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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 유식唯識 (7)
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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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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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하나일까, 여럿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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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하나일까, 아니면 여럿일까? 대부분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마음이 보고 듣는 등 여러 작용을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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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식眼識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耳識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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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해 안식과 이식의 동시 작용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그것은 이 두 식識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안식과 이식이 제각기 따로 존재하고 있어야 동시 작용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식識은 마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따라서 안식과 이식이 별도로 존재한다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일까, 복수일까? 안식과 이식 등은 동시에 작용 가능할까, 아닐까?
장구한 불교의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여러 통찰이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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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마음은 하나라고 보았다.
이 하나의 마음이 어떤 것의 모양과 색깔을 식별하는 작용을 하고 있을 때를 안식이라고 부를 뿐이며,
그 소리를 식별하고 있을 때를 이식이라고 부를 뿐이라고 한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이와 같이 하나의 마음이 무엇을 그 인식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마음은 여섯 가지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며,
그 이름들이 바로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여섯 가지 식을 통틀어 6식六識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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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일체유부의 입장은 결국 마음은 하나며 그 인식 대상이 여섯이라는 이야기이다.
인식 대상의 차이에 따라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여섯 가지 다른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
안식이든 이식이든 어느 쪽이나 다 마음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식이 동시에 작용하려면 이 두 식이 별개로 존재해야 한다.
안식과 이식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하려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복수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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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는 위와 같은 사정에 의해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안식과 이식뿐만 아니라 6식 가운데 어느 식이 되었든
한 순간에는 하나의 식만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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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를 볼 때 화면도 보고 그 소리도 들으며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생각도 한다.
이때 생각하는 마음은 6식 가운데 의식意識에 해당한다.
한 순간에는 하나의 식만 작용한다는 설일체유부는 영화 감상 때 일어나는 마음 작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 순간에는 안식이, 다음 순간에는 이식이, 그 다음 순간에는 의식이 번갈아 가며 작용하며,
이런 연쇄적인 작용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영화 감상은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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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승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유가행파의 통찰은 설일체유부와 달랐다.
유가행파의 사상, 즉 유식에 따르면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다.
여덟 개의 마음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다.”를 전문 용어로는 심체일心體一이라고 한다. 마음(心)의 체體는 하나(一)라는 뜻이다.
반면에 “마음은 여럿이며 별개로 존재한다.”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는 심체별心體別이다.
마음(心)의 체體는 별개(別)이며 여럿이라는 뜻이다.
설일체유부가 심체일의 입장에 있다면, 유식은 심체별의 입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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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은 우리들 마음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의 여덟이라고 한다.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이 여덟 마음을 통틀어 부를 때 8식八識이라는 호칭을 쓴다.
8식 가운데 안식부터 의식까지의 6식은 유식 이전까지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유식 사상은 6식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이라는 두 가지 마음을 추가하여
우리들 마음은 8식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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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무의식에 가까운 마음으로
평상시 우리들은 이 둘의 존재를 알지 못할 정도로 이 두 마음은 미세하게 작용한다.
이전 호에서 유식 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유가사瑜伽師라 불린 전문 수행승들의 깊은 선정禪定의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말나식과 아뢰야식도 유가사들의 깊은 선정 체험의 결과로 발견되었으리라고 다수의 학자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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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체별의 8식을 주장하는 유식에 따르면 동일 순간에 여러 식(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작용 등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감상은 안식과 이식과 의식이
같은 순간에 함께 작용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정통적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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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오식前五識과 5근五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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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에서 8식을 말할 때 나열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의 순으로 열거한다.
여덟 가지 식을 통틀어 말할 때는 8식이라 부르지만,
앞에 ‘차례 제第’자를 붙여 ‘제8식’이라 할 때는 순서상 여덟 번째에 있는 아뢰야식만을 가리킨다.
제7식은 말나식이고, 제6식은 의식이다.
또 ‘앞 전前’자를 붙여 ‘전오식’이라 할 때는 순서상 앞의 다섯 가지 식,
즉 안식부터 신식까지를 합쳐서 가리킨다. 전육식은 안식부터 의식까지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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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부터 신식까지의 전오식은 서로 공통점이 있어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다.
그 공통점이란 세 가지이다.
첫째, 전오식은 그 각각의 인식 대상이 지금 이 순간 바로 눈앞에 있을 때만 작용한다.
둘째, 전오식은 눈ㆍ귀 등과 같은 신체의 감각기관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셋째, 전오식은 이름과 개념 없이 그 인식 대상을 식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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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ㆍ귀 등과 같은 신체의 감각기관 또는 감각기능을 불교에서는
‘뿌리 근根’자를 써서 ‘근根’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눈을 안근眼根, 귀를 이근耳根이라고 부른다.
‘근’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인드리야indriya로,
이것은 제석천을 뜻하는 인드라Indra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제석천은 불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신神이다.
인드리야는 ‘제석천과 같이 힘 있는 것’을 그 원뜻으로 하는데 중국 역경가들이 ‘뿌리 근根’자로 의역하였다.
식물의 뿌리는 뭔가를 발생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훌륭한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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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을 차례로 안근ㆍ이근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이라 호칭하며,
이들 다섯을 합해 5근五根이라 통칭한다.
이 5근은 식물의 뿌리가 강력한 힘으로 줄기와 가지를 만들어내듯이 전오식을 생하게 한다.
그런데 5근을 이해하는 데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눈을 편의상 안근이라 했다.
우리는 ‘눈’이라는 용어를 통해 각막ㆍ수정체ㆍ망막으로 되어 있는 의학적인 눈을 연상하고,
그 눈을 불교에서는 안근이라 부른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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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은 근에는 부근扶根과 정근正根이 있다고 말한다.
부근은 정근을 도우는 2차적인 기관으로 의학적인 눈은 이 부근에 속한다.
부근이 아니라 정근이 5근이다. 따라서 의학에서 말하는 눈은 안근이 아니다.
정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정근은 청정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정근은 청정한 보배 구슬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
청정한 보배 구슬이 빛을 발하여 사물을 비추듯이,
5근은 감각적 에너지를 각각의 대상에 비추어 그 인식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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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과 부근 중 보고 듣는 등의 감각 작용을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하는 것은 정근이며,
안근 등의 5근은 바로 이 정근을 가리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적 눈과 귀 등은 정근인 5근을 도우는 부차적인 감각기관, 즉 부근일 뿐이다.
안근은 위와 같은 정근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눈은 망막과 같은 부근이므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선 안근을 ‘진실의 눈’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이근부터 신근까지 나머지 5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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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을 계속하다 보면 저녁노을이 잡티 하나 없이 마음 가득히 들어오고
새소리가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울리는 체험을 한다.
좌선을 하기 전이나 후나 의학적인 눈과 귀는 종전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달리 보이고 들릴까?
정근인 안근과 이근이 발하는 감각적 에너지,
보배 구슬이 발하는 빛과 같은 그 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진실의 눈과 귀가 좌선을 통해 제 역할을 회복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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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유식에는 ‘제근호용諸根互用’이라는 사상이 있다.
5근이 그야말로 청정 그 자체가 되면
5근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모든 감각 작용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예를 들면 안근이 사물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도 듣고 냄새도 맡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식 사상을 잉태한 유가사들이 선정의 실천을 통해 얻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
선禪에서도 “귀로 들으면 깨닫기 어렵다. 눈으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온몸으로 안다.”는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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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근호용’은 경지가 매우 높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경우이다.
이하에서는 다시 유식 일반론으로 돌아가 언급하겠다.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은 위에서 언급한
5근 가운데 자신만의 특정한 한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할 수 있다.
하나의 예로서 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야만 안식으로서 작용한다.
시각장애인은 안근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전오식은 자신만의 인식 대상이 있다.
안식은 사물의 모습만을 인식하고 이식은 그 소리만을 인식한다.
전오식 각각의 근과 그 인식 대상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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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은 안근(눈)에 의지하여 색깔과 모양을 식별하는 마음이다.
안식의 인식 대상인 색깔과 모양을 색경色境이라 한다. 색경에서 경境이란 인식 대상을 뜻한다.
마음에 따라 파악되는 인식 대상이 여러 종류가 되므로 색경ㆍ성경 등 다양한 명칭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식은 이근(귀)에 의지하여 소리를 식별하는 마음이다. 소리를 성경聲境이라 한다.
비식은 비근(코)에 의지하여 냄새를 식별하는 마음이다. 냄새를 향경香境이라 한다.
설식과 신식은 각각 설근(혀)과 신근(몸)에 의지하여 맛과 감촉을 식별하는 마음이다.
맛을 미경味境이라 하고, 감촉을 촉경觸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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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오식은 각각의 인식 대상이 지금 현재 바로 눈앞에 있을 때만 작용한다.
과거나 미래의 것을 전오식은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현재의 인식 대상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전오식이 하는 인식은 이름과 개념이 없는 인식이다.
안식이 나무를 인식할 때, 나무의 색깔과 모양은 인식하지만
그것이 녹색이라든가 둥근 모양이라든가 나무라든가 하는 개념 없이 인식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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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실에서 안식을 통한 우리의 인식은 거의가 다 이름과 개념을 동반한 인식이다.
은행잎 등 어떤 특정한 이름 없이 나뭇잎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름도 모르는 나뭇잎을 보았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이름도 모른다’거나 ‘나뭇잎’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인식이다.
안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실제의 인식이 이렇게 이름과 개념을 동반하는 까닭은
안식의 작용에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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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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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전오식과 달리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것을 그 인식 대상으로 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다고 하는 진리를 그 인식 대상으로 하여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의식의 인식 대상을 법경法境이라 한다.
법경은 30년 전 학창시절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1년 뒤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일일 수도 있다.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지금,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물건값도 법경이다.
의식은 이와 같이 시간과 공간에 제약 없이 어떤 것도 회상할 수 있고, 상상ㆍ추정ㆍ계산ㆍ사유할 수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과의 모양을 이름과 개념 없이 식별하는 것은 안식이다.
그러나 어제 본 사과의 모양을 회상하는 것은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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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이름과 개념을 동반한 인식을 행한다.
나와 너, 선과 악, 옳다ㆍ그르다, 밉다ㆍ곱다 등의 생각은 모두 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다.
공중도덕을 지키려는 것도 의식이고, 원한 맺힌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생각하는 것도 의식이다.
자다가 꿈을 꾸는 것도 의식이고, 실험 결과를 토대로 과학적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도 의식이다.
의식은 이와 같이 우리 생활에 유용할 때도 있지만 쓸데없는 번뇌를 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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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전오식과 함께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전오식과 같은 찰나에 함께 작용할 때의 의식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단독으로 작용할 때의 의식을 불구의식不俱意識이라 한다.
‘함께할 구俱’자를 써서 전오식과의 동시 작용 여부를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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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전오식과의 관련 하에 작용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자.
전오식은 의식과는 달리 의식과 함께 작용해야만 명료한 인식 작용을 할 수 있다.
바깥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소리 중 의식이 향하는 소리만이 우리에게는 명료하게 들린다.
소리를 듣는 이식은 의식과 함께해야만 명료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나머지 전오식도 이식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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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향하는 것만 명확하게 보이고 들린다. 상대의 흉을 보려고 하면 흉만 보인다.
무엇을 보고자 하고 무엇을 듣고자 해야 할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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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전오식의 인식에 대해 개념적 사고를 행하기도 한다.
안식만으로 아무리 내 아들을 보고, 이식만으로 아무리 목탁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내 아들이나 목탁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없다. 그것의 형체나 진동만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들을 보는 순간 조금도 지체 없이 아들임을 안다.
의식이 안식의 작용에 아들이라는 이름과 개념을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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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다양한 작용을 하는 의식이지만 항상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경우에는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깊은 잠에 빠지거나 기절했을 때 의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무상천無想天이라는 천상에 태어나면 의식은 전연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이나 멸진정滅盡定이라 불리는 선정에 들어도 의식은 작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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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무상천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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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근意根과 말나식末那識 - 유식唯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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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러가는 부평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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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혈육이나 지인을 갑작스레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
그 사연을 듣다 보면 나도 떠나보낸 사람들의 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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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청년의 타계에 대해서 들었다.
착하고 순진한 이 청년은 만취가 된 상태에서 계획된 범행에 말려들었다.
그는 평소의 습관, 유식으로 말하면 평상시 심은 종자가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행을 도모한 나쁜 이들은 일을 꾸며 고발을 했고 청년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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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과정에서 청년은 심한 모욕을 느꼈다. 그렇다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던 청년은 결국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그의 심정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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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타계 사연을 들은 다음 날 새벽, 예불이 끝난 뒤 불전佛前에 새로이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 다음,
단정히 앉아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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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청청취 원래시부평水上靑靑翠 元來是浮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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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초는 원래 부평이라, 물의 흐름에 따라 어디로 흐르든 언제나 맑고 푸릅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러하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부디 이번의 생에 한恨과 미련을 두지 마시고, 훨훨 극락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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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께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한동안 고요히 입정入定하였다.
고인을 위한 기원이 순수하고 진실할 때, 기원하는 자는 기원의 내용 그 자체가 된다.
온 천지가 기원 그대로이니, 그대의 극락왕생은 바로 나의 극락왕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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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근意根에 대한 오해와 3과설三科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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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서 작용하고 이식은 이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前五識은 자신만의 특정한 한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의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무엇을 의근이라 할까?
눈을 안근이라 하고 귀를 이근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뇌를 의근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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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근에서 신근까지의 5근이 육체적인 것인 반면, 의근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는 의근을 직전 찰나에 작용하고 소멸한 6식이라고 했다.
어떤 소리를 듣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소리를 들은 것은 이식이고, 그다음 순간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은 의식이다.
이때의 이식이 의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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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뿐만 아니라 한 찰나 전의 식은 무엇이든 모두 의근이 될 수 있다.
설일체유부는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만을 인정하고
(6식이 각각 별개로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직전 호 참조),
모든 것은 한 찰나만 작용하며, 한 찰나에 두 가지 이상의 식이 동시에 작용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직전 찰나에 작용한, 6식 가운데의 어느 한 식이 의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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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근은 안식만이 독점하는 근이다. 이와 같이 전오식 각각은 자신만의 독점적인 근을 갖는다.
따라서 의근도 의식의 독점적인 근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의근은 의식뿐만 아니라 전오식의 의지처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것의 모양만 계속 보고 있을 경우, 다시 말해 안식만이 계속 작용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직전 찰나의 안식은 다음 찰나에 일어나는 안식의 의근이 된다.
안근에서 신근까지의 5근은 독점적인 근인데 반해, 의근은 6식 모두에게 공유되는 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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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의 유식에서는 무엇을 의근이라고 할까? 말나식이 의근이다.
안근과 안식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의근과 의식도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말나식을 의근으로 정립했다.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의근은 직전 찰나에 소멸한 것이기 때문에 의식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의근으로서의 말나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 후반부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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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이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법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달마dharma이며 빨리어로는 담마dhamma인데,
이것이 중국에서 ‘법’으로 의역되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법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진리,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셋째는 존재ㆍ현상ㆍ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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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깨닫다.” 할 때의 법은 진리를 뜻한다.
‘불법佛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때의 법은 가르침을 의미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제법諸法이란 모든 법이란 뜻인데,
이때의 법이 존재나 현상 혹은 사물을 의미하는 법이다.
모든 존재ㆍ현상ㆍ사물에는 고정불변의 아我가 없다는 것이 제법무아의 전체적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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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 중 존재나 현상 혹은 사물을 의미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자.
초기 경전에서 제법諸法으로, 다시 말해 모든 존재로 언급되는 것은
5온五蘊인 경우도 있고, 12처十二處 또는 18계十八界인 경우도 있다.
요컨대 5온이라는 틀로 모든 존재를 거론하기도 하고,
12처나 18계의 틀로 모든 존재를 거론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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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정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식하는 주관과 그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모든 존재를 분류한다.
그냥 산과 시냇물과 사람 등이 있다고 하지 않고,
눈(안근)에 의지하여 작용하는 안식이라는 마음에 의해 인식된
‘(산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산의 모양(색경)’이 있다고 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귀(이근)에 의지하여 작용하는 이식이라는 마음에 의해 인식된
‘(시냇물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성경)’가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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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분류하면 우리에게 인식된 시냇물은
그 ‘모양과 색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생각의 대상’, 즉 색성향미촉법의 6경六境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도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근이라는 6가지 기관,
즉 안이비설신의의 6근六根과 그 기관을 통한 인식 작용인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六識으로 나누어진다.
이 6경과 6근과 6식의 총합을 18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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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ㆍ나ㆍ매화 등 세상의 모든 것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은 18계 속에 다 들어가고 18계는 모든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18계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라고 하면,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 무아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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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이렇게 인식 주관과 그 대상을 축으로 모든 존재를 파악하는 까닭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것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독화살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몸에 박힌 독화살을 뽑는 것이 급선무다.
모든 번뇌의 뿌리인 탐진치 삼독은 재물과 명예와 관념 등에 대한 집착에 의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재물 등에 대해 우리는 인식과 판단이 가능하며, 이에 대한 집착이 내 몸에 박힌 독화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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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설혹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반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은 독화살을 맞고도 “쏜 사람의 이름과 출신지를 알기 전에는,
활과 화살의 종류가 무엇인지 판명되기 전에는 독화살을 뽑지 않겠다.” 하며 우기고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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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이르는 데 관건을 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18계 속에 다 들어가며, 18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는 죄다 무상하고 무아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라서
자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붙잡으려고 해도 언젠가는 다 떠나간다.
그러니 놓을 줄도 알고, 과거에 오염된 눈이 아니라
순간순간 새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사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을 보이고자 불교는 모든 존재를 5온이나 12처 또는 18계의 체계로 분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니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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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5온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총합을 가리키고, 12처는 6근과 6경의 총합을 가리킨다.
18계로 모든 존재를 분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초기 불교는 5온 또는 12처로도 모든 존재를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5온ㆍ12처ㆍ18계는 존재를 분류하는 방식에 따른 차이일 뿐
이 셋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일체의 존재’이다.
이 셋을 3과三科라고 하는데, 일체의 존재가 설해지는 3가지 과목이라는 뜻이다.
한편 일체의 존재에 대해 설일체유부는 5위 75법으로 분류하고, 유식은 5위 100법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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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의할 것은 12처에서 말하는 의근(의처)과 18계에서 언급되는 의근(의계)은 다르다는 것이다.
12처에서는 6식 자체가 없다. 12처에서의 의근은 18계에서 말하는 의근과 6식을 다 포함한 개념이다.
즉 ‘12처의 의근’=‘18계의 의근’+‘18계의 6식’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의식의 의지처로서의 의근은 18계에서 말하는 의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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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無색 무無수상행식’은 5온이 자성自性으로서는 없다는 뜻으로,
5온은 곧 공空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5온이 곧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곧 공임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無안이비설신의 무無색성향미촉법’과 ‘무無안계 내지 무無의식계’는
각각 12처의 공과 18계의 공, 곧 일체의 공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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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나식末那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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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이 출현하면서 비로소 거론되기 시작한 마음이 말나식과 아뢰야식이다.
그런 만큼 이 두 마음은 유식의 큰 특징 중의 하나를 이룬다. 말나식이란 어떤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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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절망하여 자살하기로 했다.
절벽 위에 서서 투신하려던 찰나,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바위 하나가 자신을 향해 굴러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려 바위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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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의식은 합리적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투신하는 것이나 바위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이나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냥 부딪혀 떨어지자.’
그러나 의식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의식이 그 생각에만 빠져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애착하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살기 위해 바위를 피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도 모르게’란 ‘의식도 모르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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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여타의 마음과는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선천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제7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은 자나 깨나 “나! 나!” 하면서 무의식적인 자아의식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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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는 완전히 별개인 고정불변의 ‘나(我)’가 있다고 보아 그 ‘나’에 집착하는 것이 자아의식이다.
자아의식을 말나식만이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제6의식도 일으킨다.
자신의 신체나 정신 작용을 대상으로 그것이 곧 ‘나’라고 보고
그 ‘나’에 집착하는 것은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이다.
자신의 용모나 재산, 학벌 등에 집착하는 것은 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말나식은 의식이 자아의식을 일으키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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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자아의식은 강해서 자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말나식의 자아의식은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게 일어난다.
의식이 늘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나식은 대단히 높은 수행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한 찰나도 단절 없이 언제나 자아의식을 일으킨다.
그 작용이 자각 못할 정도로 미세하면서도 언제나 일어난다는 점은 말나식뿐만 아니라
다음에 이야기할 아뢰야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두 마음을 흔히 잠재적인 마음, 혹은 무의식에 가까운 마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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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에서 ‘말나’란 산스끄리뜨 마나스manas를 발음 그대로 옮긴 음역어이다.
이때의 ‘마나스’를 의역한 말이 ‘사량思量’으로 말나식을 사량식이라고도 부른다.
‘생각할 사思’와 ‘헤아릴 량量’의 합성어가 사량이므로 사량이란 ‘생각하고 잰다’는 뜻이다.
따라서 말나식은 생각하고 재는 마음이란 뜻인데 무엇을 대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잰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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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에는 4가지 번뇌 작용이 항상 따라붙는다.
첫 번째가 아치我癡로, 무아無我에 대한 어리석음을 말한다.
고정불변의 ‘나’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두 번째는 아견我見이다. 고정불변의 ‘나’가 있다고 집착하는 작용을 말한다.
세 번째는 아만我慢인데, 아치와 아견에 의해 설정된 ‘나’에 대하여 잘난 체하며 뽐내는 교만의 작용이다.
마지막이 아애我愛로, ‘나’에 대한 애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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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4가지 번뇌 작용을 일으켜
아뢰야식을 항상 ‘나’로서 집착하고 이에 대한 교만과 애착을 일으킨다.
사량思量, 즉 생각하고 잰다는 것은 고정불변의 ‘나’가 아닌
아뢰야식을 그런 ‘나’로 생각하며 뽐내고 애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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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의 사량 작용을 구체적으로는 ‘항심사량恒審思量’이라고 한다.
‘항상 항恒’자와 ‘자세히 심審’자이므로, 말나식은 항상 사량하고 명확하게 사량한다는 뜻이다.
이 중 항상 사량한다는 것은 중생인 한, 말나식의 자아 집착은 한순간도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잠을 자고 있을 때나 식물인간인 상태에서도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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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말나식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까?
말나식은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소멸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라는 지혜로 바뀐다.
평등성지는 온몸으로 자타가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은 지혜를 말한다.
또 멸진정이라는 선정에 들었을 때와
유식의 수행 5단계 중 세 번째 단계인 견도見道 이후부터는 일시적으로 말나식의 작용이 멈추기도 한다.
한편 말나식이 명확하게 사량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을 ‘나’라고 명확하게 집요히 집착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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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말나식의 자아 집착 작용이 말나식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 모두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말나식을 염오의染汚意라고도 부르는 것은
탁한 물감이 연못 전체를 물들이듯이 6식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앞에서 유식은 의근을 말나식으로 본다고 했다.
이때의 의근이란 안근이 안식을 생하게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의지처라기보다
의식을 포함한 6식을 오염시키는 의지처라는 의미에서의 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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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의 이러한 작용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인식과 행동은 나에 대한 집착으로 물들고 만다.
우리는 뭔가를 볼 때 그냥 보지 않는다.
본인은 알아채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미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을 엄연히 구분하여 보고 있다.
말나식의 영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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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선행을 하고 명상을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나’라는 때가 묻고 만다.
‘내가 한다.’, ‘이런 것을 하는 내가 자랑스럽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나에게 큰 이익이 되겠지.’라는 형태로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거나 이익을 얻지 못할 때 섭섭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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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식의 집착 작용이 멈추지 않는 한 해탈은 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음 호에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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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업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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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_()_
봄봄님...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본문만을 기준으로 하면
본문의 말나식은 상좌부의 재생연결식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경문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心行연 識까지-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할 때의
[名身과 결합된 識]과 위치가 유사합니다.
반면에 아뢰아식은 [무명에 의한 (심)行]까지와 비슷한 위치로 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識은 根을 토대로 일어난다고 하는데, 위의 글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네요...
이전 마음(전오식)을 다음 마음(의식)이 일어나는 根이라고 하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안근은 안식의 토대... 그래서 근과 식이 구분되는데...
의식은 이전 마음(전오識)을 토대로 한다고 하니
의근도 識이고 의식도 識인데......^^
@해맑은 본문 (빨간색으로 표시한) [의식의 의지처로서의 의근은 18계에서 말하는 의근이다]...
에서 내용중에도 설명이 있지만 18계에서 말하는 의근(=意界)가 意識의 根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설명은 이러한 의미 같습니다.
[의근도 識이고 의식도 識인데...]라는 말씀은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心體一]?
고맙습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