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생각
불굴의 신념으로 저항하였지만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핀란드는 바로 직전에 독일과 소련에 의해 재분할된 폴란드나 무혈점령당한 발트 3국처럼 독립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핀란드를 응원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컸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였을 뿐이었고 오히려 독일과 소련이 앞다투어 전쟁을 일으키자 유럽 각국은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약소국 핀란드는 철저하게 외톨이였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중심가에 진주한 소련군 전차. 만일 핀란드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운명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결국 어떠한 외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핀란드의 지도부는 전부를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일부를 잃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핀란드는 2월 12일,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강화를 제의하였다. 전세가 바뀌었고 당한 것이 많아 화가 잔뜩 난 소련이 쉽게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곧바로 회담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처음부터 진행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 개시 전에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핀란드 영토의 일부를 요구한 것처럼 포장하였지만 애당초 핀란드 전체를 합병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던 소련은 당연히 핀란드의 항복을 원하였다. 전쟁까지 치르고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단지 전쟁 전에 내세운 요구 조건만 달성하고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협상에 응하면서 핀란드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종전 후 점령지에 도열한 소련군 전차. 만일 핀란드가 계속 저항하였다면 패하였겠지만 소련의 피해도 더욱 커졌을 것이 틀림없었기에 소련도 강화 협상에 응하였다.
사실 예상치 못한 끔찍한 피해에 넌덜머리가 나있던 소련 내부에서는 하루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중이었다. 결국 핀란드의 제의를 무시하고 계속 싸우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과연 어느 정도의 피해를 더 입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만큼 그동안 소련이 입은 상처는 깊었다. 결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생겨난 두려움도 있었다.
누가 이기고 누가 패했나
겨울전쟁 직전에 있었던 일본과의 국지전과 폴란드 동부의 점령에 도취되어 소련은 군사력을 자부하고 있었지만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영국, 프랑스가 방관을 했고, 무엇보다 독일과의 사전 조정이 있었기에 더 이상의 탈은 없었다. 그러나 얕보던 핀란드에게도 쩔쩔맸는데 만일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과 상대한다면 결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1940년 1월 1일 핀란드군 진지를 점령하고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소련군. 하지만 이런 선전 사진을 찍기 위해 바친 대가는 혹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핀란드가 제시한 조건만 수용하고 전쟁을 끝낼 수는 없었다. 핀란드는 전쟁 전 소련이 요구한 부분만 양보하겠다고 하였고 소련은 당연히 그 이상을 원하였다. 결국 보름 간 이어진 협상은 좀처럼 타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소련은 군사적 압박에 나서서 3월 1일부터 공군의 무차별적이고 대대적인 공습 재개와 동시에 카렐리야의 요충지인 비푸리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3월 9일, 피난민들이 후방으로 소개된 후 잿더미로 변한 텅 빈 도심에 소련군이 입성하면서 비푸리는 함락되었다. 소련은 만일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핀란드의 모든 도시를 이렇게 만들어 놓겠다고 협박하였다. 결국 3월 13일 대부분의 요구 조건을 핀란드가 수용하면서 겨울전쟁은 막을 내렸다. [1]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핀란드는 소련의 침략을 중지시킨 대가로 엄청난 수모를 감수하여야 했다.
소련군이 최악의 패전을 당한 라아테 가도의 최근 모습. 겨울전쟁 당시 유기된 소련군 무기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겨울전쟁에서 소련이 당한 피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핀란드군은 전쟁에 동원하였던 병력의 50퍼센트에 해당하는 25,000여 명의 전사자와 45,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손실 비율은 높았다. 하지만 절대량에서 소련은 항공기 500여 기, 전차 300여 대, 야포 500여 문이 파괴 또는 노획당하였고 무려 35만여 명의 사상자, 실종자, 포로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핀란드의 5~6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자산이 된 뼈아픈 교훈
소련은 우격다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치를 떨 만큼 참혹한 패배를 당한 형국이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무능은 이후 독일이 소련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단초가 되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소련군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겨울전쟁에서 목도한 모습은 예상을 벗어난 한심함의 극치였다. 결국 겨울전쟁은 독일이 소련 침공을 감행하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무참하게 격파된 소련군 기갑부대의 잔해. 히틀러는 소련군의 능력이 생각보다 떨어진다고 오판하여 독소전쟁을 감행하였다.
반면 핀란드군의 경이적인 전투력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한 배에 올라타게 되지만 히틀러가 반하여 핀란드를 반드시 추축국에 가담시키기를 원하였을 정도였다. 제2차 대전 당시 많은 약소국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축국에 가담하였는데 그중 핀란드의 전투력은 최상이었다. 비록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었지만 겨울전쟁에서 보여주었듯이 핀란드군은 항상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제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을 대표한 무기 중 하나인 PPSh-41은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이 사용한 수오미 기관단총을 카피한 것이다. 그 정도로 소련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겨울전쟁은 소련에게는 너무나 아픈 교훈이 되었다. 지휘 체계 붕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저리게 느낀 스탈린은 로코소프스키(Konstantin Rokossovsky)처럼 수감되어 죽을 날짜만 기다리던 많은 숙청 장교들을 복직시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급조된 대전차 화기에도 쉽게 격파당한 T-26, T-28, T-37, BT 같은 구식 전차로는 더 이상 싸우기 곤란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말이 많았던 T-34 같은 신예 전차의 양산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굴욕을 안겨준 핀란드군에게서 배울 점은 카피를 해서라도 습득하였다. 설상복, 방한복, 스키, 피한 대피소처럼 동계 전투용 장비와 시설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특히 핀란드군이 근접전에서 사용한 수오미(Suomi) 기관단총은 악몽을 안겨주었지만 너무 인상적이어서 PPSh-41 기관단총의 개발을 이끌어 냈다. 물론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독일의 침공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 되다
그런데 겨울전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독립 유지에 성공하였지만 강탈당한 것이 많다 보니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핀란드의 의지는 컸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른 15개월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소련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이 핀란드에게 함께 싸울 것을 제의한 것이었다. 핀란드는 나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소련이 너무 미웠기에 독일 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941년에 시작되어 1944년까지 이어진 소련과 핀란드의 2번째 혈투가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다.
1939년(좌)과 1940년의 지도를 비교하면 소련의 침략 야욕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협박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한 핀란드는 일부 영토를 잃었지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출처: (cc) Peter Hanula at Wikimedia.org>
혹자는 만일 핀란드가 처음부터 소련이 요구한 조건을 수락하였다면 전쟁도 피하였을 것이고 오히려 땅과 자산을 적게 빼앗겼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애당초 소련은 핀란드의 전부를 원하였기에 단지 그렇게 양보하였다고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괴뢰 정부를 세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합병한 동부 폴란드, 발트 3국의 사례를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부분이다.
오히려 핀란드가 겨울전쟁에서 놀라운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기에 소련이 강제 합병 야욕을 단념하고 이익을 챙기는 선에서 도발을 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계속전쟁을 벌여 복수를 시도한 핀란드에게 전후 소련은 더욱 큰 보복을 가할 여지가 충분하였다. 하지만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간신히 독립하는 데 성공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등과 달리 핀란드는 제2차 대전 종전 후에도 친소 중립 조건으로 계속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겨울전쟁 당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핀란드군의 모습. 비록 핀란드는 굴복하였으나 침략자들이 몸서리칠 만큼 무서운 저항을 펼쳤고 이는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수준에서 핀란드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골치가 덜 아프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침공하자 지난 내전 당시에 볼셰비키의 도움을 받았던 세력들조차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수호하려 들었을 만큼 핀란드는 치열하게 항전했다. 그러한 핀란드를 강제로 지배한다 해도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소련은 겨울전쟁을 통해 절감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겨울전쟁은 침략자에게 약소국을 함부로 깔볼 수 없도록 만든 저항의 상징이었다.
-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첫댓글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었던 혈전인 겨울전쟁을
공부 잘했습니다.
비록 핀란드는 굴복하였으나 침략자들이 몸서리칠 만큼 무서운 저항을 펼쳤고
이는 약소국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많은 글 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밤시간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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