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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닷컴] 간절히 원해도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인간은 결과를 의도할 수 없다.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 땀과 피를 거듭 흘리는 지난한 과정까지가 인간의 몫이다. 그러고 나면 운명은 심드렁한 동작으로 다시금 주사위를 굴린다.
그러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1월10일 개봉)은 이루지 못한 결과를 패배로 기억하지 않는다. 삶의 진액을 모두 다 짜낸 후에 찾아온 서늘한 결말 앞에서 허망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던져 운명과 승부를 겨뤘던 그 경험을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당신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영화이니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핸드볼 국가 대표팀 감독 대행 직을 맡게 된 혜경(김정은)은 팀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오랜 동료이면서 라이벌이었던 미숙(문소리) 등 노장 선수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빚 때문에 잠적한 남편 대신 생계를 떠맡아야 했던 미숙은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지만, 혜경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 먹고 팀에 합류한다. 시종 몰아붙이기만 하는 혜경의 지도 방식 때문에 노장 선수들과 신진 선수들 사이의 불화가 거친 몸싸움으로 번지자, 핸드볼 협회는 남자 핸드볼계의 스타 승필(엄태웅)를 후임 감독으로 임명한다. 해임된 혜경은 미숙의 충고를 받아들여 명예회복을 위해 선수로서 팀에 재합류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하고 싶은 말은 소재에 이미 다 담겨 있다. 축구나 야구가 아니라 비인기종목인 핸드볼(이 작품은 세계 최초의 핸드볼 소재 영화다)을 골랐고, 그나마 금메달의 영광을 안긴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아쉬움으로 아직껏 기억하고 있는 아테네 올림픽을 택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이 임순례 감독이라는 것을 알면, 이 점에 대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세 친구'라는 가슴 아린 수작들을 충무로에 선사했던 그는 북적대는 광장보다는 후미진 뒷골목을 서성이고, 다가오는 얼굴보다는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는 감독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경기 장면들은 사실 '스포츠 드라마'에 걸맞는 멋진 볼거리들을 제공하진 못한다. 혜경과 승필이 벌이는 달리기 대결은 극 중반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면이지만 느슨하고 성기다.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은 영화 속에 계륵처럼 들어 있고, 가장 중요한 덴마크 전조차 긴박감이 적고 경기 디테일이 약하다.
대신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와 선 굵은 드라마로 관객을 확실하게 설득한다.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저마다 성격이 또렷하고 처한 처지가 생생해 흥미롭다. 탄탄한 캐릭터에서 자연스럽게 길어낸 유머 역시 양과 질 모두에서 관객을 시종 즐겁게 한다. 이쯤 되면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가 멋진 각본을 드라마에 선사한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빚쟁이들에 시달리느라 아내와도 연락을 끊고 잠적한 남편이 걱정되어 은신처로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가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한 미숙이 “도대체 왜 내 전화는 안 받아? 내가 빚쟁이야?”라며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남편을 향해 외치는 부분은 임순례 감독의 깊이가 제대로 드러난 뛰어난 씬이다. 그리고 경기의 승패를 가른 클라이맥스를 화면 밖으로 밀어둔 채, 포커스 아웃된 후경(後景)의 인물 군상 움직임과 프레임 안팎으로 넘나드는 선수의 표정으로 요약하는 슬로 모션 쇼트는 잊기 힘든 명장면이다. 이어 영화는 실제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 팀 감독과 선수들의 인터뷰와 경기 스틸 사진을 차례로 보여준다. 엔딩 크레딧 속 선수들의 온 힘을 다하느라 잔뜩 일그러진 표정 하나하나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고 이상할 정도로 뭉클하다.
이 영화의 연기는 핸드볼이 단체 경기임을 수시로 강조하는 극중 대사의 의미를 그대로 따른다. 이 작품이 각종 연기상을 휩쓸긴 어렵겠지만, 연기의 팀웍이 어떤 것인지는 잘 보여준다. 문소리는 믿음직하고 김정은은 단단하다. 혹은 김정은은 신선하고 문소리는 리드미컬하다. 이 영화 웃음의 상당 부분을 떠맡은 김지영은 호연을 통해 앞날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고, 엄태웅은 제 몫을 했다. 조은지는 넘치는 개성으로 활약했고, 민지는 강한 인상으로 흔적을 남겼다.
스포츠 영화이면서 여성 영화인 이 작품은 거의 모든 면에서의 도전이 돋보이는 기획의 산물이다. 더욱 반가운 것은 단지 기획의 신선함에서 그치지 않고, 흡인력과 완성도를 통해 한국영화의 영토를 한 뼘 더 확장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2008년의 벽두에 개봉하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충무로 대중 영화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