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뉴턴(1725-1807년) : 아프리카 노예 무역선의 선장 출신으로, “Amazing Grace”를 작사했다.
찰스 시미언(1759-1836년) : 영국 국교회의 교구 목사로서 교구민들의 극심한 반대를 54년간 견뎌 냈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년) : 신실하고 복음적인 영국 하원의원으로 1807년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대한 최초의 승리를 위해 30년간 끊임없이 싸웠고, 노예 제도 자체가 불법으로 선언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다시 26년간 더 싸웠다.
⇒ 그들은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존경했던 동시대인이다. 시미언과 윌버포스는 동갑이고 뉴턴은 그들보다 34살 연상이다. 뉴턴은 아버지, 조언자, 격려자 역할을 하였다.
제 1장. 존 뉴턴 – 몸에 밴 온유함의 단단한 뿌리
1. 그의 생애
① 1725년 7월 24일. 런던에서 경건한 어머니와 불신자이며 뱃사람인 아버지 슬하에서 출생. 그의 어머니는 회중교회의 교인으로 외아들인 존에게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과 아이작 와츠의 찬송을 가르침
② 1732년 6살. 그의 어머니 별세. 그의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는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③ 1734년 8-11살. 2년간 해트퍼드 어느 기숙학교에 다님. 그것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다. 그는 주로 독학으로 공부. 정규 신학 교육도 받아 본 적이 없다.
④ 11-18살. 아버지와 함께 먼 바다 항해 다님. 지중해를 5차례 항해
“아버지는 자를 사랑하셨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버지의 엄격한 태도는 … 나의 영혼을 위압하고 짓눌렀다.”
⑤ 18세. 해군에 입대.
“나는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었다. 내 눈앞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⑥ 20세.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남동쪽의 어느 작은 섬에 내려 1년 반 동안 거의 절망적인 노예처럼 살았다. 그런데 배 한 척이 섬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그 섬에 정박하고 그 배의 선장이 그의 아버지와 아는 사람이어서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손을 써주었다.(1747년 2월. 21살)
⑦ 1748년 3월 21일. 북대서양에서 영국으로 항해하던 길에 하나님은 이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을 일삼는 자”를 구원하시려고 역사하신다. 그날 밤 그는 격렬한 폭풍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고,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고백한다. 뉴턴은 남은 항해 기간 내내 무척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보낸다. 57년 뒤인 1805년 같은 날, 80세 때 뉴턴은 자기 일기장에 “1805년 3월 21일,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돌아오는 이 날을 겸손과 기도와 찬양으로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쓴다. 그는 그 날을 거룩하고 소중한 날로 기억했다. 그는 “내 안에 제 2의 천성처럼 깊이 뿌리박혀 있는 듯 보였던 욕하는 버릇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⑧ 그는 노예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1749년 12월까지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러나 성숙해진 이후 그는 노예무역에 동참한 데 대해 강한 죄책감을 느낀다.
⑨ 1750년 2월 1일. 메리와 결혼한다. 17살 때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그때 그녀는 14살) 1790년 메리가 눈을 감을 때까지 40년간 산다. 뉴턴은 아내 눈을 감은 뒤 3년 뒤 결혼한 뒤 아프리카로 세 차례 항해를 하면서 아내에서 썼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낸다. 결혼한 해 6월 그의 아버지는 허드슨 만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한다. 존은 결혼 이후 세 번의 장기 항해를 하고 1754년 11월, 간질 발작을 일으킨 뒤로는 다시는 항해를 떠나지 않는다. 존과 메리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조카딸 둘을 입양했다.
⑩ 리버풀에서 측량기사 생활을 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교회를 섬긴다. 그는 특별히 조지 휫필드에게 매료된다. 뉴턴은 독학으로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공부를 한다. “나는 아마 조만간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역자로 부르실지 모른다는 얀간의 소망을 품었다.”고 쓴다. 그는 성경에 집중했다. 1760년대 초반에 뉴턴의 신학체계는 완성이 되고,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신봉하는 칼빈주의자가 된다.
⑪ 1764년. 영국 국교회 올니 교구의 교구목사 직을 받아들여 거의 16년간 그곳의 교회를 섬긴다.
⑫ 1779년 12월 8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 울노스 교회의 청빙을 받아 27년에 걸친 목회를 시작한다. 1806년 10월, 메리 교회 강단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한다. 81세 때
⑬ 1807년 12월 21일. 82세. 세상을 떠남,
2. 뉴턴의 삶과 사역 – 몸에 밴 온유함의 단단한 뿌리
① 그의 온유함과 뿌리 – 40년 넘는 그의 목회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몸에 밴 온유함’은 뉴턴이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신자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믿고 실감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을 힘입어 산다. 이는 그에게 몸에 밴 온유함과 영혼의 부드러움을 가져다준다.”
② 그의 삶의 특징 : 사람에 대한 사랑
그는 멸망해가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구속 받은 자신의 양떼로 사랑했다. “그는 첫눈에 사람들을 사랑한다.” 뉴턴의 사람의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길 잃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③ 그리스도를 닮은 온유함 :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막 10장 14절)
뉴턴이 올니에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목요일 오후에 어린아이들을 위한 모임을 시작한 일이다. 그는 직접 아이들을 만나 그들에게 숙제도 내주고 성경 말씀도 들려주었다. 한 200명 정도의 아이가 꾸준히 나오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④ 43년간 섬긴 두 교회 성도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 그는 그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⑤ 낙심한 영혼을 돌보았다. 그 예가 정신 질환을 앓은 시인이며 뉴턴이 16년 동안 올니에 있었을 때 12년 동안 올니에서 살았던 찬송가 작사가 윌리엄 쿠퍼다. 그는 한 번은 5개월, 또 한 번은 14개월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돌본다.
⑥ 그의 온유함. 그에게는 진리 곧 하나님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관점 전체를 전파하고나 하는 열정이 있었으나 논쟁은 그러한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논쟁은 피했다. 그는 “내가 은혜의 교리에 대한 얻은 관점은 나 자신의 평안에 필수적이다. 그것 없이는 하루도, 한 시간도 평안히 살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자들과의 논쟁은 피했다. 그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더 관심을 가졌다.
⑦ 뉴턴 : 영적인 시인의 눈과 가슴과 혀를 가진 사람.
그는 찬송가와 시를 지었다. 그는 진리를 매력적이고 치유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뉴턴의 언어는 추상적이기 보다 구체적은 표현으로 가득했다.
⑧ 그의 온유함에는 유머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느 날 뉴턴은 재채기로 콧잔등 위에 내려앉은 파리 한 마디를 쫓아버린 뒤 곧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이 파리가 일기를 쓴다면 오늘은 끔찍한 지진이 발생한 날로 기록할 겁니다.’”
⑨ 그의 온유함의 근원 : 겸손과 감사다.
72세 때 자신이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서 “나 같은 죄인이 목숨을 부지하고 용서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과거에 모욕하고 부인했던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을 얻도록 예정되다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역대하 17장 16절(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을 바탕으로 한 새해 설교에 맞추어 쓰인 곡이다.