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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4-27절
설교자: 조정의
첫 사람 아담은 과일 먹을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깨고 그 속에서 누렸던 모든 복을 버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하고 그분께 속한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복을 얻게 하는데,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직 복음을 자랑하는 이들은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아담과 같은 시험을 시시때때로 당한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계속해서 포기함으로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본을 보인 삶이 바로 이것이다. 바울의 삶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우선순위가 있었다. 복음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절제하고 자기 권리를 포기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고 그렇게 “복음에 참여하고자” 했다(23절).
바울만 이런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바울 자신도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했다(27절).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자,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는 복음에 참여할 자격 미달이다. 받은 구원을 빼앗긴다는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음이 중심에 확실히 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성도가 복음의 부르심을 첫째 자리에 두게 하시고, 복음보다 자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게 해 주셔서, 진정으로 복음에 참여하는 자임을 확신하게 해달라’라고 매일 간구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하고 복음만을 자랑하는 교회로 함께 서자.
1. 복음만이 우리의 자랑이다(15-18)
바울은 앞서 자신과 바나바가 포기한 여러 가지 권리를 나열했다(4-6절). 고린도 성도의 일부가 비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원래부터 권리가 없었던 게 아니다(7-14절). 다만 복음에 어떤 장애도 생기지 않게 하려고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15절; 살전 2:9; 살후 3:8).
바울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성도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울의 말을 자기 권리를 챙겨달라는 말로 알아듣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15절).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단했다(15절). 돈이나 다른 어떤 무언가가 섞이면 자신의 자랑이 공허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직 자랑하길 원했던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가 전하는 복음이다(16절). 아하!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면 후에 보상이 떨어지니까, 이생의 권리를 많이 내려놓고 내세의 상급 얻기를 추구하며 자랑하겠다는 말이구나! 하지만 바울은 곧이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16절).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을 말과 삶으로 힘써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하나 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오히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그런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가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만일 그랬다면 상을 바라고 얻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17절). 하지만 복음 전하는 일은 바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사명에 의한 일이었다: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 하나님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그를 구별하셨고(갈 1:15), 그가 복음을 미워하고 비방하던 중에 만나시고 구원하셨다(행 9장).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다(행 26:19). 그때부터 바울의 고백은 한결같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명을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무언가가 아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그 자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18절).
바울이 돈을 바라지 않고 복음을 값없이 전할 때, 바울이 바라는 상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오직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바울이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에게 있는 모든 권리를 쓰지 않고 포기할 때, 오직 복음이 그 모든 권리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유일한 자랑이라는 것이 확실히 입증됐다. 신자는 오직 복음만을 자랑하고 전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바울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2. 복음위해 권리를 포기한다(19-23)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웠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19절). ‘사람을 얻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이다(22절). 바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사람을 구원한다. 바울은 그 복음을 전달하는 사명에 충성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았다. 신분적으로는 노예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노예가 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는데(22절), 구체적으로 유대인,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율법 없는 자, 약한 자들에게 각각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서 섬겼다(“얻고자 함이요”4, 20-22절). 가령 바울은 할례로 구원을 확신하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갈 5:2), 유대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1-3). 성전에서 나실인 서원한 자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한 비용을 지불했다(행 21:17-26). 그는 분명 율법 아래 매여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매인 자들이 복음을 수용하는 데 장애가 없게 하려고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이다. 율법 없는 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없도록 수고했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살후 3:8).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될까 봐 식사 한 끼도 거저 얻어먹지 않았다. 바울이 말한 약한 자들은 8-10장의 문맥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지 못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단했다(8:13). 후에 그는 불신자 중에서 누가 청하면 차려 놓은 것을 묻지 말고 먹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면 초대한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명했다(10:27-31). 먹든지 먹지 않든지 자기 자유나 권리 행사가 아니라 약한 자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종이 되었다.
오해하지 말라. 바울이 영혼을 얻으려고 수시로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21절). 전도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의 법을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간과하지 않고 철저히 기쁨으로 순종하셨다. 하지만 당시 법처럼 여겨진 장로의 유전과 전통 등을 과감히 어김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방과 위협을 받으셨는데, 이는 오직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마 20:28; 눅 19:10).
한 마디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다. 그것이 자신이 권리를 쓰거나 쓰지 않는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가리켜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했다(23절). 이것을 주목하라. 복음이 약속한 모든 복에 참여하는 자의 마땅한 삶이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삶. 복음이 당신의 믿는/믿지 않는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전달되게 하려면 당신은 그들의 종처럼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복음이 당신의 유일한 자랑이고 맡겨진 사명이기에 기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3. 복음향해 철저히 경주하라(24-27)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신 분명한 목적, 영혼을 얻기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전력했다.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정했고, 이를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다. 그리고 복음을 자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그와 같이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급진적으로 요구한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절).
고린도 도시엔 2년에 한 번씩 대규모 체전이 열렸는데, 그때 주종목 중 달리기와 권투가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마도 이스트미아라는 이 경기가 열렸을 것이다. 바울은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단 한 사람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뛰는 모습을 비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상을 받기 위해 그렇게 달음질 하라고 명령했다. 대충, 나약하고 미지근하게 복음을 말하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누리고 싶은 권리를 다 누리면서 승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월계수와 같이 썩을 것으로 관을 씌우는 달리기, 물론 명예와 부가 주어지겠지만, 그것도 금세 잊혀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서 먹는 것과 자는 것과 행동하는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까지 치열하게 다툰다면, 썩지 아니할 것 즉 “의의 면류관”, 그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절제하고 노력해야 하겠는가?(딤후 4:8).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급진적인 절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삶의 분명한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26절).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방향)이 있다. 우리 모두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롬 14: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전 10:31). 주가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다(벧후 3:9).
이어서 바울은 권투의 비유를 드는데,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한다(26절).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권투가 아니라 대상을 향하여 정확하게 주먹을 날리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자신이 치는 대상을 “내 몸”이라고 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27절). 실제 권투에서는 자기 몸을 때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복음을 전달할 때, 우리가 자기 몸을 때려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내 자존심을 때려눕히고, 내 권리를 굴복시키고, 내 자유를 제한하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 복음으로 싸워 이기는 비법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분명한 방향으로 달음질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유를 밝혔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버림을 당한다’는 말은 경기에 출전한 선수의 자격 미달을 의미한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수고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바울,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 그가 미달되지 않도록 분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투쟁해야겠는가?
물론 우리는 투쟁으로 구원을 취득하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 은혜가 너무 귀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헌신한다. 자기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하늘 보좌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이다. 찬양받을 권리를 쓰지 않고 멸시를 받으셨고, 스스로 많은 자유를 제한하여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악을 악으로 갚을 권리를 내려놓고 선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살 권리를 포기하여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복음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우리에게 오직 은혜로 선물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에 참여한다. 바울이 우리 앞에서 그 본을 직접 보여주었다.
조금 넓은 의미로 복음을 전하는 일의 목적은 불신자를 신자로 거듭나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신자가 더욱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말과 태도와 반복되는 행동은 당신의 믿지 않는 자녀, 배우자, 또는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를 복음으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 당신의 자존심, 자유, 권리는 복음이 그들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이 전달되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되고 포기되고 있는가? 아니면 팔팔하게 살아서 복음의 장애물과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당신의 절제와 복종은 당신이 바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승리의 관을 기대해도 좋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대로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자세는 당신이 복음의 방향을 거스르고 있으며 버림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