 맞았다.
그들이 지나는 길에는 의례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봉문 내지는 폐파
하는 문파가 속출했다.
그들의 혈로(血路)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은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속수무책인 채로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전긍긍 몸을
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휘성(安徽省) 소호(巢湖).
그 곳에는 거대한 백색의 수상궁(水上宮)이 세워져 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궁은 소호가 품고 있는 섬들 가운데 가장 큰 분황도(分荒島)
에 위치하고 있었다.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섬 전체의 면적을 다 차지해 버려 멀리서 보면 궁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했다.
이름하여 천라무궁(天羅武宮).
그 백색의 수상궁은 천라대성부의 총단이었다.
다시 말해 사파무림의 십방무맥(十方武脈)과 더불어 정파무림의 절대 명문인 천라무맥
(天羅武脈)이 숨을 쉬는 곳이다.
당금 무림을 휘젓는 혈풍과는 아랑곳없이 천라무궁이 보여 주는 풍경은 실로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궁은 거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워 소호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소호의 수면도 지금은 잔잔하기만 했다.
때로 광풍폭우가 사정없이 몰아치면 포효하며 집채만한 파도를 형성해 내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금가루인 양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들을 이루어 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더없이 한가하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천라무궁의 내원(內院).
가히 천상별원을 연상케 할 만큼 화려하고 드넓다.
그 한가운데에는 소호의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인공호(人工湖)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손을 거쳤으면서도 자연적인 모습에 가까워 어떤 예술품보다 뛰어
난 걸작이랄 수 있었다.
감탄을 유발시키는 것은 비단 인공호만이 아니었다.
주위에는 이름 모를 기화요초들이 앞다투어 피어 있었으며, 이들도 제각기 자태를 뽐
내고 있었다. 따라서 내원은 온통 그윽한 향기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어느 선경(仙境)에 비한들 이렇듯 수려할 수 있을까? 그 곳은 한마디로 인세의 낙원이
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시원스레 탁 트인 인공호의 물결 위에는 한 척의 화선(花船)이 유유히 떠 있었다. 그
배 역시도 주변의 풍경과 제대로 조화를 이룰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화선의 갑판 위에서는 각기 승(僧)과 속(俗)으로 인생의 노선을 달리하고 있는 두 사
람이 대좌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미주가효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신분이 예사롭
지 않다는 뜻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두 사람 중 승려는 소림(少林)의 현 장문인인 보각대불(甫覺大佛
)이었다.
그는 금색 가사를 걸쳤으며, 수중에 선장과 비발을 들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척이
나 중후하고 자비로운 인상이었다.
또한 가슴 앞까지 백염(白髥)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그는 전체적으로는 위엄과 함께
당당한 기도를 느끼게 했다.
소림으로 말하자면 작금에도 천라무궁과 비견할 만한 정파의 양대무맥(兩大武脈) 중
일맥이다. 보각대불은 그러한 소림의 장문인다운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보각대불과 마주하고 있는 속인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어떻게도 정의하기 어
려운 위인이었다. 왜냐하면 너무도 비대하여 인상이며 기도를 논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아무리 살이 쪘다고 해도 분수가 있지, 그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고 있
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대쯤으로 보였는데, 그를 대하면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할 것
이다. 요즘에는 돼지도 그처럼 수명이 길어졌는가고.
몸에 걸친 화려한 금포는 차라리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눈이 살 속에 푹 파묻힌데다가 턱은 아예 목을 무시하고 가슴과 맞붙어 있었고, 팔다
리도 보통 사람의 서너 배는 족히 될 것 같으니 무얼 입어서 어울리겠는가 말이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그는 지금도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 앞에 놓인 음식들을 연신 입 속
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역겨움이 일도록 만드는 이 금포중년인은 대단히 유명한 인
물이었다. 당금 무림을 떨어 울리고 있는 천라무궁의 제칠대 궁주가 바로 그였다.
천무대제(天武大帝).
세칭 이런 별호로 통하는 그는 보기와는 달리 가공할 무학의 소유자였다. 그의 무위를
아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앞에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다.
그러나 막상 그의 실질적인 면모를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이것이야말
로 정녕 그의 무서운 점이었다.
더욱이 천무대제의 무공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자는 천하 무림을 통틀어도 전
무했다. 현재 그와 대좌하고 있는 보각대불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무대제는 여전히 입에서 음식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쩝! 그 북리뇌우란 자가 십방밀륜단(十方密輪團)에서 비밀리에 키워낸 인재라는 말은
나도 들었소. 음...... 단지 그를 찾기 위해 혈겁이 일어나고 전 무림이 초긴장 상태
에 들어갔었다니...... 정말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나마 음식을 우물
거리느라 말마저 중도에서 뚝뚝 끊기니 그는 걱정과는 도시 거리가 먼 사람 같았다.
반면에 보각대불은 침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혜안으로
천무대제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결단을 내려야 할 때요. 그 동안 갑론을박도 있을 만큼 있었으니 빈승은
궁주의 고견을 듣고 싶소."
"뭐, 고견이랄 것까지야......."
천무대제는 성의 없이 한마디 툭 던지고 나서 기름 묻은 젓가락을 입술로 쭉쭉 빨았다
. 그는 한참 후에야 작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천마유궁의 흑천대공(黑天大公)인가 뭔가 하는 작자는 중원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소.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그 따위 서찰을 보낼 수가 없지."
그는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들었다.
"이 소압육(燒鴨肉)은 맛이 아주 담백하오. 웬만하면 대불도 한 번 들어 보시지 그러
오?"
천무대제는 육식을 일체 삼가야 할 승려, 그것도 소림의 장문인에게 고기요리를 권하
는 실례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빈승은 되었소. 대제께서나 많이 드시오."
보각대불은 간단히 거절을 하기는 했으나 불쾌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상대의 언행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을 희롱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에.
하지만 그는 불문(佛門)의 고승답게 이내 마음을 비웠다. 천무대제가 어떤 식으로 나
오든 그로서는 우선적으로 무림의 대사(大事)에 비중을 두어야 했으며, 그 때문에 스
스로의 기분 따위는 문제 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각대불은 다시금 본론을 도출시켰다.
"그 서찰의 내용은 무시 하리까?"
천무대제는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대불의 견해는 어떠시오?"
보각대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미타불, 빈승의 생각은 그 반대외다. 불제자로서 할 말은 아니오만, 이 시점에서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사료되오."
"하면?"
천무대제의 음성은 추궁처럼 들렸고, 보각대불은 변명이라도 하듯 더듬거리며 응대했
다.
"물론...... 우리측이 힘을 기른 후에는 그 대가를 철저히 받아내야 할 것이오."
"대가?"
"이를테면 말이외다."
"호오! 대단하시오. 그것까지 계산해 두셨다니."
천무대제는 가뜩이나 작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들 두 사람의 대화는 하나의 사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며칠 전 이 천라무
궁과 소림에서 각각 한 장씩 서신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동일한 것으로 다음과 같았
다.
<천마유궁은 중원무림의 대표자들에게 고한다.
십전무판자(十全武判子) 북리뇌우를 넘겨 주면 즉시 중원에서 물러 나겠다. 그 자
를 죽여 시체를 보내도 무방하다. 그러나 거절한다면 각 오해야 한다. 전 중원 무림
인이 본궁에 의해 도륙 당할 것이다.
천마유궁 흑천대공 서(書)>
결과적으로 그 서신으로 인해 혈풍의 배후가 밝혀지기는 했으나 대신 북리뇌우는 정파
무림과 천마유궁이 벌이려고 하는 암거래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만 셈이었다.
천무대제는 담백한 맛이 난다는 소압육을 자신의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천라대성부와 소림은...... 지금껏 혈맹(血盟)의 관계를 유지해 왔소. 그러니 본 궁
주가 어찌...... 대불의 의견에 반발하여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킬 수 있겠소이까
?"
또 다시 중도에서 끊기곤 하는 그 말을 들으며 보각대불은 기어이 청수한 안면을 일그
러뜨렸다.
'아미타불, 궁주는 실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구려. 하긴 처음부터 그 탁월한 말
재간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오.'
그는 내심 쓰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천무대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에는 수증기로 쪄서 말린 후 기름에
튀긴 제육소연자(猪肉燒燕子)를 입에 넣었다. 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금번 일은...... 모두 대불께 일임하겠소. 알아서 다 하시니 난 뭐...... 따로 내놓
을 의견도 없구려."
뻔한 속셈이 엿보이는 그 말에도 보각대불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여야 했다
"알겠소이다. 부디 협조를 부탁드리오."
"물론이오. 쩝!"
"아미타불, 그럼 빈승은 이만 들어가 보겠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체신을 잃지 않기 위해 천무대제에게 합장배례한 뒤 객실로 마련
된 선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천무대제는 먹는 일을 중단했다. 기름기 도는 입술도
굳게 잠겨 버렸다.
동시에 처음으로 기도를 드러냈는데, 그것은 타인으로 하여금 절로 숨막히는 공포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기도였다.
바야흐로 천무대제의 모습은 먹는 일에 전 생애를 내건 듯한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
라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그는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북리뇌우, 그가 십전무판자였단 말이지?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었군."
다소 냉혹하게 들리는 그 음성으로 인해 잔잔하기만 하던 주위의 공기는 금세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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