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양의 중앙부.
가장 번화하고 인파도 가장 붐비는 그 곳에서는 지금 상시(商市)가 열리고 있었다.
노을은 더욱 짙어져 절정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어스름한
저녁의 기운이 밀려들리라.
번화가의 한쪽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공지(空地)가 보였다. 혼잡한 가운데서도 그 곳
만은 유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연유를 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땅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는 장
소였던 것이다.
볼일이 있는 듯 공지를 향해 다가가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가운데는 비워 놓은 채 가장
자리에 빙 둘러서고 있었다.
노비들을 실은 옥거들만이 곧장 공지 내로 들어갔다. 이르자면 그 곳은 팔려 나갈 노
비들의 전시장이랄 수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청의장한들은 도착하자마자 옥거를 열고 노비들을 끌어냈다. 우락
부락한 장한들의 손에는 어느덧 말고삐를 대신하여 가죽으로 된 채찍이 쥐어져 있었다
ㅊ! 촤아악―!
채찍은 무섭게 허공을 가르며 노비들에게로 떨어졌다.
"뭣들 하느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노비들은 기력이 쇠진해 있는 데다가 족쇄로 양 손이 묶여 있었다. 그 족쇄는 긴 쇠사
슬로 일일이 연결이 되어 있어 그들이 대열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장한들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노비들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혹시라도 이탈자가 생길까 하여 눈에 불을 켠 채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들 말고 타 지역에서 온 옥거들도 속속 당도했는데, 사정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노비들도 비참한 몰골로 채찍에 얻어맞으며 개처럼 끌려 나오고 있었다.
전 노비들에게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슴 앞에 표식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구분을
위한 번호와 팔려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알아보기 좋게 적혀 있었다.
노비를 사러 온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관찰을 했다. 가능한 한 저
렴한 가격에 실한 물건(?)을 구하려는 계산이 그들의 눈 속에서 쉴새없이 빛나고 있었
다.
북리뇌우와 소악은 한 옆에서 다소 거리를 둔 채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팔리지 않은 노비는 어떻게 되느냐?"
북리뇌우가 묻자 소악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십중팔구는 굶주림 끝에 죽고 말지요. 가치가 없는 자에겐 음식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요."
"음......."
북리뇌우는 나직이 침음성을 발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소악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굳
은 어조로 물었다.
"언제까지 이 곳에 계실 작정입니까?"
"왜, 더 있기 싫으냐?"
"솔직히 그래요."
"녀석, 마음이 아픈 게로구나?"
소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나타난 기색만으로도 북리뇌우는 충분히
고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도 즐겁지만은 않다."
북리뇌우는 그 말에 덧붙여 불쑥 물었다.
"너는 혹시 예감이란 것을 믿느냐?"
소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예감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좋지요. 재수가 더러워
영락없이 실패를 하게 되니까요."
"후후, 경험이 있나 보구나?"
소악은 씩 웃었다.
"그건 소매치기들에게는 철칙이나 다름없어요."
북리뇌우는 마주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아까 늙은 노비 한 명과 눈이 마주쳤었다. 그 눈빛이 이상스레 나를 놓아 주지 않
는구나."
"그를 사시게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소악이 그를 빤히 보며 되물었다.
"그러면서 예까지 따라 오셨단 말씀입니까?"
"내 맘이다."
"어이구!"
그는 가벼운 논조로 말하고 있었으나 내심은 달랐다.
사실 북리뇌우도 노인과 눈길이 마주쳤던 그 순간에는 정작 동정심 외에 아무런 감정
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다시 떠올린 노인의 눈빛은 판이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충격적인 그
기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하나의 강한 예감으로 화해 갔던 것이다.
'대체 무엇인가? 나를 무섭게 이끄는 이 느낌은.'
말하자면 북리뇌우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예감을 쫓아 여기로 오기는 했으되 그 불가사의가 스스로 실체를 드러내기를 기
대하며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흥미롭지도 않은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유였다. 소악에게
도 말하고 싶지 않은.
소악이 투덜거렸다.
"형님은 가끔 너무 감상적이십니다. 답지 않게스리."
북리뇌우는 빙그레 웃었다.
"나다운 건 무엇이냐?"
"그야........"
소악은 선뜻 말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북리뇌우가 짐짓 정색을 지으며 스스로의 질문
에 답을 내놓았다.
"인간의 기질이란 누구고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법이다. 이를테면 검을 들면 악마로
돌변하는 것도 나이고, 이처럼 너와 말장난이나 하며 키득거리는 것도 나다. 결국 인
간이 상황을 만들기도 하나 반대로 상황이 인간을 만들기도 하니 감상적이 되었다 해
서 나답지 않은 건 아니지."
소악은 멍한 표정이 되어 그를 응시했다.
"형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무엇이냐?"
"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주시면 안될까요?"
"후후, 녀석! 바보 흉내야말로 너답지 않구나."
"크크크......."
이윽고 황혼이 지고 야천(夜天)에는 휘영청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동안 석인시는
절정을 이루었다.
매매는 속속 이루어졌고, 그들이 빚어 내는 소음은 공지는 물론 근역으로 멀리까지 번
져 나가고 있었다.
와중에서 유독 청각을 괴롭히는 음향이 들려왔다.
철커덩, 철컹......!
그것은 이제까지 노비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는 본질적으로 틀
렸다.
곧이어 일단의 행렬이 공지 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무리의 노
비들이었다.
그들은 손이 아니라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사슬로 이어진 커다란
쇳덩이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숫자는 십여 명으로 그들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힘겨운 듯 발을 질질 끌며 걸어오
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옥거를 타고 온 자들은 호강을 누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다섯 명의 청의장한들이 따라오며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 십여 명의 노비들은 몰골도 더욱 처참했다.
먼길을 걸어온 듯 전신이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족쇄가 채워진 맨발
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배어 나와 지면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철커덩...... 철컹......!
그들이 피의 족인(足印)을 찍을 때마다 쇳덩이도 따라 움직이며 듣기 거북한 음향을
내고 있었다.
그 광경에는 노비를 사고 파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소악은 아예 그들로부터 외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리뇌우는 눈에 기광을 떠올린 채 그들 십여 명의 노비들을 차례로 유심히 바
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이 들어서자 먼저 당도해 있었던 다른 노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양 옆으
로 좌악 갈라져 섰다.
그것을 본 장한들의 얼굴에는 거만한 웃음기가 어렸다.
그들 중 한 명이 어깨를 한차례 으쓱하더니 사뭇 당당한 음성으로 외쳤다.
"우리는 본래 최상품만 취급하오. 맨발로 천 리를 걷고도 멀쩡한 노비는 이 놈들 외에
없을 것이오."
그 말에 중인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맨발에, 그것도 쇳덩이를 매
달고 천 리를 걸어 왔을 정도라면 최소한 근력은 믿어도 될 터이므로.
반면에 야유를 보내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꼭 그렇게까지 하여 품질의 우수성을 입
증해야만 했느냐고.
청의장한은 중인들의 반응이 어떻건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이 중에는 다리 하나로만 걸어온 놈도 있소."
그는 행렬 가운데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과연 그 노비는 한쪽 다리가 허벅지에서부터 절단되고 없었다. 나이는 이십 세 남짓,
키는 훌쩍 컸으나 일견하기에도 병약해 보였으며 전신이 대나무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그 자는 어떻게 천 리를 걸어왔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런 상태라면 단 한 걸음만 내디뎌도 푹 고꾸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북리뇌우의 시선은 그 독각(獨脚)의 청년노비를 발견하고부터 그에게서 잠시도 떨어지
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북리뇌우는 그 눈에서 지독한 오기와 아집, 무서운
투혼(鬪魂) 등을 읽어 냈다.
'저 눈빛은 여타의 노비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결코 아무에게나 굴종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청의장한이 외쳤다.
"내 여러분들께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 드리겠소."
그는 입가에 잔혹한 웃음을 머금더니 손을 뻗어 독각청년의 앞섶을 거칠게 뜯어냈다.
부욱......!
"억!"
중인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독각청년의 가슴에는 주먹
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아마도 어떤 무기가 쑤셔 박힌 자리인 듯했는데,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는 그 상흔은
목불인견이었다.
"우우우......!"
중인들도 그 모습에는 충격을 받고 눈을 질끈 감아 버리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장한의 음성은 기세 좋게 장내를 울렸다.
"여러분들께서 필히 아셔야 할 점은 이러고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오.
다른 놈들도 이 수준은 되오. 어떻소? 이 정도면 품질은 보증된 셈이 아니오?"
그 말에 소악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우우, 잔인한 작자 같으니, 저 놈은 인간도 아니야."
그는 청의장한의 비정한 상혼(商魂)에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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