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양에서 산동(山東)으로 통하는 관도, 그 중간쯤에 면해 있는 이름 모를 야산(野山)
이다.
시각이 시각인지라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이따금 들려오는 밤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아니라면 산중의 밤은 죽음 그 자체로 여겨지
리라. 적요 속에 시계(視界)가 차단되어 있은 즉 과연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숲 속은 풍경만이 살아 있었다.
타닥...... 타닥......!
부분적으로나마 밤을 밝히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리뇌우의 소악, 그리고 석인시에서 인매상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들
인 독각청년이었다.
모닥불 옆에는 간단한 주육과 소채도 마련되어 있었다.
북리뇌우와 독각청년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악은 마차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
었다.
북리뇌우가 야천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도 어지간히 힘겨운 생을 이어왔군."
"힘겨운?"
독각청년은 반문하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크크,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 사실 내가 영위해 온 삶은 죽음보다 못
한 것이었소."
"인정한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기도 하지."
"맞소. 난 이대로는 도저히 죽을 수가 없소."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들 사이에는
이미 많은 대화가 오간 듯했다.
모닥불의 불빛이 굳어져 있는 독각청년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안
색이 창백하고 야위기는 했으나 자세히 보니 놀라울 만큼 이목구비가 수려한 인물이었
다.
화르르륵― 타다닥!
그는 북리뇌우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한다는 얘기는 아니오.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 줄 생각이니까."
"그 말은 확신에 가깝게 들리는군."
"아직은 아니지만 때가 이르면 필히 그리 될 게요."
"으음!"
북리뇌우의 착 가라앉은 눈빛이 조용히 독각청년에게 머물렀다. 반면에 청년의 눈에서
는 살광이 이글거렸다.
"나는 세상에 나를 나게 한 하늘을 용서하지 못하오. 그 하늘이 안배해 놓았던 적수(
敵手)들도."
"혐천(嫌天)이라는 이름도 그대 스스로가 지었나?"
"그렇소."
혐천이란 문자 그대로 하늘을 혐오한다는 뜻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독각청년의 사고
배경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절절한 한(恨)을 가슴속에 깊숙이 묻어둔 채 매사를 그것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위인이었다.
실제로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기
도 했다.
"언젠가는 하늘이 나로 인해 피를 토하게 될 것이오. 더도 덜도 아니고 꼭 내가 흘린
만큼을 말이오."
"무시무시한 논리로군."
북리뇌우는 씁쓸히 웃었다.
독각청년 혐천.
그는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철이 들기도 전에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무학을 수련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해도 이후에 비하면 행복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운명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급전되었다.
그 날, 혐천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독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참하게 한쪽 다
리가 싹둑 잘려져 나갔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심장부에 괴병기가 쑤셔 박혔던 것이
다.
그리고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어딘가에 버려졌는데, 모질고 독한 것이 인간의 생명인
지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상은 혐천이 북리뇌우에게 미리 고한 바 있는 과거사의 일부였다. 그는 계속하여 자
신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가 그 당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천적으로 역맥지신(逆脈之身)을 타고났기
때문이었소. 그 때 죽지 못한 것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기는 했소만."
역맥지신.
이는 심장이 다른 사람의 반대편인 오른쪽에 있는 특이한 체질을 말한다. 그로 인해
혈맥(血脈)도 반대로 이어져 있는 것이 이 희귀체질의 특징이다.
혐천의 음성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비록 다리가 잘려 나가고, 몇 가닥의 대맥(大脈)이 끊어지긴 했으나 내 몸 속에는 원
래부터 기이한 잠류가 흐르고 있었소. 나도 그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소. 인매
상들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이오."
북리뇌우가 물었다.
"인매상들과는 어떻게 만났는가?"
"만났다고 할 것도 없소. 그 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나는 그들의 수중에 있
었소. 그들이 나를 주어다가 대충 치료를 해 주었던 모양이오."
"아쉽군. 만일 누가 성의를 가지고 돌보아 주었더라면 가슴의 상처가 구멍이 난 상태
로 아물지는 않았을 텐데."
혐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큭큭 웃었다.
"그런 행운 따위는 기대해 본 적도 없소."
그의 눈에서는 더욱 강렬한 살류(殺流)가 흘렀다.
"나는 발에 쇳덩이를 매달고 각지를 전전하는 동안 어릴 때 익혔던 무학을 회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 왔소. 그 점은 그들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소."
"흠, 그래서 더 학대를 했겠군."
"그들은 나를 증오하면서도 일편으론 두려워했었소. 오늘만 해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놈들을 내 손에 죽었을 것이오."
"하긴 그건 당시에 나도 예상했었지."
그 말에 혐천은 북리뇌우를 힐끗 건너다보았다.
"어떻게 말이오?"
"그대의 눈빛과 기세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 요인이 나를 강하게 잡아당기기도 했었
고."
북리뇌우는 힘주어 말한 후 그를 정시하며 물었다.
"그대와 같은 나이에, 그대만큼 가혹한 삶을 견디어 온 사람이 또 있다면 믿겠는가?"
"내게 무얼 묻고자 하는 게요?"
혐천은 그처럼 반문하더니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단언컨대 그런 자는 없을 것이오."
북리뇌우는 더 이상 말로 응대하지 않고 옷자락을 풀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내 보였다
"아니!"
혐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발했다.
그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북리뇌우의 심장부에 상징처럼 자리잡고 있는 삼
백육십 줄기의 도흔(刀痕)과, 거기에 더해 엽도(葉刀)가 깊숙이 후벼 놓은 상흔을.
"후후, 그대와 나는 고통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것이다. 나는 이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었을 때, 그대와는 달리 훌륭한 분들에게 거두어졌다. 하지만 그 분들은....
..."
북리뇌우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나를 구해 키웠다는 이유로 졸지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한 분은 큰 뜻을 품었으되
이루지 못하신 채 세상을 뜨셨고, 또 한 분은 요절(夭折)......."
그는 옷자락을 도로 내렸다.
"아무튼 그대와 나의 만남은 이래저래 우연이 아닌 게 확실하다. 이것이 그 증거가 될
지도 모르겠군."
북리뇌우는 혐천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러더니 곧 그의 미간
에서 자청색의 광망이 피어 올라 사위에 부챗살 모양으로 번져 나갔다.
신비로우면서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는 그 광경에 혐천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굳어지고 말았다.
그 다음 순간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게도 혐천의 미간에서 북리
뇌우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정도 차에서는 밀리는 듯했지만 그의 미간에서도 분명 자청색 기운이 부챗살 모양으로
광망을 뻗어내고 있었다.
"역시......!"
북리뇌우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약간의 떨림이 깃든 음성으로 물
었다.
"그대는...... 혹시 지옥천룡(地獄天龍)과 지옥삼혈좌(地獄三血座)의 전설을 아는가?"
"지옥삼혈좌!"
혐천은 무참할 정도로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북리뇌우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혐천의 병약한 육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어찌 잊을 수 있겠소? 내 가슴에 검을 쑤셔 박던 자가 했던 말인 것을. 그 자는 분명
날더러 지옥삼혈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살려 둘 수 없다고 했었소."
"오오!"
웬만해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북리뇌우조차 이 순간에는 감정을 제어하는데 실패하
고 말았다.
"결국...... 전설이 이루어진 셈이군. 지옥천룡지체(地獄天龍之體)와 지옥삼혈좌 중
한 사람이 만났으니......!"
혐천의 얼굴이 무섭도록 씰룩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맞다."
"빌어먹을.!"
북리뇌우가 그에게 물었다.
"왜, 받아들이기 힘드는가?"
혐천은 굳이 내심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소."
북리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그대는 운명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나와의 만남도 없던 일로 치
부하고 싶겠지."
"맞소."
혐천은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차갑게 응수했다. 그의 태도에 북리뇌우는 다소 강한
어투로 말했다.
"수용해야 한다. 그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 그렇소?"
"그대의 소원은 하늘이 그대로 인해 피를 토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 그러려면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혐천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소린지 좀 쉽게 말하시오."
북리뇌우는 씩 웃었다.
"그대의 방식으로 얘기하니 오히려 납득이 어려웠던 모양 인데, 내 식으로 말하도록
하지."
운을 뗀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대와 나의 생은 같은 이유로, 같은 무리들에 의해 짓밟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힘을 합쳐야 한다."
혐천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소! 난 혼자서도 능히 복수를 할 수 있소."
"모르는 소리, 그들은 현재 무림 전역을 휩쓸며 혈풍을 일으키고 있는 단체이다. 그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하지 못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격이지."
북리뇌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더구나 나를 찾아내 다시 죽이자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은즉 그대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자칫하면 그대는 의도와는 달리 역으로 그들에게 당할 수도 있다."
"으음!"
혐천은 한소리 신음을 발했다.
"천마유궁(天魔幽宮), 이것이 그들의 정체이다. 본인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
지."
"그들이 누구인가는 관계없소. 과거 그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철저한 응보만이 중요할
뿐이오."
"물론 그 일은 나와 함께겠지?"
혐천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겠소."
"어디로 말인가?"
"나도 모르오. 하지만 일신의 무학이 완성되고, 살아 있을지 모르는 나머지 지옥혈좌
들을 찾았을 때 다시 오겠소."
그의 눈빛은 극렬한 증오와 원한으로 인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
은 폭발 직전의 화약과도 같았다.
북리뇌우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 때를 기다리겠다."
혐천은 더 지체하지 않고 신형을 뽑아 올렸다.
휙!
그의 모습은 허공을 갈라 야천으로 사라졌다.
'대단한 신법!'
북리뇌우는 이래저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릇 힘없는 자는 체념이 작용하여 굴욕이나 고난을 대체로 잘 참기 마련이다. 그러나
힘이 있는 자가 그것을 견뎌 내기란 죽느니보다 못한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 결정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질상 자신이 누구의 휘하에 든다는 건 상상도 못
해 보았을 텐데."
어쨌든 혐천은 지금까지 염원을 이루게 될 날을 기대하며 지독스러우리 만큼 정체를
숨겨 왔고, 마침내 자신을 이끌어 줄 지옥천룡지체인 북리뇌우와 만났다.
이 필연적인 만남이 무림 질서를 뒤바꾸어 놓는 일대 폭풍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세인
들은 먼 훗날에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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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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