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 4장 1-16)
성경본문: 창세기 4: 1-16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
창세기는 여러 가지 ‘최초들’에 관한 책입니다. 창세기 1장은 ‘최초의 우주와 생명체’에 대해 말하고, 2장은 ‘최초의 가정’에 대해 말하고, 3장은 ‘최초의 인간의 범죄’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창세기 4장은 ‘최초의 살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인 모세는 첫 살인 사건을 기록하기까지 불과 4장 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문을 몇 장 넘기기 전에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접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비극이 얼마나 우리들과 가까이 있는지요?
또한 창세기는 여러 대표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고, 하와는 여자를 대표하고, 뱀은 악의 존재를 대표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과 아벨도 단순히 아담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불신앙적인 사람과 신앙적인 사람, 인간 중심적인 사람과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직업적으로 보아도, 농사를 짓는 사람과 목축업을 하는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에덴 동산에서는 추방당했지만, 그 가정에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인해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정에 가장 기쁜 일은 역시 아이가 태어나고, 식구나 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태어났을 때, 아담보다 하와가 더 감격하고 기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이 말 속에는 하와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오해도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자손’에 관해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자손은 먼 훗날 인류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가인을 낳고, 그가 사탄을 물리칠 ‘여자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창3: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가인은 자라면서,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우인 아벨은 형과 달리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니, 양을 치든, 농사를 짓든 다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 중에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창4:3-5절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 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 빛이 달라졌다.”
여기서 ‘세월이 지난 뒤에’라는 말은 어느 시점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제사 제도에 대해 가르치셨을 것이란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제사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아무 것이나 드리라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셨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전통적인 해석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통적이며 복음적인 해석은, 아벨은 피가 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요, 가인은 피가 없는 곡식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물론 여기서 피 있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 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히9:22)
만약에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해 명하실 때, 오직 피가 있는 짐승 중에서 구별해서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이 해석이 가장 은혜롭고 적합한 해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에 대해 언급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히11:4절입니다.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차이를 믿음의 유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와 믿음 없이 드린 제사의 차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제물의 차이가 아닌,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곡식 중에서 첫 곡식을 드리지 않았고, 아무 것이나 가져다가 드렸을 것입니다.
여러 새끼들 중에서 첫 새끼를 구별해서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길러야 합니다.
‘처음 것’의 의미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요, 의미 있는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것은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첫 새끼로 제사를 드린 것은 그의 전부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 행위를 통해 아벨은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요, 예배 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교인 중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먼저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일을 먼저 하고 하나님의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인은 나중에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불만이 생겼고, 동생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혔지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아벨처럼 하나님 중심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로, 차이점은 단지 제물의 차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벨은 평소에 믿음으로 살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지만, 가인은 ‘삶 따로, 제사 따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즉 제물의 차이라기 보다 사람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아벨이 바친 제물이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이 바친 제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 즉 예배를 드리는 것 못지 않게, 평상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배와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예배를 기쁘게 받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 끔직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분석해 보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가인의 동생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 분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즉 마음 속에서부터 살인이 시작된 것입니다. 행동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8-20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의 시기와 분노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얼굴빛을 달라지게 하고, 더 나아가 입으로 속이고 손으로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이런 죄의 속성을 아셨던 하나님은 사건이 있기 전에 가인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창4:6-7절을 보세요.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이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마음에 시기가 있고, 분노가 있고, 욕심이 있고, 불만이 있는 사람에겐 죄가 아주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더 죄에 잡혀 먹을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조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죄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죄의 관계는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죄를 지배하는 승리자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6:12-1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한번 죄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면 습관성이 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죄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처음부터 물리치고 멀리해야지, 죄의 유혹에 넘어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에 문을 열어 주지 말아야지, 한 번 열면 들어와서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 속에 이미 죄가 들어와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불행하게도 그의 문 앞에 도사리고 있던 죄에 먹혀, 끔직한 살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생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이 범하는 죄를 아무도 모르겠습니까? 완전 범죄는 없습니다.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숨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가인은 시치미를 뗐습니다.
우리는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생이면 사랑으로 돌봐주고, 가장 친밀하고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사이인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오늘 날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민족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동족끼리 끔찍한 전쟁도 치르고, 수십 년 동안 원수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를 죽인 원인 중에 하나는 가인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시기와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중에 하나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든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할 때 인간은 분노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의 감정을 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분명히 죄가 됩니다.
에베소서4: 26-27절,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왜 사람들이 자주 화를 내고,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 첫째 원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오해를 잘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가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서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소리를 내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흔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들고 흔들고, 두려울 때 짖습니다.
☞ 둘째 원인은 피해의식과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어떤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부분을 누가 건드리면, 자기 방어 차원에서 공격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자주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이 약하고, 성장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로 상한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문제 해결 방법은 크게 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해결 방법과 장기적인 해결 방법입니다.
♣ 단기적인 해결 방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일단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로, 왜 자주 화를 내는지 분석해 보고, 동일한 상황이 생겼을 때,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를 낼 상황에서 일단 참아야 하는데, 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과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참아 낼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방법 보다
♣ 장기적인 방법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나는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화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이 문제를 가지고 심사 숙고해야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부정적인 관점이 아닌,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관점이 믿음의 관점입니다.
어떤 어머니에게 초등학생인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이는 수학을 참 잘했습니다.
수학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바이올린을 잘 켰습니다.
그래서 음악 경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 성적이 나오는 날이면, 큰 아들은 기분이 좋았는데, 둘째는 시무룩해져 있습니다.
반면에 음악 경연 대회에서는 반대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기분이 좋았습니다.
수학 경시대회가 있으면 큰 아들 때문에 좋았고, 음악 경연대회가 있는 날에는 작은 아들 때문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이 이야기에 아들과 어머니의 차이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머니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았고,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 관점에서만 보았고, 그래서 부정적인 면이 드러나면서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 대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게 되는가?
전체적인 관점,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장기적인 해결 방법은, 건전한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각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걸작품들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수학은 못해도 노래를 잘하면 되는 것이고, 노래를 못해도 다른 것을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못해도, 존재 자체로만 소중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그치고, 온유하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께서 온유한 성품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은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마음 속의 시기와 질투, 분노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오늘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한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숨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은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들을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기도 했습니다.
4장에서는, 동생 아벨을 죽이고,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는 가인조차도 하나님은 완전히 버리시지 않고, 찾아 오셨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피를 흘린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호소했을 때, 가인을 죽인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 하셨고, 또한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창4:14-15)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인 같은 놈은 사형을 시켜야지, 왜 보호해 주시는 지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형제에게 바보라고 해도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서 3:15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자기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인과 같은 일종의 살인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미워하고 고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한 빌라도를 비난하지만, 우리들도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미워한 가인과 같은 죄인이고,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사람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가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독버섯처럼 자라는 인간의 죄악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무서운 속도로 타락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무서운 죄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 가지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
첫째, 아벨의 제사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 첫 새끼를 구별해서 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분노를 그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시기심과 질투심, 미음이 자라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가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역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인자 가인에게 벌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또 다른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가인과 같이 추악하고, 가룟 유다같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빌라도 같이 무책임한 우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까지도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무서운 인간의 죄악을 보면서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벨처럼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 가인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아벨이 사는 삶, 즉 그리스도가 사는 새 삶을 결단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벨처럼, 믿음으로 더 나은 예배를 드리시고,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