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프랜차이즈·호텔 "파리 현지의 맛 보여주마"… 빵맛 차별화 나서
요즘 강남의 뜬다는 빵집 가면…매장 입구에 큼직한 포대가 차곡차곡
알고보니 에펠탑 문양 찍힌 밀가루 포대'파리바게뜨' SPC그룹은 원맥 수입도
커지는 빵 시장, 고객들 눈높이 올라가 밥 대신 빵을 주식 삼는 젊은층 늘어나 다이어트 붐에 '건강 빵' 바게트 많이 팔려
佛 밀가루 써야 현지 맛?… 업체마다 갈려 "美·캐나다産으로 만든 바게트는 질겨…프랑스 밀 써야 오리지날 맛·풍미 재현""굳이 프랑스産 안 써도 같은 맛 낸다…밀가루보다 공정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
요즘 강남의 뜬다는 빵집에 가면 쌀자루처럼 생긴 낯선 포대가 손님을 맞는다. 강남구 신사동의 빵집 '르알래스카', 서초구 방배동의 '리블랑제'와 반포동'곤트란쉐리에'는 입구에 큼직한 포대를 가지런히 세워놓거나 차곡차곡 쌓아놨다. 자세히 보면 프랑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문양이 찍혀 있다. 빵집이 수입해 쓰는 프랑스산 밀가루를 진열해 둔 것이다.
'정통 프랑스 베이커리' '파리 현지의 맛'을 표방하며 밀가루를 프랑스에서 수입해 쓰는 제과점이 늘고 있다. 빵집들은 차별화된 재료를 썼다는 증표로 밀가루 포대를 눈에 띄게 놓아둔다. 동네 빵집만이 아니다. 대형 프랜차이즈인 파리바게뜨의 모기업 SPC그룹은 지난 5월부터 원맥을 프랑스에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제분된 밀가루가 아닌 밀을 수입하는 것은 국내 제빵업계에선 처음이다. SPC 측은 "한국에서도 갓 빻은 프랑스 밀가루로 만든 '원조 바게트'를 맛볼 수 있게 됐다"고 홍보한다. 수입한 프랑스 밀은 자체 제분 공장인 밀다원에서 제분해 이르면 오는 10월부터 프랑스 밀가루로 만든 빵을 국내외 170개 파리바게뜨 매장에 공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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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제빵업계에서 앞다퉈 수입하는 프랑스 밀가루로 만든 빵들. 호텔·프랜차이즈·동네 빵집에서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검은 바게트, 크루아상, 감자가 들어간 치즈빵, 소시지빵 등 다양한 종류를 내놓고 있다. /이명원 기자
호텔도 가세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은 지난 5월 호텔 내 빵집인 '실란트로 델리' 재개장을 앞두고 프랑스 제빵 컨설턴트인 듀캠프 데이비드에게 자문을 구했다. 힐튼호텔 측은 "요즘 베이커리 추세에 따라 프랑스 현지의 건강 빵 맛을 재현할 최적의 기술을 전수받았다"며 "풍미를 더하기 위해 일부 제품에 프랑스 밀가루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밀가루 뭐가 다르기에프랑스 밀가루를 쓰면 프랑스 현지 맛을 내기에 더 적합한 것일까. 주관적 판단이 크게 좌우하는 맛의 세계이다 보니 업체에 따라 주장이 다르다.
프랑스 제빵 장인의 이름을 건 제과점의 효시로는 '에릭 케제르'가 있다. 2010년 7월 개업 당시 한국을 찾았던 에릭 케제르는 "프랑스 파리 매장에서 빵을 사 든 고객과 서울 매장에서 산 고객에게 똑같은 빵 맛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파리 매장과 동일한 맛'을 보여주겠다는 에릭 케제르에서는 프랑스 밀가루를 쓰지 않는다. 미국산과 캐나다산을 쓴다. 에릭 케제르의 제빵사 김남주씨는 "굳이 프랑스 밀가루를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다.
자체 브랜드 중 파리크라상 바게트에는 프랑스 밀가루를, 파리바게뜨 바게트에는 미국·캐나다산 밀가루를 쓰는 SPC그룹 측은 "프랑스 밀이 아닌 다른 밀가루로 만들면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프랑스 현지의 오리지널 바게트 맛을 재현하기는 어렵다"며 "미국이나 캐나다산 강력분으로 바게트를 만들면 질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전 제품을 프랑스 밀가루로 만드는 곤트란쉐리에 측은 "다른 밀가루는 풍미와 맛에서 프랑스산을 따라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국내산 밀가루를 빵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쓴다.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의 이종현 베이커리 셰프는 "프랑스 밀가루는 회분 함량이 높아 껍질이 파삭하고 거친 유럽 빵에 잘 어울리고, 독일산 호밀가루는 진하고 깊은 풍미를 가져 베이글이나 샌드위치에 쓰고, 일반 빵류에는 미국·캐나다산을 쓴다"고 말했다. JW메리어트 동대문스퀘어서울의 총주방장 스테파노 디 살보는 "빵에 따라 다른 응집력과 밀도를 얻도록 10여 가지를 배합해서 조리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빵에는 프랑스 밀가루, 과일 빵에는 독일 밀가루, 피자에는 이탈리아 밀가루, 기타 제품에는 미국산과 국내산을 쓴다. 박효남 힐튼호텔 총주방장은 "프랑스 밀가루는 국내산보다 수분 함유량이 적어 발효를 24시간 정도 해야 하는 대신 바삭바삭한 빵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밀가루가 아니라 공정이 맛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광진구 자양동에서 프랑스 빵 전문점으로 유명해져 최근 신세계백화점 에 입점한 '라몽떼'의 장은철 셰프는 "빵을 만드는 공정에서 맛의 차이가 훨씬 크게 날 수 있다"며 "발효종 종류, 발효 방법, 굽는 과정 등 모든 환경 조건이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국내산을 살려야 국내 제빵 산업이 산다는 철학으로 국산 밀가루만 쓰는 마포구 합정동 '오븐과주전자'의 허민수 셰프는 "프랑스산을 쓰면 프랑스 맛을 내는 데 더 용이한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수입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신선도를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 대형 제분 회사의 연합 단체인 한국제분협회 측은 "미국이나 캐나다산은 길어야 보름 정도면 들어오는데, 프랑스산은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한 달 이상 걸린다"며 "7~8년 전 곡물값이 폭등했을 때 수입을 검토하다 운송비가 과다하다는 판단에 수입을 포기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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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빵집 ‘르알래스카’ 입구에 프랑스 수입 밀가루 포대들이 쌓여 있다. /신정선 기자
◇늘어나는 빵순이·빵돌이… 눈높이 맞추려 현지 재료로 승부
프랑스 밀가루의 급부상은 갈수록 진화하는 제빵업계의 최신 흐름을 보여준다. 밥 대신 빵을 주식으로 먹는 '빵순이'와 '빵돌이'들이 늘면서 까다로워진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는 빵집들이 던진 승부수다.
통계청이 발표한 양곡 소비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1인당 쌀 소비량은 67.2㎏으로 전년(69.8㎏)보다 3.7%(2.6㎏) 감소했다. 사상 최저 수준이다. 소비량이 최고였던 1970년(136.4㎏)과 비교하면 절반이 안 된다. 이 자리를 파고든 것이 밀이다. 밀가루 소비량은 최근 4~5년 사이 꾸준히 느는 추세다
〈그래픽 참조〉.밀 중에서도 빵이 인기를 주도한다. 한때 한국인에게 빵은 끼니가 아니라 간식이었다. 주로 달고 작은 빵을 내놓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빵 시장이 커지면서 달고 작은 빵은 디저트 시장으로 분화해나갔다. 빵 중에서도 건강 빵이 다이어트 열풍을 타고 수요가 늘고, 건강 빵 중에서도 바게트가 많이 팔리고, 바게트 중에서도 '프랑스 본토의 맛'을 찾는 사람이 많다. SPC그룹의 원맥 수입은 이 같은 수요를 겨냥한 장기적인 포석이다. 완제품 밀가루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밀을 제분하는 기술을 갖춰 자체 기술력으로 차별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밀가루의 97%는 국내에서 가공한 수입 밀가루다. 국산 밀은 0.8%, 원산지에서 완제품으로 수입한 밀가루가 1.4% 안팎이다. 1983년까지는 전량 미국에서 수입하다가 최근에는 미국에서 50%, 호주에서 45%, 캐나다에서 5%가량씩 수입한다. 일부 수입업자가 들여오는 프랑스 밀가루는 아직은 통계에 반영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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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밀가루는 강력분(빵), 중력분(국수) 박력분(과자, 케이크)으로 나뉜다. 단백질 함량이 기준이다. 강력분은 단백질 함량 13% 이상, 중력분은 10~13%, 박력분은 8%이하다. 프랑스 밀은 단백질 함량이 10.5~11% 정도. 대신 회분 함량이 높다. 종류 구분도 회분 함량에 따른다. 봉투를 보면 영어 대문자 T자 뒤에 숫자가 적혀 있다. T는 Type(유형)을 뜻한다. 뒤에 붙은 숫자인 45, 55, 65, 80, 110,150가 회분 함량을 표시한 것이다. 45는 건조된 밀가루에서 추출된 회분이 0.50% 이하, 55는 0.50~0.60%, 65는 0.60~0.75%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이 에펠탑 그림이 그려진 '물랑 드 파리' 제품인 T55다.
시판되는 강력분 밀가루 1㎏은 1800원 안팎이나 프랑스산은 ㎏당 2700원 정도로 다소 비싸다. 빵 값은 대중적인 파리바게뜨의 바게트가 점포별로 2000원 내외, 반포동 곤트란쉐리에의 바게트(오징어 먹물, 카레 등)는 개당 4500원이다.
스튜어트 리 앨런이 쓴 '악마의 정원에서: 죄악과 매혹으로 가득 찬 금기 음식의 역사'에는 감춰놓은 흰 바게트 빵이 들통나 경찰서로 연행되는 파리 구두 수선공의 일화가 나온다. 1775년이었다. 도끼로나 자를 수 있던 돌멩이 수준의 빵을 먹던 프랑스 평민이 귀족과 동일하게 희고 부드러운 빵을 먹을 권리를 갖게 된 것은 불과 200년 전이다. 프랑스에선 빵의 역사가 오랫동안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요즘 한국 빵들은 재료 전쟁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