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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3년 올해의 좋은 시 1000 809
Vertigo
건망증이 심해 내가 신고 다녔던 神을 어디에 벗어 놓았는지 헷갈린다 양복 윗주머니에 잘 모셔 두었던 우울과 몽상의 부스러기를 수거해 붉은 우체통에 살처분하고 나서도 내가 신었던 신발의 빛깔은 기억나지 않는다
바늘귀를 통과한 달팽이가 서서히 몸을 비튼다 나는 신발을 신지도 못하고 기억의 안테나에 시동을 건다 귓등은 붓지 않았고 고막 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기억들만 바람에 서걱거린다
붉은 노을을 잠시 바라보았을 뿐인데 석양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허공을 묶는다 새벽달이 임종을 고하는 동안 부지런한 수탉은 천국을 노래한다 아직까지 편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병아리들이 귀를 틀어막고 거리로 뛰쳐나온다
수취불명의 맨발은 여전히 신발장을 헤매는데 누가 나에게 반짝이는 神을 찾아줄 것인가 귀울림을 치료해 줄 의사가 모닝콜을 들을 수 있을까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데 새벽까지 문을 연 약국이 있기는 할까
계간 『애지』 2013년 봄호 발표 |
첫댓글 vertigo : 현기, 어지러움...요즘은 종합세트로 앓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군 ...어지럽군.
머리를 풀어 헤치고 허공을 묶는 석양이라니...
그리고 그 뒤 낮은 포복으로 하늘을 순식간에 점령하던 조각난 구름들을 올려다 본 적이 있었죠.
하느님도 외로웠을 그 저녁이요.
올해의 좋은 시! 영원히 빛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