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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조회 수 1852 추천 수 0 2010.09.17 23:35:13
우리 고대사의 일부인 일본의 고대사를 이해하려면 잉글랜드나 미국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이 글에서는 둘 가운데 잉글랜드의 고대사와 중세사를 일본 고대사와 비교하고자 한다.
석기시대인 서기전 6550년(지금으로부터 8560년 전)에 잉글랜드에는 ‘이베리아’ 인이라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잉글랜드에 스톤헨지를 비롯한 석조 건축물들(쉽게 말해 고인돌)을 남긴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삶과 문화는 오늘날의 잉글랜드 백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서기전 400년(지금으로부터 2410년 전),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인 ‘벨가이 갈리아’에서 잉글랜드로 건너온 켈트족(‘벨가에Belgae' 족)들이 이베리아인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브리튼 섬(오늘날의 영국)을 차지한다.
이것이 사실로 인정받는 까닭은 로마인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록(벨가이족이 바다를 건너가 브리튼 섬으로 갔다는 기록)과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증거(“브리튼 섬과 아일랜드의 철기 시대 유물이 유럽 대륙의 켈트족 유물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유”하고 있고,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의 유물은 유럽 대륙의 그것과 “소용돌이치는 선, 식물(植物)에의 암시, 인간과 동물을 형상화한 고유한 양식(樣式)”이라는 켈트 예술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의 “마른강 출신의 장인들이 만든 멋진 칼집이 달린 단검과 피뷸러 따위”가 나오는 것도 갈리아인이 잉글랜드에 건너갔다는 증거다), 역사학자들이 찾아낸 증거(아일랜드와 브리튼 섬과 유럽대륙의 켈트족들이 모두 “무기와 성채, 전쟁에 대한 강조”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세 지역의 켈트족들이 모두 드루이드 교라는 같은 종교를 믿고 있었다), 언어학적인 증거(브리튼에 살게 된 켈트인의 두 무리는 모두 대륙에서 벨가이족으로 살던 시절에 쓰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오늘날의 요크셔에 정착한 ’파리시‘족 - 오늘날의 파리 시에 살고 있었음 - 과 원래 벨기에에 살다가 석세스와 햄프셔의 템즈강 남쪽에 정착한 ’아트레바테스‘족이 그들이다. 한때는 카이사르를 도왔던 아트레바테스의 왕 ’콤미우스‘는 나중에 반(反) 로마 갈리아 연합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결국 브리튼으로 도피해 왔다)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군이 잉글랜드를 정복할 때까지 브리튼 섬을 다스린다.
그리고 “서기 43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군대가 마침내 브리튼을 점령했지만, 브리튼의 저항은 그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서기 61년 이스트 앵글리아의 이케니족 여군주 부디카가 이끄는 반군은 카물로두눔(지금의 콜체스터)과 론디니움(지금의 런던)을 공격하여 로마 수비대를 전멸시키지만, 결국 진압당하고 만다. 서기 77년 브리튼은 웰시 산맥과 북스코틀랜드를 빼고는 완전히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이후 로마인들은 서기 410년에 브리튼 섬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려 367년 동안 브리타니아(잉글랜드)를 다스렸으며, 그들이 물러난 뒤에는 게르만족인 앵글족과 색슨족과 주트족이 브리튼족의 초청을 받아 독일 북부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온다. 서기 450년에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브리튼족을 죽이거나 내쫓은 뒤 잉글랜드를 차지했다. 브리튼족은 서기 480년까지 게르만족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은 게르만족이 이겼고 브리튼족은 오늘날의 웨일스나 콘월 반도, 프랑스의 브로타뉴 반도로 달아나야 했다. ― 게르만족의 잉글랜드 이주를 믿을 수 있는 까닭은 독일에서 잉글랜드의 땅 이름과 비슷한 땅 이름이 많이 나오며, 이들의 고향인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오늘날의 독일 북부, 덴마크 남부에 있는 지역)과 주트랜드의 거주민들이 비슷한 시기에 고향을 모두 떠나버렸다는 고고학자의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 이 때 브리타니아의 이름이 ‘앵글로 색슨족의 땅’이라는 뜻인 ‘잉글랜드’로 바뀐다.
앵글로 색슨족은 잉글랜드에서 586년 동안 기득권을 누리다가 서기 1066년 9월 28일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인 ‘노르망디’에서 배를 띄워 잉글랜드를 공격한 프랑스 공작 ‘기욤(윌리엄 1세. “정복왕” 윌리엄)’과 싸웠는데, 이 전쟁은 보름 뒤인 서기 1066년 10월 13일 색슨족의 왕인 해럴드 2세가 이끄는 군대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의 공작 기욤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후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의 주인이 되었다.
"분노한 앵글로 색슨족은 여러 차례 윌리엄 왕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켜 윌리엄 왕과 그의 군사들을 노르망디로 되돌려 보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색슨족은 매번 패배할 뿐이었고 이에 윌리엄 왕은 앵글로 색슨족을 더욱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이들의 땅과 관직을 빼앗고 결국은 색슨족에게는 좋은 땅도 높은 관직도 거의 남겨 놓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나 노르만 사람들을 색슨족의 우위에 앉혔다. … (중략) … 그리하여 브리튼족을 정복했던 색슨족은 노르만족에 의해 정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재산을 빼앗기고 거만한 이방인들의 종의 신분으로 강등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잉글랜드 귀족들 중 일부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색슨족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귀족은 거의 한 사람도 없고 젠트리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모든 권력과 지위를 완전히 빼앗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색슨족이 노르만족에게 압도당했던 까닭은 후자의 무력 때문이었지만(색슨족은 대부분 보병이었지만 노르만족은 기병이었다), 두 민족이 문명화한 정도가 너무 달랐던 것도 한몫했다. 한 예로 "색슨족에게는 나무로 만든 보잘것없는 집들 뿐이었던 반면에 노르만 사람들은 돌로 만든 대규모의 아름다운 성과 교회들을 건축하는 기술을 들여왔다." 이후 오늘날까지 잉글랜드의 주인은 노르만족과 노르만족에게 동화한 앵글로 색슨족이며 결과적으로는 노르만족이 최종 승자가 되어 앵글로 색슨족의 정체성을 결정했다.
내가 잉글랜드의 역사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서(西) 일본의 역사도 잉글랜드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나중에 다시 한 번 살펴보겠지만, 일본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와도 닮은 점이 많다).
잉글랜드의 첫 주인이 이베리아인이었듯이 일본열도의 첫 주인은 조몽인이었다. 이 둘은 석기시대 사람이고,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거나, 흡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베리아인을 몰아낸 켈트족은 브리튼 섬에서 가까운 땅인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건너왔는데, 이는 조몽인 대신 서(西) 일본의 새 주인이 된 야요이인(원한국인)이 제주도와 한국의 삼남 지방에서 건너온 것과 비슷하다. 서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땅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야요이인은 조몽인을 죽이거나 몰아낸 뒤 서일본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브리튼족이 게르만족에게 밀려나고 게르만족이 잉글랜드에 작은 왕국들을 세우듯이, 마한 유민이나 신라인(석昔씨족이 세운 해양신라), 가야인, 임나가야인이 건너와 야요이인의 땅을 정복하는데, 이 때 일본열도를 다룬 역사기록이 처음 나온다.
앵글로 색슨족이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한 것은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서기 396년 백제 진왕인 응신(신무)의 군대에게 기내지역 호족들이 패한 사실(『삼한사의 재조명』참고)이나, 서기 266년 임나가야군(중기왜)이 야마도를 무너뜨리고 구주 북부와 기내지역을 점령한 사실(이 사이트의 글인「▩임나가야가 야마도를 친 해와 그 명분」/「▩야마도군과 임나가야군의 대결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기내지역의 하시하카 고분에 대한 견해」/「▩역사서에 야마도군과 임나가야군의 전쟁이 안 나오는 까닭」참고)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가 헤이스팅스 전투와 가장 비슷하다. 윌리엄 1세가 기병 수천 명만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서 색슨족 보병들을 무찌르고 노르만족보다 수가 많은 색슨족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임나가야 군 역시 야마도 사람들보다 수는 적었으나, 야마도 사람들보다 뛰어난 전투 기술을 지니고 있었고(예컨대 궁술이나 기마술), 무장도 좋았기 때문에(갑옷, 투구, 방패, 각궁), 야마도를 격파하고 기내지역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르만족이 색슨족을 자기 식대로 뜯어고쳐 오늘날의 앵글로 색슨족을 만든 것은 고분시대에 서일본으로 밀려온 백제인들(오늘날의 일본인들)이 구주와 기내지역에 살고 있던 원한국인, 마한인, 임나가야인, 가야인, 신라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한 것과 비슷하다.
잉글랜드의 역사와 서일본의 역사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잉글랜드는 로마의 지배를 받은 뒤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침략을 받지만, 서일본은 고분시대의 백제인들이 로마인과 게르만족과 노르만인이 했던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한꺼번에 다 했고, 서일본으로 간 정복자들은 (브리튼족의 초청을 받은 게르만족과는 달리)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켈트족 - 고대 유럽의 정복자』(크리스티안 엘뤼에르 지음, 박상률 옮김)
―『아서왕 - 전설로 태어난 기사의 수호신』(안 베르텔로트 지음, 채계병 옮김)
― <켈트족의 기원> ( http://blog.naver.com/nayaleejk/22297931 )
―『스코틀랜드 역사이야기 1권』(월터 스콧 지음, 이수잔 옮김, 현대지성사 펴냄)
―『바바리안』(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우혜령 옮김, 뜨인돌 펴냄, 서기 2004년)
첫댓글 이베리아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사람들??..오늘날 그곳에 존재하는 나라는..스페인과 포르투갈..미니국가 안도라를 깜박했네..3개국이 있군요.
브리튼 제도(아일랜드 섬 포함) 원주민은 켈트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이베리아인이었군요..처음 알았습니다.
뭐랄까, 앵글로색슨인들의 문명화 수준은 그리 낮지 않았습니다. 노르만인들이야 노르망디의 부유함과 프랑스 본토의 영향이 컸던 거긴 하지만- 앵글로인들도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해서 7세기 무렵부터도 궁정문화와 기예품들, 수사적 서예들, 오파의 장벽들을 보면 그리 낮지 않았고 통일 잉글랜드 시대는 더더욱 그랬지요. 에드가 시대의 문화적 번창은 오히려 프랑키아에 선교사를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노르만의 부유함 정도가 문명의 크기를 더 키운 건 맞을 겁니다. 다만 허름한 나무판자집과 돌집 정도로 문명의 정도를 비교하진 않습니다.
+
윌리엄 1세는 보병과 궁병 그리고 기병대를 조합한 군대를 끌고 왔습니다.
전투를 보면 초반에 궁병대로 적을 제압하려다 실패하자 보병과 기병을 끌고 나아갔다가 고지를 선점했던 앵글에게 한 번 밀린 상태에서 앵글인이 내려오자 전투가 혼파망이 됬고 그 와중에 해럴드가 전사하고 전열이 무너진 앵색군이 조져지면서 패배했죠.
해럴드가 진 이유는 확실히 노르만 기병의 종요도를 빼둘 순 없지만, 당시 허스칼이라는 중보병의 무장 정도나 훈련수준이 그리 낮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약 1주 전에 스탬퍼드까지 가서 노르웨이와 자기 동생이 끌고 온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내려가 헤이스팅스까지 이동했는데 대략 이게 부산-서울 거리를 왕복으로 하루에 40km 정도를 1~2주 만에 왔다갔다한거라.
@헨셀 Jung ++
월터 스콧은 19세기 '작가'입니다. 이야기는 잼게 쓰시는데 그리 좋은 사료는 아닙니다. 기번 느낌 납니다. 영국사는 한국 정발로는 옥스퍼드 영국사랑 앵글로색슨의 언어 정도가 좋습니다. 그외에 원서는 치면 다 나오니.
예전에 빈란드 사가라는 만화를 보면서 바이킹과 영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졌는데..알려주신 책들...도서관에서 찾아보고..한번 읽어봐야겠군요..
책제목으로는 앵글로색슨의 언어보다 옥스퍼드 영국사를 더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암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치우천 언어사는 사실 배경 파트에 앵글로색슨사를 자세히 써서 그렇습니다. 저도 언어파트는 안 읽었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