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후유증’ 앓는 美대도시… 직장인 떠난 도심에 마약-노숙자
14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도심 최대 관광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주변 한 골목에서 노숙자와 약물에 취한 듯한 사람들이 길바닥에 앉아 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남성이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애틀=김현수 특파원
《1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다운타운 3번가. 시애틀 최대 관광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5분 거리지만 인적이 드물다. 문을 닫은 메이시 백화점, 스프레이 낙서로 얼룩진 여행용 가방 가게의 통유리창은 대낮에도 을씨년스럽다. 마약에 취해 허리를 구부정하게 선 채 꼼짝도 않는 사람들과 노숙자들을 보고 관광객들이 겁에 질린 듯 뛰어간다. 한 노숙자가 기자를 향해 인종차별적 욕을 퍼붓는다. 파인가와 파이크가가 교차하는 3번가에 있는 맥도널드에 대한 온라인 리뷰는 온통 ‘웬만하면 가지 말라’ ‘테이크아웃도 하기 싫다’ 등이다.
시애틀에서 나고 자랐다는 대학생 클레어 씨는 “얼마 전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올스타전이 열려 시에서 대대적으로 정비해 그나마 나아졌다. 저녁에 다운타운은 피하라고 말하고 싶다”며 “팬데믹 기간 위험한 일이 너무 많아졌다”고 말했다.》
3번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범죄가 잦았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경찰도 손을 뗀 무법천지로 변했다고 지역 주민들은 전했다. 팬데믹으로 상점은 문을 닫고 직장인과 관광객이 떠나자 거리는 마약 거래상과 노숙자가 장악했다. 시에서 ‘3번가 프로젝트’를 만들어 경찰 배치를 늘리고 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도심 무서워 재택근무”
3번가 맥도날드에서 7분 정도 북쪽으로 걸으면 한 달 전 임신 8개월이던 한인 여성이 괴한의 ‘묻지 마 총격’을 받고 숨진 교차로가 나온다. 인근에 웨스틴 호텔과 아마존 스피어(아마존 본사 돔 형태 정원)가 있는 다운타운 핵심이다.
평소 안전하던 거리가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시애틀뿐 아니라 미국 주요 도시의 대표적인 팬데믹 후유증이다. 재택근무가 급증해 평일 유동인구가 줄어든 도심에서 마약 등에 기인한 강력 범죄가 늘면 사람들 발길은 더 줄고, 범죄는 더 기승을 부린다. 도심의 ‘파멸적 악순환(doom loop)’이다. 시애틀 택시 운전사 티머시 씨는 “정치인들이 손을 놓아 버렸다. 팬데믹 이후 도시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무분별하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최근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뉴욕, 필라델피아, 시애틀, 시카고 등 4개 대도시 도심 범죄에 관해 연구한 결과 상당수 직장인들은 도심 출근이 무서워 재택근무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집이 편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외출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한 필라델피아 거주자는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거리를 걷는 것이 두렵다”며 “사무실 복귀 첫날 한 여성은 출근길에 회사 건너편에서 모르는 사람의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고 전했다. 시애틀 응답자도 “공공장소에서 경험한 안전 우려, 약물 중독, 정신 건강 위험이 사무실 복귀를 꺼리게 만든다”고 답했다.
미국에서 범죄율은 테네시나 앨러배마 같은 중부 지역에서 가장 높기는 하다. 통계 전문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1년 인구 10만 명당 폭력 범죄가 가장 많은 지역은 앨러배마 모빌이었고 2위가 테네시 멤피스였다. 10위 안에 뉴욕,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는 없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평소 안전하다고 믿는 곳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공포감이 더 커진다”고 분석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안전하게’
유동인구 감소로 대중교통에서 발생하는 범죄가 늘어난 점도 도심 기피 현상을 악화시킨다. 주로 지하철로 출퇴근한다는 뉴욕시 40대 직장인은 “오후 9시경 승강장 구석에 서 있는데 어떤 남성이 발차기를 하며 달려왔다. 장난인 줄 알고 웃던 사람들이 그가 점점 가까이 오자 혼비백산해 도망갔다”고 말했다. 뉴욕 지하철 이용객은 팬데믹 이전의 65% 정도다.
뉴욕, 시애틀 같은 대도시는 사람들이 도심으로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대중교통 치안 정비에 나섰다. 뉴욕시는 지하철 역사(驛舍)뿐 아니라 객차에도 경찰을 배치하고 있다. 범죄 억제와 시민들 불안감 진정을 위해서다.
문제는 돈이다. 사람이 사라진 도시는 재정도 악화된다. 상점이 폐업하고 오피스 빌딩이 텅 비어 부동산 값이 폭락하면 세수(稅收)도 줄어든다. 뉴욕시 세수에서 재산세 비중은 30% 수준이고 이 중 상업용 부동산이 40%를 차지한다.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올 초 공립 도서관 예산을 3620만 달러(약 463억 원) 삭감해 부족한 세수를 채우려다 비판을 받았다. 결국 교도소 예산을 삭감하고 도서관은 살렸지만 시 재정 위기는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또 뉴욕은 맨해튼 미드타운 진입 차량에 ‘혼잡 통행료’를 내년 도입할 예정이다. 탄소 배출 감축과 도심 교통 혼잡 억제 명분으로 연간 10억 달러(약 1조3067억 원) 징수가 가능하다. 이 돈으로 지하철, 버스, 기차, 페리 같은 대중교통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세수는 여전히 부족해 뉴욕은 다음 달부터 8년 만에 지하철 요금을 2.75달러에서 2.9달러로 올리고 혼잡 통행료도 6∼10% 인상하기로 했다.
세금 감소→‘도심 종말’ 우려
대도시 시장들은 명운을 걸고 도심 활기 회복에 힘 쓰지만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 스탠퍼드대와 미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미 정규직 25%는 재택근무를 한다. 2021년 33%에 비해 줄었지만 재택근무가 그만큼 보편화했다는 의미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뉴욕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26개만큼, 로스앤젤레스는 랜드마크인 US뱅크타워 30.7개만큼 사무실이 남아돈다.
뉴욕은 그나마 관광객이 펜데믹 이전의 90% 이상 회복돼 도심 유동인구가 늘고 있다. 금융업 중심인 뉴욕은 JP모건, 골드만삭스 같은 특급 은행이 직원들의 사무실 근무를 강력히 요구해 최근 미드타운이나 월가에서는 정장 입은 직장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재택근무 비율이 높은 테크(정보기술) 산업 중심 샌프란시스코는 사무실 근무 회복세가 더뎌 파멸적 악순환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국내 금융업 관계자는 “사무용 빌딩이 반값도 아니고 4분의 1 가격으로 나와 있더라”고 전했다.
테크 산업 중심이고 출퇴근 때 자동차 의존도가 높으며 기후도 온난한 서부 지역 도심이 팬데믹 이후 노숙자와 마약 거래에 더욱 취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팬데믹 전과 비교해 주택 가격이 급등한 대도시 도심도 노숙자 급증이라는 부작용을 앓고 있다.
도시 계획 전문가들은 재택근무라는 ‘뉴 노멀’에 맞는 장기적인 도시 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뉴욕대와 컬럼비아대 연구팀 논문 ‘재택근무와 오피스 부동산 아포칼립스(종말)’에 따르면 재택근무와 사무실 공실(空室) 사태가 계속된다면 상업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2029년까지 뉴욕시 세수 6.5%가 줄어든다. 이 논문은 결국 도심 생활 기반이 무너지는 ‘아포칼립스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핏 굽타 뉴욕대 교수는 “재택근무 추세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면 지방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 사무공간을 줄이고 주택을 늘리는 도심 재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애틀에서
김현수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